2화
검은머리 기사왕 2화
“잠, 잠깐 기절한 거예요! 제발······!”
“비켜라.”
“아아악! 안돼!!”
갑주로 무장한 오크가 무리한 노동에 지쳐 쓰러진 아이를 끌고 간다.
당연히 아이의 엄마는 절규했고 칼을 찬 오크 전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저대로 끌려간다면, 뼈조차 남기지 않고 잡아먹을 게 분명한 오크 놈들.
아이 엄마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집어 든 오크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를 걷어차 버린다.
퍽!
“- - - - - - - - -.”
비명이 사라졌다.
강철 군화에 복부를 얻어맞은 아이의 엄마는 더러운 진창에 정신을 잃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분노하기는커녕 고개를 숙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는 것에 집중했다.
마치 닭장에서 오늘 먹을 닭을 골라가듯 아이를 질질 끌고 돌아가는 오크 놈들.
이 모든 비극은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사각, 사각.
멍청한 오크 놈들은 손재주가 둔해 화살대를 잘 깎아내지 못한다.
덕분에 나와 같이 작은 인간들은 놈들이 사용할 화살대를 생산하는 일에 매달렸다.
개인당 주어진 할당량은 하루 150개, 그것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의 지표였다.
반복, 그리고 또 반복.
하지만 일주일부터 등장한 이 소녀는 반복되는 내 일상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왜 나를 바라보지?”
“당신은 막을 수 있었잖아요.”
정말 우연이었다.
판잣집에 숨겨둔 검을 닦고자 꺼내 들었던 것도, 때마침 저 소녀가 그 광경을 목격한 것도 전부 우연의 일치였다.
인간이 검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무거운 죄.
하지만 눈을 마주친 소녀의 첫마디는 밀고도 비명도 아닌 무미건조한 부탁이었다.
‘검을 가르쳐주세요.’
웃기는 일이었다.
작은 농기구조차 들지 못하게 된 인간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니.
만약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웃느라 바닥을 굴러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소녀는 너무나 진지하고 집요했다.
‘검을 가르쳐주세요.’
‘안돼!’
‘딱 한 번만요.’
노이로제에 걸린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찾아와 애원하는 소녀는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검을 가르쳐 달라,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신에게 휘두르는 방법을 알려달라.
도대체 무엇이 소녀를 저리 간절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더럽고 낡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탓하는 거냐?”
“······아니요, 그냥 분해서요.”
“딱 분만 삼켜라, 오래 살고 싶으면.”
내가 대단한 검사라 치고 아이와 여자를 구한다고 하자, 하지만 그다음에는?
아마 개떼처럼 몰려온 오크 놈들은 검을 휘두른 나를 죽이고 반항한 대가를 물어 마을 사람을 전부 몰살시킬 것이다.
그리고 시체는 저녁 만찬으로 사용되어 묘비조차 세우지 못할 것이다.
겨우 한 번의 실수로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일,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절대 나서지 마라.
지난 8년간 현실이 인간에 가르쳐준 것은 딱 거기까지.
하지만 대답을 듣기도전에 배급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관심이 식는 건 한순간이었다.
땡! 땡땡! 땡!
하루에 딱 한 번 있는 정식 배급이자 죽지 않을 만큼 주어지는 유일한 양식.
그릇을 든 사람들이 허름한 배급 마차를 향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배급을 위해 나온 사람들에게 아우성치며 서로를 밀쳤다.
내용은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와 거친 나무뿌리뿐이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거라도 먹어야만 했다.
“젠장, 또 양을 줄였어.”
“빌어먹을. 겨우 이거 먹고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야.”
전쟁 같던 배급이 끝이 나고 사람들은 차가운 눈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지독한 현실을 비관하며 냄새나는 거적때기를 감싸 안는다.
갈수록 할당량을 늘어나는 것에 비해 서서히 줄어드는 배급량.
저 멀리서 낄낄거리는 오크들이 배급에 또 장난질해놓은 모양인데, 오늘따라 콩 찌꺼기로 만든 뭉치가 작아 보인다.
우적, 우적.
하지만 들리지도 않는 불평은 잠시일 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토록 지겨워하는 콩 찌꺼기를 입안으로 넣느라 바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 식사를 시작한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광경을 시야에 담았다.
자식을 잃어 혼절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챙겨 입안에 콩 찌꺼기를 넣어주는 소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나에게만큼은 유난히 신경 쓰였다.
“후······.”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러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 봤자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오늘따라 매서운 추위에 지친 나는 짙은 한숨과 함께 8년 전을 회상했다.
‘후계를 찾아다오.’
왕의 후계를 찾기 위해 북방을 떠돈 지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선정한 후보는 10명이 넘었으며 모두가 하나 같이 뛰어난 재능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후보라 한들 기사왕의 특별함은 따라갈 수 없었다.
용기와 광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 재능이라는 늪에 스스로 삼켜지는 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후보들은 곁을 떠나거나 죽었고 나는 8년을 소비했다.
그리고 그 8년이라는 시간은 내가 지니고 있던 희망을 무디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는 지쳤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린 소녀에게 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지쳤다.
나는 비겁해지는 양심을 익숙한 듯 외면하며 멀어지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에 꽉 막힌 감정과 콩 찌꺼기를 억지로 삼킨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된 노동과 반복되는 시간.
오늘도 그렇게 의미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 * *
스윽, 스윽.
왕이 남긴 검을 들고 북방을 떠돈 지 8년하고도 10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검을 닦은 기억도 8년하고도 10개월이었다.
하지만 오늘 침대 밑에서 꺼낸 검은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마치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냐는 듯 나를 질책하면서 말이다.
이른 여명이 비치는 검날 뒤로 보이는 초췌하고 더러운 내 모습.
아무리 날을 닦고 기름을 칠해도 그 얼굴은 밝게 변하지 못했다.
오크 놈들의 내전이 길어지고 있다.
벌써 2년째 이어지는 왕위 쟁탈전은 남쪽과 중앙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오크의 지배를 받는 북방 인간들은 다시 봉기할 생각은커녕 갈수록 심해지는 통치에 고통받고 있었다.
어제만 해도 죽어 나간 사람이 12명.
근처 나무도 다 잘려 나갔으니 이 마을 수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듯 마을이 나를 기억하기 전에 떠날 준비를 했다.
오크 놈들 몰래 캔 식용 뿌리, 차가운 북방 바람에 말린 질긴 쥐 고기.
다른 마을로 이동할 동안 먹을 양식을 가죽 가방에 소중히 챙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검은 깨끗한 천으로 감싸 허리춤에 조용히 매달았다.
앞으로 30분 뒤에 기상 종소리가 울린다.
그 전에 이 마을을 빠져나가야 하는 나는 한동안 신세 진 낡은 침대를 뒤로한 채 판잣집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덜컹.
“···············.”
습관적으로 옆을 살폈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김없이 천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소녀가 덜덜 떨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오늘 포기했으면 이 초겨울 추위를 피할 수가 있었을 텐데.
일주일째 미련을 놓지 못한 소녀는 오늘도 나를 찾아와 검술을 구걸하고 있었다.
내가 조용히 눈을 마주치자, 입술을 파랗게 변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화가 났다, 그것은 8년간 홀로 고뇌해야 했던 외로움에 반발이었고 포기하지 못한 소녀를 향한 짜증이기도 했다.
도대체 모든 희망이 끝난 세상에서 왜 발버둥을 치려 하는 것인가?
나는 부끄러움인지 모를 감정을 애써 숨긴 채 덜덜 떠는 소녀에게 차갑게 말했다.
“밀고 하려면 지금 해라, 거주 지역을 떠난 죄까지 불면 빵 쪼가리라도 얻겠지.”
“저, 저는······.”
쾅!
문을 강하게 닫는 것으로 대답을 끊었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소녀는 형편없이 엉덩방아를 찍는다.
도대체 왜 나를 찾아와, 정리하고 있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가.
나는 떨려오는 양심을 애써 부여잡다 이내 고개를 돌려 판잣집을 떠났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뻗어지던 소녀의 손이 떨림과 함께 천천히 떨어진다.
사박, 사박, 사박.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마을은 살아남기 위한 월동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따뜻한 지상이 아닌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북방을 맴돌 예정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백색 땅에서 왕의 후계를 찾기 위해 말이다.
이유는 없었다.
나 또한 떠도는 망령이니까.
* * *
“서둘러 움직여! 낙오되는 놈은 오늘 저녁밥으로 올라갈 줄 알아라!”
짜악!
오크 감독관이 채찍을 휘두른다.
그러자 인간 노예들은 벌벌 떨며 짐을 옮기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장장이가 해체하는 용광로와 고기를 끓이는 냄비에서 올라는 연기.
강철 냄새와 퀴퀴한 시체 썩은 내는 오크 숙영지를 대표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겨울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오크들은 겨울이 시작된 오늘을 기점으로 숙영지를 옮길 예정이었다.
“- - - - - - - - -.”
매해 반복되는 숙영지 이동이다.
그리고 그 이동날짜를 정확하게 꿰고 있는 나는 마을과 멀지 않는 숙영지 근처에 몸을 숨긴 채 밤을 기다렸다.
수많은 오크와 인간 노예들이 이동하는 날인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숙영지.
평소 삼엄했던 시설 경비는 오늘따라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과감히 도둑질할 기회다.
나는 바삐 움직이는 오크 놈들을 피해 조용히 마구간으로 숨어들었다.
푸르륵! 푸륵!
북방을 떠돌며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은 바로 이동 수단의 부재였다.
일반적인 말은 이 매서운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방에서 나고 자라, 추위에 적응한 흰 뿔 사슴은 그렇지 않았다.
길들이기 쉬운 온순함, 높은 산 정도는 거뜬하게 넘어가는 지구력.
북방에서만큼은 이 흰 뿔 사슴을 대체할 이동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푸륵!
다행히 마구간을 지키는 경비는 없었다.
여유롭게 흰 뿔 사슴 한 마리를 쓰다듬은 나는 고삐를 쥐고 짐을 실었다.
한동안 북방을 떠도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줄 8번째 흰 뿔 사슴.
곧 다가올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흰 뿔 사슴은 사뿐사뿐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그 순간,
마구간 바로 앞에서 기척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 화살대 마을이라고 했나? 차라리 내가 당직이었어야 했는데.”
“초겨울에 처형식이라니, 오늘따라 서전트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오크들이다.
마구간 근처를 지나가는 모양인데, 다행히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우연히 듣게 된 단어 하나가 숨을 죽인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크 놈들이 말하는 ‘처형식’.
명예로운 전쟁을 기원하는 제사이자, 반항한 인간을 본보기로 죽이는 공개 처형식.
그 처형식이 내가 빠져나왔던 화살대 마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제물이 질이 좋은 모양이야. 머리를 잘라서 본토로 가져갈 예정이라는군.”
“그 정도인가? 도대체 뭐길래······.”
“나도 소문으로 들은 건데 말이야, 제물이 그거라더군.”
“그거?”
“그거 있잖는가, 검은 머리.”
검은 머리.
유일하게 기사왕과 나만이 가지고 있어, 인간 부흥의 상징이라 불려왔던 검은 머리.
그 순간 내 기억 사이로 항상 짧은 머리를 천 모자로 가리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끄럽게 떠들던 오크가 마구간을 지나가고 나는 어느덧 백발로 세어버린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고삐를 부여잡은 오른손은 어느새 달려왔던 방향을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