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검은머리 기사왕 1화
내가 처음 마주한 이 세계는 새하얀 눈이 지배하는 거대한 동토였다.
밤보다 짧은 낮, 사지가 얼어붙는 추위.
질긴 이끼조차 죽어가는 혹독한 설산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장소였다.
왜 이런 곳에 떨어진 걸까, 과연 이 추위가 현실이기는 한 걸까.
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변화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는 그런 단순한 고민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살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맹수를 피하고 눈 아래 숨으며 끝없이 이어진 설산을 걷고 또 걸었다.
질긴 목숨을 부여잡고 하루, 또 하루를 필사적으로 버텨온 육체.
이틀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방황만 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산 아래 나와 같은 인간이 이룬 마을을 발견한 것이다.
기뻤다, 희열을 느꼈다.
같은 인간이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미친 듯이 마을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그들은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도리어 내 검은 머리를 겁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처음 듣는 언어를 사용하며 내게 육중한 몽둥이와 창을 던지는 그들.
정말 죽기 직전까지 맞아야 했던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한동안 마을 주변을 떠돌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조금 알아듣게 될 때쯤.
나는 이곳이 북방이라 불린다는 것과.
이 아래 대륙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니었다.
‘천 년을 사는 엘프.’
‘강철을 다루는 오크.’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직립보행을 시작한 알파가 인간이 아닌 엘프였다면 어땠을까.
태초의 불을 발견한 오메가가 사람이 아닌 오크였다면 어땠을까.
오직 인류뿐이라는 상식 자체가 부정되고 그 사이를 침투하는 우월한 타 영장목.
장담컨대, 호모 사피엔스에게 밀리고 도태된 네안데르탈인처럼 인류는 멸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재수 없게도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 떨어지고 말았다.
종족 전쟁에서 진 인간이 북쪽으로 쫓겨나, 천천히 멸종하는 인류의 아포칼립스이자 묵시(默示)를 같이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낱 이방인인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이곳에 떨어진 것마저 내 의지가 아니었고 이들이 인간이라 부르는 무리에게 있어 조차 나는 다른 종이었다.
단 한 명, 단 한 개체, 오직 하나.
이들이 소수라 약자였다면 나는 그보다 못한 존재였던 거다.
허나 나는 살고자 했다.
빌어먹고 훔쳐먹고 담장을 넘는 한이 있더라고 나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 해가 뜨는 여름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는 세월은 쌓이는 눈처럼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녹지 않는 동토와 함께 이 비참한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때아닌 변화는 이 북방에 존재하지 않는 가을과 함께 찾아왔다.
정말로 눈이 부셨던 한 남자와 함께.
‘검은 머리! 나와 같은 색이 아닌가.’
나와 같이 검은 머리를 지니고 있던 그는 스스로를 기사라 부르고 왕이라 칭했다.
그리고 이 좁고 추운 북방에서 벗어나 인간 왕국을 세운다는 크나큰 이상을 가지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최초의 기사, 인간 최초의 왕!
멸종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인류 사이에서 드디어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이름이 뭐지?’
그러나 나를 눈뜨게 한 것은 영웅의 탄생도, 멸종의 역변도 아니었다.
그저 짐승이라 배척받던 나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물어봤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내 이름, 내 이름이 무엇이지?
더러운 짐승, 원숭이, 주워 먹는 거지, 열등한 털 덩어리로 불리던 내 이름이?
세기를 포기한 세월만큼 그 어떠한 기억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함께 가자.’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자리를 만들어주며 처음으로 집단이라는 곳에 소속되게 해주었다.
지독하리만큼 외롭던 방관자에서 벗어나, 같은 ‘인간’이 될 수가 있었던 나.
그것은 한줄기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북방은 우리 어머니다.’
이상도 없었다, 이념도 없었다.
내게 인간 왕국을 세우자는 목표는 잡히지 않는 뜬구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앞에서 방패를 들었고 용감하게 무딘 창을 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흉터와 공적이라는 이름 아래 쌓여가는 경험.
그것은 전쟁과 피에 취한 광기가 아닌 또 다른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기사왕의 종자가 되었다.
‘얼마나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 건지가 중요할 뿐이다.’
‘부러지는 검! 그게 네 이름이다.’
검을 받고 이름을 받았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허물을 벗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또 다른 이름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내게 내려진 천명과 함께 인간이라는 종족에게도 황금기가 찾아왔다.
엘프만큼 현명한 현자.
오크만큼 용맹한 전사.
수많은 영웅이 깃발 아래 뭉쳤다.
약했던 인간은 강철로 무장하고 훈련을 통해 정병으로 육성되었다.
통일된 북방을 넘어서, 꿀과 젖이 흐르는 중앙으로 진출한 인간들.
서쪽 엘프와 남쪽 오크가 그토록 경계하던 인간 왕국이 세워졌다.
물론 이방인이라는 저주를 뿌리치지 못한 나는 끝까지 기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절망하기보다는 대륙을 활주하는 주역들을 성심껏 보좌하고자 했다.
왕이 원했던 이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겨우 검집일 뿐인 삶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꿈은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왜 울고 있는가, 종자여.’
장자의 나비가 현실이 아니었듯, 이 꿈 또한 짧은 춘몽이었다.
‘당신이 죽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했던 전장에서 가장 위대했던 기사왕이 전사했다.
그 어떠한 배필도 후계도 없었던 그가 남긴 것은 한 자루 검뿐이었다.
자신이 없더라도 이 의지를 이어 줄 우리가 다시 결집하기를 바랐던 왕.
하지만 왕이 남긴 검 주위로 몰려드는 인간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왕이 죽었다.’
영웅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왕국은 마치 모래성처럼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기사왕이 평생을 바쳐 키워온 군대와 왕국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인간은 나라를 만들 자격이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싸워왔단 말인가?
인간이 갑작스러운 자멸에 의심하기도 전, 출정한 엘프와 오크는 분열된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심을 잃은 지옥도였다.
군대는 산채로 묻혔고 인간은 구분 없이 사지가 잘려 고리에 걸렸다.
멸종에 가까운 처절한 살육전이 왕국을 꿈꾼 인류에게 내려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북방에 홀로 떨어진 그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왕은 죽기 직전 홀로 남은 나에게 마지막 사명을 내려주었다.
‘후계를 찾아다오.’
위대한 자는 핏줄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숭고함은 어미의 배가 아닌 우리가 만든 요람으로 결정될 것이다.
왕은 서서히 눈을 감으며 내려놓을 수 없는 거대한 짐을 내게 남겼다.
인간을 이끌 다음 왕을 찾아라.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임무였다.
왕이 죽고 영웅은 사라진,
그리고 8년.
나는 여전히 후계를 찾지 못했고,
남은 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한낱 종자의 이야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