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169화 (169/170)

# 169

169화 제가 하겠습니다!

“왜지? 평범한 인간의 비루한 삶이 지루해서냐? 아니면 부와 명예가 탐이 나느냐?”

선인이 되고 싶다는 내 대답에 에오스가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지의 능력으로 가지게 될 그런 것들은 탐나지 않습니다. 원래 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그뿐이죠. 단 오년 간의 부와 명예를 칠십 년 수명과 맞바꿀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또한, 모든 기억을 지워 주신다고 하니, 반지가 제 것이 아닌들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기억도 나지 않을 텐데요.”

“그런데?”

기억 속에 있는 에오스는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인상을 쓰고 보는 여신이다.

특히 말대꾸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에오스는 달랐다.

눈빛은 자비로웠고, 미소는 인자했으며 목소리는 자상했다.

여신을 보는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었던 사실은 전부 허구였구나.

미래의 그녀는 ‘아마 내가 엉겁결에 선인이 된 것에 그리도 짜증이 났었나 보다.’라고…….

하지만 선인이 되고 싶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여신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될지라도.

“제가 선인이 되면 만나게 될 인연들…… 비록 모이라이 님께서 인연의 실로 엮어놓으신 인연이겠지만. 그들을 이제 다시 만날 수도, 서로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그 소중했던 사람들을 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신다고 하니 견딜 수 없이 슬픕니다.”

“하지만 선인이 되면 앞으로 오 년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데?”

에오스의 목소리에…… 오 년이라는 말에 힘이 실렸고, 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백 년을 더 산다고 한들 의미 없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태어난 김에 겸사겸사 사는 것보다는 오 년을 살더라도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남을 사람으로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 오 년이라 할지라도 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치유 받는 모습을 본 이상 그것을 어찌 그만두겠습니까? 앞으로 저는 보여주셨던 미래보다 더 열심히…… 감사해하며 살 겁니다.”

말을 끝마치며 신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이를 보며 에오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맴돌았다.

팟!

빛이 사라졌다.

새벽의 여신도 사라졌고 이 공간에 남은 것은 나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내게는 아주 익숙한 어둠이었다.

* * *

“……찮아? 시후야?”

무언가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기운이다.

“흐아음…….”

그것이 기분 좋아 나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떴는데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김남규 팀장 손이다.

손수건을 손에 쥐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아주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편안하게 숙면을 하고 일어난 듯 몸이 가벼워진 나는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는데, 반면에 김남규 팀장은 입을 떡 벌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기억 안 나? 조금 전에 터뷸런스(turbulence) 때문에 난리 났었잖아. 너는 놀라서 기절했었고……. 얼굴은 창백하지. 식은땀은 또 얼마나 흘렸는지 알아?”

“제가요?”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 와중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에 빠진 것도.

그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놀라서 기절했다고?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끈적끈적함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 식은땀을 흘렸다는 김남규 팀장의 말이 사실인가보다.

“그래, 인마! 어쨌거나 지금은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다. 월드 투어 중에는 잠도 거의 못 자는 것 같더니 푹 잤다면 더 다행이고. 지금 컨디션은 괜찮은 거지?”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졌어요.”

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남규 팀장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사실 지금은 무엇이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자리로 다시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충분해.’

* * *

무대 조명이 번쩍번쩍! 쉴 틈 없이 빛을 내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나도 덩달아 바삐 움직였는데 음향 점검하랴, 동선 점검하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판이다.

콘서트 준비가 한창인 실내 체육관.

막바지에 이른 월드 콘서트 리허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의 시간들이 그저 너무나도 행복했다.

“더 이상의 시험은 없을 것이다. 네 녀석은 제우스 님이 제안한 최종시험을 방금 통과했거든. 본디 이 시험의 끝은 죽음이지만 제우스 님께서는 이례적으로 네게 주어질 시간을 연장하셨다. 인간계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분이시니 은혜를 입었다 여겨야 할 것이야.”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말이 떠오른 나는 더욱 열성적으로 이 시간에 임했다.

그녀의 말에서 내가 미래를 본 것이나,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제우스의 공간에서 시험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똑같은 길을 걷겠다고 했던 내 확고한 의지와 정신력 덕분에 제우스는 내게 육십여 년의 시간을 부여했다고 했다.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단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들, 왔어요? 일찍 오셨네요.”

콘서트 시작을 두어 시간 남겨놓고 대기실에서 의상을 체크하고 있는 내게, 네 명의 사내가 우르르 다가온다.

국내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블랙 타이거’ 멤버들.

“응. 우리도 리허설 해야 해서.”

“준비는 다 됐어? 이야! 의상 끝내주네? 멋있다, 시후야.”

막내 진우는 내가 입고 있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부러움의 눈초리로 대했다.

전체적으로 블랙인 슈트에 레드로 포인트를 잡은 무대의상이었다.

이를 보고 래퍼 태곤이 팔꿈치로 진우를 가격했다.

“멍청아! 우리랑 똑같은 의상이잖아! 어제 피팅 해 봤잖아!”

“아, 그래?”

진우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꽤 귀엽다고 생각이 든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 형은 나이를 거꾸로 먹나?

몇 년이 흘러도 처음 봤을 때의 귀여움 그대로다.

“맞아요. 형들이 「달에서 온 너」를 부를 때 입을 의상이에요.”

“옛날처럼? 아, 그때 진짜 멋있었는데…….”

멋있긴 했다.

아이돌 그룹은 퍼포먼스에 강하고 보컬에 약하다는 선입견을 깨고 ‘블랙 타이거’가 실력 있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동혁의 보컬 실력 덕분이었다. 그날은 네 명의 멤버가 모두 매력을 발산했던 날이었다.

의 생방송 무대에서였고, <슈퍼 K-POP 스타 챌린지> 시즌 4에 출연했던 내가 처음으로 센터에 섰던 날이기도 했다.

“그때 아마 우리 덕분에 시후가 좀 뜨지 않았나 싶은데?”

리드보컬 성운의 말도 맞다.

비록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함께 섰지만, 한동안 크게 회자하였으니 나를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한번 크게 갚을게요. 게스트로 나와 주신 것도 보태서요.”

“그래? 그럼 기회를 줘야겠네. 이번에 ‘블랙 타이거’ 새 음반 나오거든. 네가 피처링(featuring)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아.”

나는 동혁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연습해 놓을게요.”

이 멤버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원하는 것이 피처링이라고 하니, 최선을 다해 참여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나다.

그런데.

“연습할 필요 없어. 네가 쓴 곡이거든.”

“아? 네…….”

김남규 팀장이 전에 언질을 준 적이 있다.

내가 써놓은 곡 몇 개를 아무래도 회사 소속 가수에게 주어야 할 것 같다고.

그것이 ‘블랙 타이거’에게 갔구나.

뭐, 잘된 일이다.

신세 진 것도 많은데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었으니.

“다음 주쯤에 녹음하자. 그다음 주에는 뮤비 촬영을 해야 해서…….”

“아, 맞다!”

동혁의 말에 잠자코 있던 막내 진우가 갑자기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말꼬리를 잘랐다.

“우리 이번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말이야. 동혁이 형이 주인공 맡았어.”

“그래요? 스토리가 있나 보네요? 형, 연기는 첫 도전 아니에요?”

가수들이 본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여 노래하거나 안무를 소화하는 장면을 찍는 것은 다반사였고 블랙 타이거 역시 그랬으나, 이들은 전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을 통틀어도 뮤직비디오에서 정통 연기를 선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를 알고 있는 나는 동혁의 부담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형이야 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화보이고, 영화인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진우가 코웃음을 치며 놀림조로 말했다.

“형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지, 아마? 그게 키스 신이라지? 무려 세 장면이라지?”

“아아, 그래요? 난 또 뭐라고. 그걸 왜 걱정해요? 형이 늘 하시던 대로…… 으악!”

진우에 이어 내 놀림이 이어지자 동혁은 발로 내 엉덩이를 살짝 걷어찼고 나는 과장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우리가 노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서로 간의 우정에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래, 형. 여주가 알아서 리드해 주겠지. 러블리(lovely) 한 로맨스 연기의 천재시잖아.”

“형은 진짜, 김 팀장님한테 감사해 해야 해.”

리드 보컬 성운과 태곤의 말이 이어졌고 나는 궁금해졌다.

“팀장님이 왜요?”

“김 팀장님이 친분이 있다며 여주인공 섭외해주셨어.”

“아……. 팀장님이 잘하셨네요. 근데 여주가 누구예요?”

내 질문에 블랙타이거 멤버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화영 씨.”

“네?”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은 나는 모두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태곤이 다시 한 번 또박또박 이름을 되짚어 줬다.

“여주인공이 화영 씨라고. 네 친구 강. 화. 영.”

“강화영이요?”

“몰랐어?”

몰랐다.

해외로 콘서트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강화영은 소속사와의 계약 기간이 만료 직전이라며 한동안 휴식할 거라고 했었는데, 그 사이에 소속사를 이적했다거나 재계약을 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김남규 팀장이 권유했겠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강화영뿐만 아니라, 조연석, 한동하, 채설아 등의 개인 전화번호도 모두 알고 있는 김남규 팀장이었으니.

나는 저쪽 구석에 앉아있는 김남규 팀장을 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김남규 팀장이 오늘따라 왜 저렇게 얄미운 건지.

‘왜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왜 나서서!’

아 참!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형, 그 뮤직비디오 제가 찍으면 안 돼요?”

* * *

블랙 타이거의 신곡, 뮤직비디오 현장.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던 강화영은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스타일리스트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강화영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 그랬을까?”

“네?”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질문에 스타일리스트가 되묻자, 강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마, 블랙타이거 멤버들과 워낙 친하기도 하고, 동혁 씨가 연기 초짜라 걱정이 돼서 대신 출연한 것 같아요.”

“그러기에는 시후 씨가 너무 간절하게 출연을 희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강화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하의 주시후가 돈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찍는다고 했을 리는 없고.

블랙타이거 멤버들이 캐스팅을 부탁하더라도 시간이 없어서 출연 못 할 것 같은 주시후가…… 왜?

스타일리스트의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시후가 애걸복걸 매달리다시피 졸라서 출연하게 된 거라고 하던데. 대체 왜?

순간 강화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 설마?’

- 17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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