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월드 투어 (2)
중국을 시작으로 한 월드 콘서트는 일본, 대만을 거쳐 태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로 이어졌다. 유럽 일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며 이제 이 한 곳만을 남겨 두고 있다.
물론 대미를 장식할 진짜 마지막 장소는 한국이지만.
어쨌든 오늘 이 공연만 끝내고 나면 해외 투어는 끝이 나는 셈이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대형 체육관.
미국 내 최강 농구팀으로 알려진 ‘워싱턴.C’ 사의 홈구장이자 미국에서의 마지막 콘서트 장소이다.
‘흠…….’
대기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나.
‘미국 쪽에는 많네? 여긴 어떠려나?’
희한하게도 3일 전 워싱턴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요신은 둘째치고 흑미화는 코빼기도 못 보았다.
없다면 다행이지만, 사람 있는 곳에 요신이 없을 리가 있나.
그래도 이번 월드 투어 중에 이룬 성과는 아주 상당했다.
‘일본에서 하나, 중국에서 하나. 다른 곳은 없었고……. 뉴욕에서 셋, 시애틀에서 다섯……. 아우! 진짜 끝도 없는 싸움이네.’
콘서트 일정 동안 정화한 요신의 수를 헤아리고 있던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 공연 스케줄을 점검 중이던 김남규 팀장이 내 한숨 소리를 듣고는 태블릿 PC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야? 천하의 주시후가 지금 긴장하는 거야? 그래……. 아무리 공연 경험이 많은 베테랑 가수라고 해도 콘서트는 떨린다고들 하더라.”
그러더니 긴장 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심신 안정에 좋다는 맨손체조를 몸소 시범 보이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며 몸을 푸는 그 모습을 보자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풉!”
“아니, 웃지만 말고 따라서 해 보라니까? 이게 릴렉스에 얼마나 좋다고!”
사실 조금 전에 내쉰 한숨과 콘서트로 인한 긴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김남규 팀장 덕분에 이렇게라도 한번 웃게 되자 잠깐이나마 마주했던 현실, 선인이라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에서부터 해방감이 든다.
건성으로 대충, 그의 체조를 따라 하는 시늉을 하자 김남규 팀장은 이내 다시 소파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때? 좋아졌지? 긴장이 막 풀리지?”
“네. 너무 풀려서 졸리네요.”
“짜식! 그것보라니까.”
김남규 팀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내려두었던 태블릿 PC를 집어 들고 훑어보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잊지 않았지? 오늘 콘서트 끝나고 약속 있는 거.”
“그럼요.”
뮤지컬이 끝나고, 월드 투어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김남규 팀장이 건넨 영화 시나리오 한 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세계 영화시장의 흥행을 겨냥한 블록 버스트는 아니었지만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릴 자신이 있다며 동극 감독이 보내온 시나리오였다.
중국 무협의 거장. 세계적인 액션 영화 감독, 동극.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은 ‘스크린의 붉은 예술가’다.
세계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촬영, 미술, 의상 부문은 물론이고 작품상, 감독상까지 휩쓴 동극 감독의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면 액션 요소는 일부도 들어가 있지 않고 오로지 시각적 영상미에서 영화인들을 사로잡는다.
느릿하면서도 텐션을 높이는 영상의 미학.
이번에 동극 감독이 보내온 영화 장르 역시 그러하다.
오락성보다는 예술성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찍어보겠다는 그의 의지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였다.
예술 작품은 좀…… 지루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처음 시나리오 몇 장을 읽어 넘기던 나.
그런데 삽시간에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전쟁 중 포로로 잡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연민을 갖게 되는 장교.
그것은 점차 사랑으로 바뀌게 되며, 평생 메말랐던 한 군인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단숨에 끝까지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마지막 장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가 탄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동극 감독은 어쩌면 이번 영화로 또 한 번 많은 상을 휩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내가 이런 캐릭터를 맡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군대는 다녀왔지만 전쟁터라니…….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존의 치열함과 살육의 전장.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백 분의 일도 표현하기 힘들 것이었다.
동극 감독과 작품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며 자란 내게는 더 없을 영광이겠지만 욕심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나는, 직접 동극 감독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내 어떤 면모를 보고 이 작품에 캐스팅하려고 하는 건지.
그런데 때마침 동극 감독이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팅 약속을 잡은 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밤이었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감독을 만나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 * *
“감독님!”
2층으로 올라오는 동양인 사내를 보며 나와 김남규 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동극 감독이다.
“오! 시후 씨. 정말 오랜만에 만나네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한쪽 손까지 들어서 인사하는 모양이 누가 보면 아주 친한 사이인 줄 알 것이다.
사실은 오늘 우리의 만남은 겨우 두 번째였는데.
“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안녕했겠어요? 시후 씨가 번번이…… 내가 보내는 시나리오를 걷어찼는데?”
동극 감독은 눈을 살짝 흘겼지만,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농담에 진심을 섞어서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인가보다.
“죄송합니다. 이미 잡힌 스케줄이 있어서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괜찮아요. 만날 사람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게 되어있는 법이니까요. 오늘이 그날이기도 하고요. 일단 주문 먼저 할까요?”
워싱턴 D.C.에 위치한 조용한 BAR.
2층으로 된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술집이다.
아까 입구에서부터 2층으로 올라오며 보니, 1층에는 손님들이 바글거려 자리가 거의 없는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층에는 단 한 명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희한한 광경이었지만, 덕분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기가 그지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금세 알 수 있게 되었지만.
이곳은 동극 감독이 이 지역에 방문할 때 자주 들른다는 술집이다.
훨씬 더 좋은 곳에서 미팅할 수도 있었겠지만, 동극 감독이 굳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낸 이유는 간단했다.
“조용하고 좋죠? 제 단골집이에요. 친한 친구의 가게거든요.”
“아…….”
어쩐지 2층에 손님이 없다 했더니, 통째로 비워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이……. 쩝! 더 말 안 해도 알겠죠?”
오늘 있었던 콘서트의 시작 시각은 저녁 6시.
동극 감독과 미팅을 잡아 놓은 약속 시각은 밤 11시다.
이 시간이면 웬만한 식당은 문을 닫으려는 시간이었으며 그의 말마따나 이 시간에 갈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죄송하게 되었네요. 제가 내일 일찍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할 스케줄이라 오늘밖에 시간이…….”
“아니에요. 나도 이번엔 무리해서라도 꼭 만나고 싶었어요. 대답도 들어야 하니까요.”
“대답보다는 질문을 먼저 드려도 될까요?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와 동극 감독은 처음에는 주거니 받거니 천천히 대화를 나눴다.
술도 한잔 들어갔겠다, 분위기가 점점 화기애애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농담이 오가자, 김남규 팀장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더니 이내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것을 보고 동극 감독은 조금 전보다 편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이었고,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연출되다 보니 우리 둘은 허심탄회하게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영화 시나리오 엄청나게 들어오죠? 아마 「블랙 리앙」이 잘돼서 더 그럴 거예요.”
“네. 다 읽어보지는 못하지만 읽어봐도 다 비슷한 내용이더라고요. 저는 히어로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니까요?”
내가 과장되게 제스처를 취하자 동극 감독이 배를 잡고 웃다가,
“하하하! 그래서 내가 보내준 시나리오는 어땠나요?”
라고 말하며 눈빛을 빛냈다.
‘이 와중에도 참으로 프로페셔널하구나. 그럼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야겠지.’
그리고 내 대답이 이어졌다.
“정말 제가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는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시후 씨의 총 든 모습이 딱! 하고 떠오르던데요?”
“그럼 이 영화 하고 싶어요. 감독님이 얼마나 붉은 전쟁터를 연출하실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 * *“팀장님, 저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먼저 내려가 계세요.”
한참만의 이야기가 끝난 후, 동극 감독은 1층으로 먼저 내려가 BAR의 주인이자 그의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고, 나는 호텔로 돌아가기 전 화장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몇 시간 동안 마시기만 했고, 비우지는 못했으니.
화장실에 들러서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 앞에 선 나는 손을 닦고 물기를 대강 털어버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 문을 열었는데.
“헉! 깜짝이야!”
누군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키가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엄청나게 큰 골격을 가진 사내였다.
나는 정말 매우 놀랐다.
2층에는 손님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과 마주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다가 화들짝 놀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반대로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라. 확 밟고 지나가기 전에.”
다짜고짜 험한 말을 해대는 사내가 너무 어이없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뭘 봐! 이 새끼야! 꺼지라니…….”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점점 눈을 내리깔다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힐끗거렸고 말꼬리를 흐렸다.
반면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내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그리고는 나는 왼손을 들어 손에 끼고 있는 신의 반지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여어! 시간이 남아도나 봐? 말할 시간도 있고?”
사내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흑미화 낙인.
그는 화장실에 넝쿨째 굴러들어온 요신이었다.
“아아악!! 짜증나!! 선인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요신은 갑자기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더니 고함을 지르다가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리와. 그냥 빨리, 이리 와 줄래?”
내 말에 요신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왜? 왜 가야 하는지 설명 좀 해 줄래?”
어떻게든 내 주위를 끌고, 시간을 끌어 도망가겠다는 심보인가 본데,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밑에서 김남규 팀장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설명 따위에 쓸 시간이 없거든?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가자.”
신의 반지에 의지를 불어넣자 사방에서 검은 연기들이 내 몸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요신을 벽 쪽으로 몰아세우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요신의 뒷걸음질이 점점 빨라졌다.
“힘 빼지 말고 이리와. 얌전히 신계로 올라가겠다고 하면 내가 운명의 신 ‘모이라이’님께 너의 선처를 부탁하마.”
나는 요신에게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욕설이었다.
“지랄 쌈 싸고 있네. 선처? 누굴 병신으로 아나?”
“어차피 뛰어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결과는 같아.”
나는 내 몸 주위에 넘실거리며 모여든 검은 기운을 모두 신의 반지에 집중했다.
그리고 요신을 바라보았다.
요신도 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공허한 눈.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고 잠시 그렇게 요신과 대치하고 있던 내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야야야! 안 돼! 안 돼!!”
나는 다급하게 외치며 반지에 모으고 있던 흑기(黑氣)를 요신에서 쏘아 보냈다.
요신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원신의 기를 발산시켜 폭발을 일으키는 중이었고, 이것은 곧 소멸을 뜻했다.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하나 원신을 소멸시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있다.
타의에 의한 것이든, 자의에 의한 것이든 간에.
“어?”
요신의 기에 떠밀려 내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공중에 붕 떴다.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튕겨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행이라면 그 와중에 보니 반지에서 쏟아져 나간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요신을 둘러싸더니 정화를 끝마친 중이다.
그의 원신이 소멸하기 바로 전에…….
요신을 무사히 정화하고 신계로 돌려보낸 기쁨을 누리지도 못한 채, 나는 2층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상황은 또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 16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