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월드 투어(1)
“이 정도면 되겠지? 모자라면 배달 음식 시켜 먹지, 뭐.”
양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으려는 찰나.
삑삑! 삑삑삑! 삑삑!
귀에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오더니 곧이어 현관문이 열렸다.
“우리 왔어!”
현관문 비밀번호를 직접 누르고 들어서는 한동하와 채설아.
한두 번 문을 따고 들어와 본 솜씨가 아니다.
“아주 자연스러우십니다?”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싫다거나 못마땅해서 한 행동은 아니다.
그저 이런 내 행동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장난이다.
내가 없어도 내 집에 지인들이 아지트처럼 들락날락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사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마음 편하게 사담을 나누고 술 한 잔 기울일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써야 하고 말을 아껴야 하는, 등장만으로도 기삿거리가 되어버리는 대한민국의 톱 배우 말이다.
“이거 봐. 진짜 끝내주는 와인 한 병 가지고 왔어.”
내 말에 둘은 역시나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등장할 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박스에서 술병을 꺼내 흔들어 보일 뿐.
“와! 맛있겠다. 화영이랑 연석 오빠는? 아직인가?”
채설아가 테이블에 차려놓은 핑거 푸드를 하나 집어 한동하의 입속에 넣어 주더니 이내 하나 더 집어 들어 본인의 입속에 넣었다.
둘이 교제한 지 1년 6개월쯤 되었나?
여전히 사이가 좋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또 한 번 현관문 쪽에서 낯익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며 조연석과 강화영이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안 늦었지? 어? 다들 와 있었네?”
“어서 와요. 근데 왜 둘이 같이 와?”
채설아의 질문에 강화영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오빠가 집 앞에 데리러 와주셔서 오빠 차 얻어 타고 왔어요.”
“아, 그래?”
채설아도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고 오랜만에 모인 멤버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무심코 조연석과 강화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설마……. 또 비밀 교제?’
당연히 그럴 만한 사이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태워 오고 데려다주는 것이 마땅한 우정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이 상황이 불편했다.
그것도 잠시.
한동하는 가지고 온 와인을 오픈했고 모두의 잔을 채우고 난 뒤 조연석에게 건배사를 제의했다.
“시후의 성공적인 월드 콘서트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한참 동안 서로간의 근황을 묻기도 하고 각자의 작품 이야기에 관해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내 콘서트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럼 어머니도 함께 가시는 거야? 잘됐네!”
채설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짝! 하고 손뼉 쳤다.
반면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네. 그런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걱정?”
걱정거리가 생기게 된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웬만해서는 좀처럼 내게 전화를 걸지 않는 누나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 엄마가 갱년기인지 많이 울적해 하셔. 내가 아무리 옆에서 함께 좋은 음식 먹고, 공연 보러 다니고 쇼핑에 동참한다고 해도 잘나가는 아들만 하겠니? 그러니 너도 이번 콘서트 끝나면 시간 좀 내서 엄마랑 여행 한번 다녀오도록 해. 나는 네 매형이랑 애들 때문에 여행은 꿈도 못 꾸잖아. 엄마 평생에 해외여행은 한 번도 없었던 거 알지?”
누나의 말에 깊이 동감했던 나는 김남규 팀장과 상의 끝에 이번 월드 콘서트에 엄마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콘서트 예정 국가 중에서 비교적 비행시간이 짧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뿐이지만.
해외여행이 처음일 때 무리한 일정보다는 1주일 정도의 기간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외국에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하러 가는 아들에게 둘이나 짐이 되면 쓰겠냐며, 엄마만 잘 모시고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니 또 다른 걱정거리가 발생했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하는 콘서트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리허설과 연습이 필요할 텐데.
그러다가는 엄마에게 호텔과 공연장 구경만 실컷 시켜드리게 될 것이 뻔했다.
처음에는 아버지 없이 안 가겠다고 하시던 엄마가 “비행기만 타도 좋을 것 같아. 해외여행이 별거냐? 갔다 왔다는 것만 해도 자랑거리지.”라고 하시며 여행에 대해 살짝 기대하시는 것 같아 더욱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조연석이 나섰다.
“내가 같이 가서 구경시켜 드리면 되겠네. 내가 또 중국이랑 일본은 많이 다녀 봐서 거의 현지인이잖냐.”
“정말요? 형이 같이 가 주실 수 있어요?”
조연석의 말을 듣자 갑갑했던 속이 한방에 뚫리는 기분이다.
평상시에도 여행을 즐기는 조연석이라면 확실히 엄마의 투어를 맡겨 놓아도 안심이 될 거 같았다.
“그럼! 당연하지! 그럼 호텔이랑 항공권은 네가 쏘나?”
“콜! 진짜 감사해요, 형. 여행 경비도 다 제가 댈게요.”
“감사는 무슨……. 그동안 어머니께 반찬 얻어다 먹은 게 얼만데.”
그랬구나.
내가 없는 동안에도 엄마가 지인들에게 반찬을 해서 나르셨구나.
여행의 대가인 조연석이 선뜻 합류의 뜻을 밝힌 것은 엄마가 그동안 뿌려놓은 ‘정’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뭐? 네가 다 쏜다고? 그럼 우리도 갈까?”
한동하의 발언은 채설아에게 향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음에도 그녀는 앞뒤 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자. 시후가 다 쏜다잖아. 공짜로 여행하고 좋지, 뭐.”
“네?”
놀란 것은 나였다.
엄마의 여행에 동참해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으나 뭔가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자 머릿속에는 수없이 0이 붙은 숫자가 둥둥 떠다녔다.
‘항공권이 얼마더라? 대략 호텔비가 얼마나 나올까?’
내 생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의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그럼 시후가 공연 준비하고 연습하는 동안 우리는 어머니 모시고 구경 다니면 되겠네. 콘서트도 함께 보고.”
“그런데 어머니가 우리를 불편해하시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되기는 해.”
“왜? 그래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어머니랑 함께 식사하는 사이잖아. 불편하긴 왜 불편해?”
다들 내가 없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엄마가 차려 주시는 밥을 먹었나 보다.
나도 잘 못 먹는 엄마의 집밥을. 그것도 내 집에서!
“아무리 그래도 시후랑 다니시는 것보다는 불편하시겠지.”
“그럼, 그전에 더 자주 뵙고 더 친해지면 되지.”
조연석은 그렇다 치고 한동하와 채설아는 정말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그런데…….
“그럼 저도 같이 갈까요?”
이번에는 여태껏 잠자코 있던 강화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지만 조연석과 한동하 그리고 채설아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정말 좋은 생각이라는 표정들이다.
“화영이, 너 요즘 한가보다?”
내 말에 채설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쯧! 몰라도 너무 모르네. CF 여신인 화영이가 한가해서 가겠다고 나서는 거겠니? 어머니께서 화영이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아마 우리가 다 달려들어도 화영이가 모시는 것만큼 편안해하시지는 않으실걸? 너랑 있는 것보다도 편하다고 느끼실걸?”
“아 그래요? 언제 그렇게 가까워졌대?”
“화영이가 어머니께 얼마나 잘하는데. 그러니 안 예뻐하실 수가 있나? 화영이 어떨 때 보면 며느리 같다니까?”
채설아의 말에 나는 강화영을 바라보았다.
“친구 어머니면 내 어머니이기도 하지. 그리고 한가한 거 맞아. 소속사랑 계약 기간이 곧 끝나는데 당분간 일 좀 쉬려고…….”
눈이 마주친 그녀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며 싱긋 웃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인천공항에서 역대급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출국한 나.
세계 각지에서 공연할 콘서트 티켓이 매진행렬을 이으며 큰 이슈가 되었기에 공항에 몰린 기자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았다.
또한, 톱스타들과의 동반 출국이었기에 응원차 배웅 나온 팬들의 수 역시 가늠할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공항을 가득 메운 인파를 뒤로하고 걸으며 내 가수 인생의 첫 번째 콘서트를 스스로 응원했다.
‘잘 해 보자, 주시후. 파이팅이다! 자, 그럼 세계적으로 요신들을 정리하러 가볼까?’
* * *
첫 번째 월드 콘서트 장소는 중국 베이징.
내가 콘서트가 열릴 공연장에서 동선과 사운드를 체크하고 백업 댄서들과 안무를 맞춰보는 동안, 조연석 일당은 엄마를 모시고 베이징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현지인 뺨치게 중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조연석은 과연 안정감 있고 편안하게 투어를 이끌었는지, 저녁에 만난 엄마의 수다는 평상시보다 훨씬 길고 장황하였다.
“아침에 그, 고북 뭐시기…….”
“어머니. ‘고북수진’이요.”
강화영이 엄마 앞에 놓인 접시에 오리고기 몇 점을 덜어놓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어 그래. 고북수진이라는 지역에 가서 만리장성을 봤는데, 우아……. 어쩜 그 뱀같이 긴 성벽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지. 진짜 감동이었어. 아들! 아들도 본 적 있나? 만리장성?”
“당연하지.”
“그럼 그 뭐시기. 무슨 공원이더라?”
“경산공원이에요. 어머니.”
이번에도 강화영이 엄마 손에 냅킨을 건네며 말했다.
“그래. 거기. 아……. 자금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꼭 모형 같았다니까? 거기도 가봤나? 아들?”
“흠……. 거긴 못 가봤어. 울 엄마 연석이 형 덕분에 구경 잘하고 다니네?”
엄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흡사 새색시의 미소처럼 수줍어 보였는데 여태껏 엄마에게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미소였다.
“응. 우리 아들딸들 덕분에 내가 호강하네.”
우리에게 둘러싸여 여왕님처럼 우아하게 식사하는 엄마의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모두에게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이었다.
내 생애 첫 단독 콘서트도 그러했다.
수많은 팬들과 함께 웃고,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그렇게 호흡을 나누다 보니 준비했던 두 시간의 공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나 버렸다.
앙코르를 외치는 팬들 때문에 한 시간을 더 무대에 서야 했지만, 그건 일도 아니었다.
앙코르 무대에서 다섯 시간 동안 노래했다는 가수들도 나오는 판국에 고작 한 시간쯤이야.
계속해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나나 팬들이나 같은 심정이었지만 콘서트 첫날이니 완급조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무대를 내려온 나는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시후 씨, 고생했어요. 단독 콘서트 축하해요.”
대기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해요. 자오린.”
“파트너의 첫 콘서트인데, 당연히 와야죠. 공연 잘 봤어요. 너무 멋있던데요?”
중국 거대 투자사이자 나의 해외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PS China의 자오린.
이번 월드 콘서트도 역시 ‘PS China’의 도움으로 성사될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자오린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콘서트예요. 언제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감사하다면 언젠가 제게 했던 약속을 지켜주실 수 있겠어요?”
“약속이요?”
내가 자오린에게 무슨 약속을 했었던가?
기억 저편을 더듬고 있는 동안 자오린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세 잊으신 건가요? 그 손에 끼고 있는 반지……말이에요.”
“아…….”
내 손에 낀 신의 반지.
그녀는 반지의 기운이 흐르는 것을 눈치챈 단 한 명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 하나 믿고 지금까지 내 뒷배가 되어준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고.
“오늘도 비현실적인 일이라 운운하고 입을 다무실 건가요?”
“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 자오린에게 해 줘야 할 말이 있다면 그때는 진실만을 얘기하도록 하죠. 그날의 약속처럼!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 깨닫는 날이 먼저 올 수도 있어요. 당신은…….”
나는 마지막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재물의 성전의 선인이었던 증조부의 안배를 이어받았고, 현재 재물을 지키는 신이 되어있는 고스트 자오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재물의 성전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어쩌면 재물의 성전의 선인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만일 당신이 선인이 된다면 그때는 알게 되겠죠. 내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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