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161화 신화 (2)
“…… 후우!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그럼 대안은? 혹시 주시후가 이적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나?”
김경민 대표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책임을 묻기보다는 지금은 빨리 수습을 해야 할 시기였다.
김경민 대표의 질문에도 한동안 대표실 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치만 보던 임원진들은 최재우 이사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들을 지었다.
누가 봐도, ‘네가 총대 메고 우리 좀 살려줘’라고 하는 표정들이다.
결국, 이 분위기를 못 견디겠는지, 최재우 이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그동안의 시후의 성정으로 봤을 때, 함께해 온 정이 있기 때문에 아마 쉽게 이적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인데요. 이번에 오디션의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시후가 직접 트레이닝을 했잖습니까? 그런데 생각보다도 훨씬 결과가 좋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실력도 상당히 탄탄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시후를 믿고 따르기에 보이는 과정도 아름다웠고요.”
“흐음……. 그랬나?”
김경민 대표가 오디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최재우 이사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최고 인기를 끌고 있는 서은준이 있잖습니까? 프로그램이 끝나면 서은준은 우리 B&M과 계약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걸 따온 것도 시후입니다.”
“B&M 엔터를 대표해서 나간 자리이니 그 정도 권한은 당연한 거지. 그래서?”
“그래서 제 생각에는 임원직 자리를 맡겨보는 것이 어떤가 싶습니다만…….”
“임원직을?”
김경민 대표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요즘 다른 회사에서도 다들 그렇게 합니다. 회사에 기여도가 높다거나 놓치기 싫은 아티스트들을 잡아 두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죠. 시후랑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박지영씨도 ‘올리 엔터’의 이사직을 맡고 있고 ‘스파크 엔터’나 ‘CSS 뮤직컴퍼니’에서도 소속 연예인에게 이사직을 맡기는 상황이죠.”
“음……. 확실히 요즘 그런 추세이기는 하지.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좋은 본보기도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나?”
“나이는 어리지만 맡겨 볼 만합니다. 워낙 생각이 깊고 처신이 바른 녀석이라. 그렇게 되면 다른 연예인들에게도 회사에 오래 몸담고 기여도가 높아지면 임원직을 맡을 수 있다는 사례가 되겠지요. 그럼 긴 시간 동안 회사와 서로 신뢰를 쌓으며 쉽사리 이적하지도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걸로 되겠어? 시후 그 녀석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전략기획본부팀의 황구진 본부장이 나섰다.
이에 김경민 대표는 어서 말해 보라며 채근하는 눈빛을 보냈다.
“현재 우리 회사의 상장 주식과 유통 주식은…….”
* * *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그것은 한껏 달아올랐던 체온을 금세 식혀버리더니 팔뚝에 닭살을 돋아내는 데 일조했다.
“어우, 춥다!”
탁!
나는 활짝 열려있던 연습실 창문을 닫았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연습을 처음 시작했을 때 선선했던 날씨는 어느덧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며 심한 일교차를 보였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새벽 2시.
“팀장님. 이제 끝났어요. 내려갈게요.”
차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김남규 팀장에게 연습이 끝남을 알리고 연습실 밖으로 나온 나는 복도로 걸어가다 불이 켜져 있는 다른 연습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어, 어?”
벌컥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괜찮아요. 시후 씨. 이제 가는 거예요?”
연습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사내는 ‘지킬’ 역의 언더스터디 고준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비비적거리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퀭한 눈과 그 밑에 완연하게 자리 잡은 다크서클.
올해 나이가 서른셋이라던데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늦은 시간까지 연습한 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이 시간까지 연습 중이셨나 봐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오전에 일찍 집합해야 하잖아요.”
“이제 가려던 참이에요. 슬슬 졸리기도 하고요.”
“그럼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어 그래도 같은 역을 맡은 배우인데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 말에 고준은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네? 왜요?”
얼굴에 뭐가 묻었어도 저렇게 쳐다보지는 않겠다 싶을 정도로 사람 민망하게 뚫어지라 쳐다보던 고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 씨는 참…… 착하네요?”
“네?”
뜬금없는 고준의 말에 눈을 끔벅거렸다.
그동안 말을 섞어본 적도 거의 없는데 내 어떤 면을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아니, 그렇잖아요. 잘생기고 나이도 어린데 인기도 글로벌하고. 보통 그런 연예인들은 대부분 겸손이라는 걸 모르거든요. 그래서 전문 뮤지컬 배우들은 아이돌이 뮤지컬 한다고 하면 엄청 싫어해요. 싸가지가 없…… 아, 미안해요. 시후 씨 얘기는 아닙니다.”
서슴없이 말하던 고준은 ‘싸가지’라는 대목에서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어쨌든 시후 씨는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무척 다르네요. A급 중에서도 톱클래스라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먼 세상 사람 같달까?”
“아닙니다. 저도 똑같은 사람인걸요. 특히 뮤지컬계에서는 한참 선배님이시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세요.”
내 말에 고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뭐가 좋은지 웃음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선배 대접을 받는 것이 기분 좋아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준은 히죽거리며 웃다가 연습실 한쪽에 놓여있던 본인의 가방 쪽으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금세 돌아왔다.
그리고 무언가를 내 앞에 내밀었다.
“그럼, 핸드폰 번호도 알려줄 수 있어?”
“그럼요! 이리 주세요. 번호 찍어 드릴게요.”
고준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휴대폰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저장하더니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저러다가 번호를 외울 기세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입에서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나를 보는 표정이 시베리아 찬바람이 수준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
이윽고 고준은 휴대폰을 다시 가방 안에 집어넣고 다시 내 앞에 섰다.
“고마워요. 성격이 시원시원하네요. 처음에는 당연히 재수 없는 성격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제가요? 왜요?”
내 물음에 고준은 대답하기 민망했는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잘나가고 인기 많으니 당연히 건방질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죠.”
“에이……선배님. 저 그런 놈 아닙니다.”
“알아요. 연습실에 먼저 찾아와주고 넘어져 있는 나한테 손도 내밀어 줬잖아요. 집에 데려다준다며 먼저 말도 걸어주고, 전화번호도 알려 주고! 진짜 그런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나랑 말도 안 섞었겠죠? 어? 이렇게 말하다보니 내가 좀 찌질해지는 느낌인데? 하핫!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 같은 거 가지고 있었나 봐요. 내가 언더스터디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전통 뮤지컬배우로 활동하며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 온 고준은 뮤지컬계의 황태자라 불릴 정도로 이쪽 계통에서는 인정받는 인기배우다.
나만 아니었다면 「지킬 앤 하이드」의 주연이 정말로 그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그가 내 대역배우라니.
“제가 엄청 꼴 보기 싫었겠네요.”
“당연하죠. 괜히 컨디션이 안 좋거나 이유 없이 몸이 쿡쿡 쑤신다거나 한 적 없어요? 내가 엄청 저주했는데? 하하하!”
“어쩐지…… 없던 편두통이 생겼더라니…….”
고준의 장난을 되받아치자 그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처음엔 괜히 미웠는데. 그래도 시후 씨 덕분에 ‘마레나 센터홀’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언더스터디지만 5회 공연도 확정이고. 그래서 기왕 하는 거 진짜 잘 해 보려고요. 내가 언제 ‘마레나 센터홀’에서 공연을 해 보겠어요?”
총 20회로 잡혀있는 「지킬 앤 하이드」 공연.
그중 5회는 고준의 「지킬 앤 하이드」 공연 일정이 확정적으로 잡혀 있다.
내 스케줄로 인한 대타 공연이지만 그는 그것에 만족한다고 했다.
“요즘 시후 씨가 연습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점이 참 많아요. 노래를 정말 잘하는구나. 춤을 정말 잘 추는구나. 특히 대사를 내뱉을 때는 그 감정이 고스란히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는 아…… 괜히 주시후, 주시후 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저도…….”
이번 뮤지컬 공연에 누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고준.
모두 귀가한 텅 빈 연습실에서 이 늦은 새벽까지 연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어진 공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마음이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대화해보고 겪어봐야 아는 것이라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아! 그런데 조금 전에는 안무연습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아뇨. 춤추다가 넘어진 거 아니에요. 그…… 1막 끝 장면 있잖아요.”
고준은 연습하고 있었던 장면을 설명하려는 듯 연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술 취해서 땅바닥에 구르는 장면이요?”
내 말에 땅에 구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고준은 양 손바닥을 부딪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아요. 사실 술이 안 받는 체질이라 취해서 비틀거려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떡실신은 해 봤어도. 시후 씨는 그 연기를 자연스럽게 너무 잘하던데…… 아! 좀 알려줄 수 있어요?”
“음…… 그건요.”
* * *
김남규 팀장이 운전하는 차 안.
“하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피곤한지 연신 하품을 하는 김남규 팀장.
힐끗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나는 괜히 김남규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연습 끝났어요. 지금 내려갈게요.’라고 말해 놓고 고준과 연습 삼매경에 빠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더불어 내 집과 정 반대 방향인 고준의 집에까지 들렀다가 되돌아가는 길이니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하암!! 아우, 졸립다.”
김남규 팀장의 하품이 한 번 더 이어지자 나는 재빨리 말을 꺼냈다.
“제가 운전할까요?”
“네가? 하하하! 아서라. 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그러게, 연습실에 올라오셨으면 가자고 말씀하시지. 왜 밖에 서 계셨어요?”
고준과의 연습을 끝마치고 연습실 문을 여니 문밖에 서 있던 김남규 팀장.
그는 묵묵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복도의 찬 공기가 그의 입술을 퍼렇게 식혀 놓은 것을 보니 아마 1시간은 족히 서 있었던 듯싶었다.
“연습 중인 것 같아서 그냥 기다렸지. 그게 내가 할 일이기도 하고.”
대수롭지도 않게 답하는 김남규 팀장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항상 감사해요.”
그에 김남규 팀장은 멋쩍은 듯이 웃는다.
“감사는 무슨. 아! 맞다. 시후야, 너 뮤지컬 끝날 때 맞춰서 회사랑 계약 종료되는 거 알고 있지?”
“아, 그래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 16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