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160화 신화 (1)
“결정하셨습니까?”
긴장감이 감도는 무대 위.
수많은 조명과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던 한 소년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년은 처음부터 의지가 확고했던 듯 시종일관 같은 표정이었다.
“저는 B&M 엔터테인먼트로 결정하겠습니다.”
소년의 말에 윤종실, 박지영 그리고 하선동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나는 박장대소 하였다.
“그렇지! 장하다, 내 새끼! 이리 와봐. 형이 한번 안아 보게.”
내 말에 소년은 무대 밑으로 뛰어 내려와 심사위원석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두 남자의 격한 포옹을 보던 심사위원 세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둘이 아주 확고한 동맹이구만?”
“그러게……. 은준이는 이제 포기해야 되려나 봐.”
“네. 인제 그만 넘보세요. 어차피 은준이는 프로그램 끝나면 저희 회사에서 한솥밥 먹기로 했습니다.”
이곳은 <나인틴(nineteen) K-POP> 촬영 세트장.
조금 전 생방송에 진출하게 될 ‘TOP 12’의 최종 선발이 끝이 났다.
시청자의 득표 수와 더불어 심사위원들에게도 무척 높은 점수를 받은 참가자는 순서상 마지막에 그 이름이 불린다. 바로 그가 서은준이었다.
심사위원 전원은 서은준의 트레이닝을 자처했으며 서로 데려가겠다고 야단법석을 피웠는데, 중복 선택을 받으면 반대로 참가자가 원하는 소속사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서은준의 선택은 B&M 엔터테인먼트였다.
프로그램의 본선 진출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시후 씨,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심사위원 하선동은 내가 만난 이래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서은준의 변화가 눈에 띄게 아주 이례적이기는 한가 보다.
“하하하! 그러게 처음부터 선택을 잘하셨어야죠.”
대체로 이렇게 웃어넘기면 그러려니 했던 심사위원들이 이번에는 달랐다.
“아니, 습관이라는 게 왜 무서운 건데? 한번 몸에 배면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무섭다고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은준이 봐봐. 어떻게 하루아침에 싹 뜯어고칠 수가 있냐고?”
“내 말이요! 땅만 쳐다보던 얘가 시선 처리가 달라지니까 춤추는데 라인이 얼마나 예쁘던지, 매번 깜짝 놀란다니까요? 기본기는 좀 있다고 생각한 게 다였는데, 춤을 저렇게까지 잘 추는 애였나?”
“그치? 표정에도 여유가 넘치더라?”
그랬다.
서은준은 미션 때마다 부쩍 실력이 늘었는데 그중 크게 변한 부분이 바로 표정 관리였다.
무대 위에서 바닥만 내려다보던 서은준은 이제는 카메라, 심사위원들과 아이 콘택트를 하며 무대를 즐기는 여유를 보여 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의 숨겨져 있던 매력이 잘 발산되었으며, 당장 데뷔시킨다고 해도 활동하고 아이돌과 비교해 전혀 뒤처지지 않을 실력이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서은준을 보아온 시청자들의 최대 관심 참가자로 등극한 것은 당연했고 더불어 시청자 투표 1위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되니…….
윤종실이 걱정했던 서은준의 특이한 음색 또한 발목을 잡는 단점이 아니라 녀석의 존재를 부각할 수 있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심사위원들이 녀석을 탐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
“본선 1차 때부터 너한테 트레이닝 받았던 얘들 중에서도 TOP 12에 7명 올라갔지? 트레이닝도 다 일대일로 한다며? 네가 그럴 시간이 돼?”
“저, 방송은 이거 하나 하고 있어서 시간 많아요. 완전 많아요.”
“야! 많이 봐 준다고 실력이 확 늘었다는 게 말이 되냐? 말해 봐. 비법이 뭔지.”
윤종실은 서은준의 실력 향상에 유독 관심을 보였다.
현역 가수이자 작곡가이지만 미스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기도 한 윤종실.
그는 소속사 가수들을 직접 트레이닝 하고 프로듀싱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렇기에 더욱 비법이 궁금한가 보다.
그렇다고 박지영이나 하선동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3대 기획사에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올리 엔터테인먼트.
이곳의 이사직을 맡은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뽑은 3명의 참가자가 TOP 8에 들 수 있도록 계속해서 트레이닝 시켜야 했고, 특히 대학 교수이기도 한 하선동은 ‘그 비법’을 상당히 궁금해 하는 눈치다.
눈을 말똥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는 그런 심사위원들을 보자니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처음 서은준을 데려간다고 했을 때,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을 맡은 것이 처음이라서 그런지 패기가 좋다’며 잘해 보라고 어깨를 토닥이던 그들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서다.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다 보니 방법이 보이더라고요.”
“야! 누가 들으면 나는 가식으로 가르치는지 알겠다!”
윤종실이 입술을 삐죽이며 째려보았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 * *
“그럼 곧 수술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그러라고 수술비를 내준 거니까.”
“진짜 다행이네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 나오기 시작한 안도감이 온몸을 잠식하자, 그제야 나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렇게 좋아?”
나도 모르게 히죽 웃고 있었는지 김남규 팀장은 그런 내 표정을 들여다보며 옆에 걸터앉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정말 좋은 일 한 거야. 은준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봤다면 너도 녀석이랑 같이 펑펑 울었을지도 몰라.”
“은준이 울었어요? 아, 안 되는데? 울면 목 잠기는데……. 내일모레 생방 있단 말이에요.”
“아이고! 진짜로 선생님 다 됐네!”
오늘 김남규 팀장은 나를 대신에서 서은준의 동생인 서동준의 수술비를 쾌척하고 온 터다.
스케줄 때문에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녀석이 좋아할 모습을 생각하니 뿌듯함과 함께 뭔지 모를 감정이 가슴속에 벅차올랐다.
이래서 다들 기증을 하나 싶기도 하고.
“아! 맞다! 회사에서 오늘 너…….”
“네?”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김남규 팀장의 말에 고개를 돌렸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 아니야. 이따가 스케줄 끝나면 말해줄게. 오전에 대본 리딩만 했지? 어땠어? 잘했어?”
“잘해야죠. 경쟁자가 뒤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데…….”
“경쟁자? 아……. 고준?”
오늘은 내년 2월로 공연 일정이 잡힌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첫 연습이 있는 날이다.
뮤지컬은 주연배우를 더블 캐스팅하거나 언더스터디(understudy)를 준비하는데 여느 뮤지컬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그러했다.
배우가 갑자기 바뀌어야 할 상황이 생기거나 주연배우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대비하여 같은 배역을 연습하여 대기하는 사람이 바로 언더스터디이다.
「지킬 앤 하이드」 6차 공연 때 나의 언더스터디는 고준이라는 배우가 맡았다.
고준은 뮤지컬의 연출을 맡은 박정엽 감독이 적극적으로 추천했던 배우이자 뮤지컬계의 황태자라는 별칭을 지닌 베테랑이다.
중국 거대 투자사인 PS China의 한국 지부 ‘PS 미디어플랫폼’에서 제공하기로 한 공연장은 마레나 센터홀.
여태껏 「지킬 앤 하이드」가 1차부터 5차까지 공연을 해 왔던 ‘시어터 마레나’와 비교해 3배나 더 큰 규모인 공연장이다.
‘마레나 센터홀’은 그동안 정통 오페라와 같은 격조 높은 공연만을 허락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뮤지컬 공연을 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것을 ‘PS 미디어플랫폼’에서 제공한다고 했고, 그 조건은 단 하나.
내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을 때라고 했기 때문에 박정엽 감독을 비롯한 「지킬 앤 하이드」의 제작진은 나를 ‘지킬’ 역에 캐스팅하면서부터는 더블 캐스팅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인공이 두 명, 세 명이면 뭐합니까? 어차피 시후 씨 공연에 몽땅 몰릴 게 뻔한데……. 그냥 한 명으로 갑시다.”
영화 「블랙 리앙」도 1000만 관객을 훌쩍 넘기며 상영을 종료했고 더불어 빌보드 차트에 올라가 있는 내 노래 덕분에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이 상황에 하물며 한국에서의 인기는 어떻겠는가 이런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더스터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언더스터디는 주연뿐 아니라 다른 배역에도 필수사항이었다. 이미 박정엽 감독이 고준에게 넌지시 ‘지킬’ 역의 내정을 알렸던 사정도 있었기에 뮤지컬계의 황태자가 나의 언더스터디가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보다 훨씬 뮤지컬 경험도 많고 연기경력도 긴 배우가, 그것도 뮤지컬계에서 연기와 끝내주는 무대 매너로 인정받고 있는 배우가 ‘지킬’ 역의 언더스터디를 맡으니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나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6차 공연의 주인공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배우였으므로 더더욱 그랬다.
“하하하!! 왜? 뒤에서 막 째려봐?”
“에이, 농담이죠. 설마 째려봤겠어요? 그냥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 말이죠.”
뒤통수를 쓸어내리는 나를 보며 김남규 팀장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력으로 다 눌러버려! 여태껏 그래왔듯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실력 발휘 제대로 해 보려고요.”
데뷔한 이래로 너무 빨리 인기를 얻어서인지 뭐만 시작하면 항상 주위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아왔던 나다.
이제는 누군가가 나를 견제하고 미워해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고준이 내게 그런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실력으로 눌러 줘야 할 것이었다.
* * *
그 시각, B&M 엔터테인먼트 10층의 대표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경민 대표는 양쪽으로 앉은 네 명의 임원진들을 쭉 훑어보고 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잡혀있는 것이 뭔가가 못마땅한 얼굴이다.
이에 임원진들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쩌겠다고?!”
김경민 대표의 언성이 높아지자 가수 매니지먼트 본부의 임준석 총괄실장은 화들짝 놀라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던 김경민 대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김경민 대표는 홱! 하고 임준석 실장을 쏘아봤고, 임준석 실장은 애꿎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네들이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특히 임 실장! 주시후가 그쪽 소속이면 자네가 수장답게 더 신경을 썼어야지. 뭐? 4개월 남았습니다? 그게 할 말이야? 미리미리 체크해 뒀어야지, 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이미 올리 엔터랑 스파크에서도 데려가겠다고 벼르던 모양이던데!”
연기자 매니지먼트 본부의 배우성 총괄실장과 임준석 실장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전략기획본부의 황구진 본부장은 눈알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주시후 때문이다.
처음 김남규 팀장이 주시후를 길거리 캐스팅해 왔고, B&M 엔터테인먼트에서 오디션을 보고 작성했던 계약서는 3년짜리.
계약이 만료되자 B&M 엔터테인먼트는 1년 6개월을 연장하여 주시후와 계약을 맺었다.
주시후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B&M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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