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화 좋은 일 한번 한다치고 (3)
나보다 더 깜짝 놀란 듯 요신은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그러더니 이마에 검은색으로 각인돼 있는 낙인을 손바닥으로 잽싸게 가리며 말했다.
“네? 사람을 잘못 본 거 같은…….”
“놀고 있네. 네 눈에는 이 기운이 안 보인단 말이냐?”
나는 피식 웃으며 요신의 말꼬리를 잘랐다.
순식간에 물밀 듯이 몰려와 내 몸 주위에서 떠도는 검은 연기.
나는 이것을 힐끗 내려다보고서는 요신에게 물었다.
“도망갈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도망갈 생각도 못 할 만큼 얼어 버린 거야?”
보통 요신들은 선인의 반지를 마주하게 되면 일단 냅다 달리거나, 틈만 보이면 꽁지가 빠지라 도망가기 일쑤인데, 눈앞의 요신은 왜인지 쭈뼛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게 도망을 할지 말지 내적 갈등 중인가 보다.
“오호? 대단해? 도망을 안 가겠다는 거지?”
나는 망설임 없이 신의 반지에 검은 기운을 담기 시작했다.
내 몸 주위에 떠돌던 검은 기운이 몽글몽글하게 서로 엉겨 붙더니 엑스트라 링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그런데.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를 지켜보던 요신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뭐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주춤하며 망설이다가 반지의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엑스트라 링으로 채 스며들지 못한 검은 기운들이 다시 내 몸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말해 봐. 빠르고 짧게!”
물론, 요신이 시간을 끌어보려고 나를 멈춰 세운 것이 분명했으니 오래 끌 필요도 없었다.
김남규 팀장이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그래도 신계로 끌려가기 전에 꼭 할 말이 있다니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일종의 최후 변론 같은.
“저의 죄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신계에서 부여한 이 흑미화의 낙인은 제가 지하세계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든다고 하여 하데스 님께서 분노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지요.”
“네 죄를 잘 알고 있네? 그럼 이제 하데스 님께 가서 죄를 청하면 되겠구나.”
“아직!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요신을 향해 턱짓했다.
더 말해보라는 제스처였다.
요신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술을 곱씹었다.
“저는…… 본래 죽음을 관장하시는 하데스(Hades) 님의 사자였습니다.”
요신의 이름은 ‘데테르’.
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거나 형벌 집행을 관장하는 지하 세계의 신이자 하데스의 사자였다.
그녀는 성정이 여려서 간혹, 망자의 딱한 사정을 봐주곤 했었는데 어느 날 하데스의 분노를 부를 만한 일이 터져 버렸다.
망자 하나를 지하 세계로 인도하지 않고 인간계에 머물도록 눈감아 주었다가 하데스에게 걸린 것이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잡혔다가는 하데스 님이 제 영혼을 지하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리셨을 테니까요.”
하데스의 존재를 생각만 해도 두려운 건지 데테르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네 사정은 알겠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렇게 선인을 만난 이상 제가 하데스 님께 끌려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리고 지하세계에 가면 그동안 인간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제 죗값은 꼭 치를 거고요. 그전에! 꼭 보여 드릴 것이 있어요.”
“보여 줄 거?”
내 질문에 데테르는 입을 꾹 다물고 대신 나를 이끌었다.
“여기?”
그녀는 앞서 몇 발자국 걷다가 한 병실 앞에서 발길을 멈췄는데 문에 적혀있는 병실의 호수가 803호실이다.
나는 문밖에 서서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쥐 죽은 듯이 적막한 소아병동.
아이들 대부분은 단잠에 빠져있었는데, 그중 한 남자아이가 누워있는 침상 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이 창백하고 퀭한 것이 병석에 누워있었던 기간이 무척 오래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아이를 바라보며 말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중년여성.
“망자로구나……. 아이 엄마인가?”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미가 아니라면 저렇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짓고 있지도 않을 테니.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서서 망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귀신이었지만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거리낌은 없었다.
오히려 아이의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저, 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다 알고 오신 신계의 선인이시니.”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데테르의 말에 아이의 엄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던 그때.
누워있던 남자아이가 내 인기척에 잠에서 깬 것인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어……. 어? 주시후다!”
아이는 동글동글한 눈을 끔벅거리며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을 얼굴을 가지고 오더니 신기한 듯 이리저리 뜯어 봤다.
“진짜? 진짜 주시후 맞아요?”
“꼬맹아. 내가 주시후는 맞는데, 그래도 형이라고 불러야지. 내가 네 친구냐?”
“우아! 연예인 처음 봐요!”
어린아이가 나를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볼까지 꼬집을 건 아니잖아?
내 생각이야 어떻든 아이는 작은 손으로 계속해서 내 볼을 꼬집고 흔들었다.
아이의 한껏 상기된 얼굴에 들뜬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반대로 춤이라도 출 기세로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옆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동준아! 서동준! 엄마가 그렇게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지? 심장에 무리 간단 말이야.”
물론 아이에게는 안 들릴 말이다. 망자의 말이었으니.
요신 데테르도 아까부터 아이의 엄마 옆에 나란히 서 있었지만, 그 모습을 감춘 것인지 아이는 그녀들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나는 망자의 말에 그제야 환자의 이름표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서은준? 서동준? 네가 은준이 동생이구나? 그러고 보니 형제가 많이 닮았네?”
“어? 우리 형 알아요?”
“알다마다. 그것도 아주 잘 알지?”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는 그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형이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거 알아?”
“네! 우리 형아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진짜 잘 춰요! 그래서 TV에 나간다고 했어요.”
“그래, 맞아. 그래서 나는 형이 노래도 더 잘 부르고 춤도 더 잘 출 수 있도록 가르쳐 주게 되었어. 내가 형의 선생님이란다.”
“진짜요?”
신나서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진 아이.
그런데 점점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근데 우리 아빠는 형아가 노래하는 거 싫어해요. 그 시간에 알바를 하는 게 아빠를 도와주는 거랬어요.”
“그랬어? 넌 알바가 뭔지 알아?”
“에이……. 너무 어린애로 보시네요.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돈 버는 거잖아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이의 병원비를 내는 것도 버겁다고 하더니, 그래서인지 고작 8살의 아이는 철이 일찍 들어버렸나 보다.
아이의 말에 눈물을 훔치고 있던 망자의 흐느낌은 점점 커져 갔다.
“흑흑!! 내가 살아 있어야 했는데……. 흑흑!! 살림에 보탬도 못되고……. 흑흑!! 이 어린 것을 남겨두고 제가 어찌 멀리 길을 떠난단 말입니까? 흑흑!!”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울거나, 말하거나.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망자는 째려보는 나.
아이와 대화 중이었는데 자꾸 끼어드니 정신 사나워서였다.
“그래. 제법 어른 같구나? 네 형은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알바 하는 것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거니까,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하렴.”
내 말에 아이는 배시시 웃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어색해 보였다.
어려서부터 오랜 병원 생활을 해 와서 그런 걸까?
마치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같은 어색함이었다.
“주시후 형! 그럼 저도 안 아파지면 돈 많이 벌 수 있어요? 제 꿈도 가수예요!”
조그마한 아이의 꿈이 가수라는 말에 기특하기도 하고, 심장병을 앓고 있어 언제 위급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아이가 안쓰럽기도 해서 나는 아이의 머리통을 쓱쓱 어루만졌다.
“왜 가수가 하고 싶은데?”
“어……울 형아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주시후 형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만날 주시후 형 노래만 들어요. 아, 근데 형 노래를 들으면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세게 뛰어요. 그리고 그 기분이 너무 좋아요!”
심장병이라면서 세게 쿵쾅거리면 위험한 게 아닐까?
내가 걱정을 하든 말든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어요!”
자세하고 확실한 꿈을 가지고 있는 아이의 말에 이번에는 내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나는 저 나이 때 뭘 했었지?
초등학교 1학년. 그때 내게 꿈이 있었던가?
부모님이 우스개처럼 말씀하셨던 대통령?
그에 비해 눈앞의 이 아이는 참으로 대단하고 대견스러웠다.
“너, 노래는 좀 하냐?”
“동준이 노래 드럽게 못해요, 선생님.”
대답은 병실 밖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은준이 김남규 팀장과 함께 서 있다.
나는 어떻게 된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고 김남규 팀장은 양손 가득 든 음료수 상자를 번쩍 들어 보였다.
“이거 사서 오다가 만났어.”
“잘됐네요. 그럼 저 잠시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나는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가며 한쪽에 서 있던 요신 데테르와 아이의 엄마에게 따라 나오라고 눈짓했다.
원래는 김남규 팀장이 돌아오기 전에 요신을 정화해서 신계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문제는 해결해야만 했다.
잠시 후, 나는 비상구 계단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나란히 서 있는 요신과 망자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사정 딱한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계의 질서를 어길 수는 없어!”
“그렇지만!”
아이의 어미는 애처롭고 절실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지만 나는 말허리를 자르고 데테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망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나를 지켜보는 신계에서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 것이다. 지하 세계에서도 곧 알게 되겠지. 아이의 어미를 지하 세계로 보내지 않는다면 하데스 님이 지금 당장 아이의 목숨을 대신 거둬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안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떠나겠으니 저희 아이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망자의 애절함이 곧 서러움 가득한 흐느낌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은준이 어머니. 저를 믿고 아이들은 제게 맡기세요. 떠나셔야 모두가 무탈할 겁니다.”
아이의 엄마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고 요신은 곧 망자를 지하세계에 보낼 준비에 들어갔다.
“하데스 님의 명을 받들어 망자를 공허로 돌려보내니…….”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빛이 캄캄한 비상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테르의 주문 같은 말이 끝나는 순간 번쩍! 하고 섬광이 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팟!
빛무리가 사라진 걸까?
조금 눈이 편안해지는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떠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상구는 조금 전의 어두컴컴했던 모습 그대로다.
다만 달라진 것은 망자가 눈앞에 없다는 것.
설명해 주지 않아도 망자가 지하 세계로 보내졌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신 데테르 또한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섬광이 이곳을 덮칠 때 잽싸게 도망간 모양이다.
“데테르!!”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요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뿐.
사실 정말 잡을 생각이었다면 천상경을 지켜보고 있을 새벽의 여신 에오스에게 당장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이렇게 한번은 나도 요신의 사정을 봐주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해코지하는 요신은 아니었으니.
“참나! 그새 도망을 가? 다음번에 만나면 가만 안 둬!”
짜증을 토하는 내 말투와는 달리 비상구 문을 열고 병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내 입가에는 미소가 돌았다.
- 16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