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난리가 났다 (1)
“시후야, 휴대폰 전원 꺼야지?”
“아, 네. 메시지가 와서 잠깐 보느라고요.”
나는 급하게 휴대폰 전원을 껐다.
내 뒤에 있던 김남규 팀장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누구한테 온 SNS 메시지인지, 무슨 내용이 궁금해 하며 내 휴대폰 화면을 봤기 때문이다.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SNS 메시지를 보낸 발신자는 ‘그레이스 류’.
그리고 메시지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영화 <블랙 리앙>에 함께 출연했던 홍콩 국적의 여배우다.
워낙 말수가 적은 데다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영화 촬영 동안 나와 그나마 가깝게 지냈다.
그렇다고 대화를 나눠 본 적이 많지는 않다.
연기 이야기나, 가벼운 고민 상담 정도?
그나저나 내가 촬영 때문에 독일에 간다는 사실은 어찌 알았을까?
뭐, 기사가 났다면 알 수도 있는 일이었겠지만.
그런데 그레이스 류가 왜 메시지를 보낸 걸까?
그동안 단 한 번도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적은 없었는데…….
나는 그녀가 작성한 메시지의 마지막 문장을 생각했다.
‘I miss you’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버렸다.
‘I love you’는 아니더라도 ‘I like you’ 정도는 돼야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하고 고민해 볼 만하지, ‘I miss you’ 그게 뭐 대단한 말도 아니고.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도 ‘보고 싶었어!’라는 말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때는 몰랐다.
그 말뜻의 진짜 의미를…….
어쨌든 그레이스 류의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전원을 끈 휴대폰을 가방 안쪽에 대강 쑤셔 넣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곧 이륙한 비행기는 장장 1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 * *
“그러니까 활동을 더 열심히 해야죠. 집도 사고 차도 사려면…….”
한쪽에서는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와 위탁 수화물을 찾는 동안 출연 가수들은 한쪽 구석에서 사담을 나누고 있다.
‘테스티모’의 멤버인 ‘문리’는 조금 전 자신이 거주하는 숙소에 대한 불만 사항을 늘어놓았다.
누구는 하루에 옷을 다섯 번씩 바꿔 입는데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모른다는 둥, 누구는 잘 때 코를 골아서 잠을 방해한다는 둥. 누구는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면 1시간 동안 안 나온다는 둥.
지금의 멤버와 마음도 잘 맞고 개개인의 성격들도 너무나 좋지만, 함께 먹고 자는 것은 불편하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를 비롯하여 박윤지 그리고 김건무까지 모두 독립을 하여 혼자 산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 문리야. 열심히 해. 파이팅.”
나는 숙소 생활을 해본 적은 없지만, 군대에서 공동생활한 경험이 있기에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김건무는 내 말을 듣고 팔짱을 턱 끼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후야, 정말 영혼 없이 말한다.”
“네? 진심으로 응원해준 건데요?”
“아……. 그랬어? 나는 나무토막이 말하는 줄 알았네?”
“저는 말로 응원이라도 했는데, 형은 뭐 보태 주셨어요? 그럼 형이 사주시던가요?”
“나 참! 아니, 집이 뭐 대수야? 얼마면 돼? 한 5천이면 되냐?”
“와……. 이, 형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시네.”
내가 혀를 내두르며 반응하고 있는데, 잠자코 웃고 있던 박윤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빠, 병원 가시게요?”
“응? 나? 병원엔 갑자기 왜?”
“아니, 신장 팔러 가시냐고요. 오빠 지갑에 5천 원도 없으시잖아요?”
“야! 그거야 내가 카드만 쓰니까…….”
박윤지가 김건무를 놀리는 것을 보고는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사이.
담당 PD가 짐을 다 챙겼다며 이동하자고 말했다.
“꺄아아!”
“시후 오빠!!”
“주시후 씨, 소인 방송에서 나왔습니다. 독일에 계신 한국 팬들에게 한마디 해 줄 수 있습니까?”
공항 밖으로 이동하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다가왔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팬들은 저마다 손에 피켓을 들고 우리 일행을 격하게 반겼다.
그리고 <블랙 리앙> 영화의 팬들인 걸까?
<블랙 리앙>의 포스터를 들이밀며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꽤 몰려들었다.
그리고 몇 명의 취재진도 눈에 띄었다.
나는 몇몇 분께 사인해 주다가 ‘소인 방송’이라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독일에서 한국 방송국의 여러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방송사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생겼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경호원들의 제지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서 손을 흔들고 있는 방송국 취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타지에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마이크 이리 주세요.”
내 말에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내 핀 마이크를 건네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카메라를 향해 섰다.
“안녕하세요? 주시후입니다. 이번에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사실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많은 분이 나와 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뜻밖의 환대에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팬 여러분들의 관심과 응원에 힘입어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곧 방송될 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말을 마친 나는 마이크를 리포터에게 건네주며 살짝 물었다.
“도 소인 방송에 편성될까요?”
“당연하죠! 주시후 씨가 나오는데, 당연합니다!”
“그럼 저도 열심히 촬영할 테니 잘 부탁드려요.”
내 인터뷰가 끝나고 김건무와 박윤지, 문리까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야 우리 일행은 공항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나는 오늘 다시 봤어. 원래 알고는 있었지만……. 명색이 국민 가수라는 말을 듣는데 내가 말이야. 이렇게 병풍 취급인 거도 진짜 처음 겪는 일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냐?”
“그러게요. 시후 인기가 세계적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네요.”
조금 전 프랑크푸르트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뢰머 광장’ 근처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 김건무와 박윤지가 하는 말이었다.
“그게 뭐, 저 때문이겠어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분의 국민 가수님들 덕분에 제가 덩달아 환대를 받은 거죠.”
“이 자식이! 너는 말을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냐? 내가 그러니 어떻게 너를 안 좋아할 수가 있겠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수도는 아니지만, 독일의 아름다운 소도시끼리 이어 주는 교통의 요충지다.
그중에서도 우리 일행은 구시가지 중앙에 있는 ‘뢰머 광장’ 인근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일은 좀 빠듯하겠네요.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아! 연습도 해야 하잖아요.”
“내일 가는 곳이 ‘뷔르츠부르크’였지? 그리 먼 곳은 아니니까 저녁에 합주하면서 맞추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곡은 미리 정해 놨으면 좋겠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박윤지의 질문에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출연자 4명이 모두 가수인 데다가 김건무와 박윤지는 오랜 가수 경력에 비례하는 음악 상식을 가지고 있었고 아는 노래도 많은 덕분에 곡 선택의 폭이 넓었다.
“팝도 좋지만, 일단 내 노래, 하나 하자.”
다들 고민에 빠져 의견을 내놓지 않자 김건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문리가 알은척했다.
“아, 그거요? 오빠 6집 수록곡! 「겨울이 오게 오면」?”
“야야! 그거 말고!”
“왜요? 나도 그 노래 너무 좋아하는데…….”
박윤지는 생각을 말하자 김건무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나, 시후 때문에 그 곡에 트라우마 생겼잖아.”
내가 신인이었을 때 <환상의 듀오>라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건무와 함께 무대를 꾸민 적이 있었는데 결승전 곡이 바로 「겨울이 오게 되면」이라는 곡이었다.
“그때 건무 형은 넋 나간 사람처럼 무대 위에 멍하니 서서, 노래는 한 소절도 부르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얀마! 시끄러워! 하여간 그 곡은 안 해!”
내 말에 김건무는 인상 팍 썼는데 가뜩이나 까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더 까맣게 보였다.
“그거 말고 네가 작곡해준 거 있잖아.”
“아…… 「사계」요? 그게 어떻게 제가 작곡한 거예요? 형이 하신 거죠.”
“그래도 네가 플루트 삽입하자는 아이디어도 냈고, 직접 연주도 해줬잖아. 덕분에 곡 분위기가 확! 달라졌는데? 그래! 그럼 네가 편곡한 거로 하던가?”
“나 참, 수익금은 한 푼도 안 주셨으면서 편곡자가 저라고요?”
나는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김건무가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그 곡은 한번 했으면 좋겠어. 시후 버전의 「사계」를 꼭 들어보고 싶거든.”
“그럼 시후가 노래를 하고, 오빠가 피아노 치시면 되겠네요.”
박윤지가 의견을 보태자 김건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2절은 윤지랑 문리가 함께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그 노래 알아?”
“당연하죠! 그럼 윤지 언니가 2절에서 메인을 맡으시고, 제가 화음을 넣는 건 어떨까요? 제가 랩을 맡고는 있지만, 저 노래도 꽤 잘해요!”
문리까지 나서자 김건무의 앨범 수록곡 「사계」는 합주곡에 포함하기로 했다.
그 외에 거론된 곡들은 대부분 팝이었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세계적으로 유명한 팝 몇 곡을 합주곡으로 선정하고 우리의 저녁 식사는 끝났다.
그리고.
“오오?”
“와! 너무 예뻐요!”
“한 폭의 그림 같네? 진짜 아름답다.”
오랜 역사를 지닌 관광 명소, ‘뢰머 광장’
우리는 뢰머 광장의 야경을 구경하러 들른 참이다.
광장 가운데 위치한 정의의 분수. 그리고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아’ 동상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세워진 건물들을 보며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광장은 전체적으로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는데, 밝게 빛을 내는 가로등과 불을 켜놓은 건물들의 조화가 잘 어우러져서인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닥에 일렁이는 빛과 실루엣까지 더해지니…….
“와! 이런 곳은 애인이랑 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랬다.
김건무의 말처럼 낭만과 추억을 쌓기에는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박윤지도 이 아름다운 광경에 흠뻑 취했던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노래 너무 좋다! 제목이 뭐였더라? 들어본 노랜데?”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의 「Beautiful Night」예요. 그냥 생각이 나서…….”
박윤지는 멋쩍은지 샐쭉하게 웃었다.
그런데 문리는 이것이 문화 충격이었나 보다.
무지하게 놀란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박윤지를 응시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 물개 박수를 쳤다.
“진짜 대단하세요! 저는 말로만 프리덤(freedom)을 외쳤지, 사실은 아니었네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대에서만 노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문리야, 여기 너무 아름답지 않니? 불빛과 가로등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이 바닥도 말이야. 언니 눈에는 그 어느 무대의 조명보다도 완벽해 보이는데? 너는 가수고, 네가 서 있는 곳이 곧 무대야. 노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제일 듣기 좋지.”
박윤지의 말을 경청하며 문리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표정에는 존경과 신뢰가 가득했다.
“언니 노래를 들으니 저도 막 노래가 하고 싶어져요. 한 곡 불러도 될까요?”
우리가 대답하기 전에 문리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잽싸게 음악을 재생했다.
그리고는 MR에 맞춰 랩을 시작했다.
광장을 무대로, 가로등을 조명 삼아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랩을 하는 문리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래퍼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