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151화 괜히 그러는 게 아니지 (2)
“싸이코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건 안 해 보셨죠? 가능하시겠어요?”
연출을 맡은 박정엽 감독.
그는 만나자마자 정식으로 인사도 건네기 전에 내게 물어왔다.
“싸이코 연기요? 지금 보여 드리면 됩니까?”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활짝 웃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오디션도 불사하겠다고 했던 건 나였으니.
“아, 미안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네요.”
지금 당장 연기를 보여 달라는 식으로 말하던 박정엽 감독은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저희 공연의 다른 감독님들은 주시후 씨를 다음 공연의 주연으로 낙점한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지금도 조금 망설여져서 만나자고 한 거고요. 제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제 주위에서 주시후 씨가 연기나 노래, 춤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며 칭찬이 자자합니다. 하지만 뮤지컬은 조금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에요. 관객과 호흡을 맞추며 공연 내내 그들의 감정 템포를 쥐락펴락하기란 웬만한 뮤지컬 베테랑 배우도 버거운 일이거든요.”
나는 박정엽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수긍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뮤지컬을 꼭 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거든요. 관객과의 소통, 그리고 내 감정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메리트 때문에 이 뮤지컬이 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주시후 씨는 뮤지컬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저로서는 모험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주시후 씨가 주연을 맡는다면 세계적으로 매우 큰 관심을 끌고, 흥행은 대성공을 이루겠지만, 제게는 상업성만큼이나 작품의 완성도가 중요하거든요. 이런 제 마음을 좀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나를 쓴다는 건지, 안 쓰겠다는 건지.
듣다 보니 내용이 모호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연기를 해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나았다.
박정엽 감독은 살살 돌려가며 말해서 내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내 옆에 앉아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최재우 이사 역시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졌는데 박정엽 감독의 말이 끝나자 표정이 영 좋지 않다.
결국, 최재우 이사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우리 시후가 ‘지킬’ 배역을 맡으면 인기가 높아서 관객이 많이 들어올 테니 돈벌이는 되겠지만, 작품 수준은 떨어진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아니, 제 말뜻은 그런 건 아니고…….”
박정엽 감독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꺼냈지만, 최재우 이사는 짜증이 난다는 듯 그 말을 끊었다.
“시후가 이 뮤지컬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저희 측에서 격하게 반대했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온 제의도 거절하고 한국에서 꼭 하고 싶어 한 뮤지컬입니다. 어쩌겠습니까? 하고 싶다는 거를 도와주는 게 회사가 할 일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감독님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걸고 연출하시니 신중하신 것은 맞지요. 하지만 그런 말보다는 그전에 우리 시후에게 기회를 한번 주셨으면 합니다. 정식으로 오디션을 보셔도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최재우 이사가 말을 마치자 나는 그러자고 동의의 말을 꺼냈다.
내 능력이 의심스럽다면 보여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L.아트퍼포먼스 강수찬 대표는 오디션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오디션은 무슨! 시후 씨에게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가는 저희가 욕먹습니다.”
“아니요. 감독님께서 결정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뭐라도 보여 드릴게요.”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닫았다.
뭐라도 해본다는 말에, 무엇을 보여 주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박정엽 감독, 강수찬 대표, 그리고 최재우 이사를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나를 박정엽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빤히 쳐다봤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신계 5품, 공포의 신 ‘카이잘(Caizal)’을 소환했다.
눈빛과 목소리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들게 했다는 카이잘의 기운을 서서히 내 몸 주위로 뿜었다.
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것은 공포의 신 카이잘의 의지.
카이잘은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박정엽 감독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뒤 그에게 그대로 공포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헙!!”
숨을 들이켠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박정엽 감독.
죽음의 여신 ‘케레스(Keres)’의 선봉장이었던 카이잘의 기운을 직면했으니 내 눈빛에서 느꼈던 공포심에 아마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거다.
“저는 ‘지킬’ 배역을 무척이나 잘해 낼 자신이 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물음에 박정엽 감독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만 연신 끄덕거렸고, 강수찬 대표와 최재우 이사는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박 감독, 갑자기 왜 그래요?”
뭐라도 해보겠다고 말했던 나는 평온한 얼굴로 질문이나 던지고 있고, 뭐라도 보여 달라는 태도였던 박정엽 감독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으니 강수찬 대표나 최재우 이사가 볼 때는 참으로 뜬금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박정엽 감독의 끄덕임에 헤죽거렸다.
내가 공포의 신 카이잘의 소환을 해제하고 나서야 박정엽 감독은 들이쉬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참 동안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는 그제야 마음이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그게 연기라고요?”
“모자라나요?”
“아뇨! 아닙니다! 허, 참! 괜히 주시후, 주시후 하는 게 아니었네요.”
* * *
오랜만에 찾은 B&M 엔터테인먼트 사옥.
김남규 팀장이 스케줄에 관해 의논하자며 6층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팀장님, 저 왔어요.”
“어, 그래 잠깐만 앉아서 기다려 봐.”
나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김남규 팀장의 옆에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여러 개의 파일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정신없이 훑어 내려가고 있던 그는 정리가 되었는지 내가 잘 보이게끔 노트북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자, 골라봐.”
“이게 뭐예요?”
“섭외 들어온 프로그램들인데 콘셉트나 특징은 내가 정리했어. 한번 볼래?”
나는 마우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대강 파일을 훑어보며 말했다.
“꼭 프로그램 해야 되요? 광고 찍고 화보 촬영에 잡지 인터뷰만 해도 버거운데…….”
“그건 <블랙 리앙>이 극장가에서 예매율 1위 찍었을 때나, 홍보 차원에서 했던 스케줄이고. 지금은 프로그램 하나 들어가는 게 딱 좋아. 이제 막 빌보드 차트에 네 노래가 언급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고, 어차피 <지킬 앤 하이드> 공연은 내년이잖아. 아직 7개월이나 남았으니까 틈틈이 얼굴을 보여줘야 대중들에게 잊히지 않지.”
김남규 팀장은 내가 쓰고 있는 모자를 툭툭 치며 격려했지만,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별로 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는데…….”
연예인들과 오지에 있는 무인도를 탐사하는 생고생 버라이어티는 별로 하고 싶지가 않고.
납량 특집 오싹오싹 흉가 체험?
하…… 귀신들이 나를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가겠지?
이건 입대 프로그램? 꿈에 나올까 두려운 군 생활을 다시 하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우스로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 독일?”
눈에 딱 들어오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 있다.
“그건 마음에 들어? 제일 먼저 거른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 제가 왜요?”
“해외에 나가는 거 지겹지 않아? 항상 한국에 언제 돌아가냐고 묻잖아.”
“그거야, 몇 개월씩 나가 있으니까 그랬던 거고, 이번엔 보름 예정이잖아요.”
나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가 크게 관심을 보이자 김남규 팀장은 피식 웃으며 내가 보고 있던 파일을 출력해 오더니 내 앞에 내밀었다.
“그럼 이걸로 하는 거다?”
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
ABS 방송국에 주말 저녁으로 편성된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다.
현재 시즌3이 방송 중이고, 내가 들어갈 예정인 촬영분은 다음 달에 방송될 예정이다.
이번 촬영지는 베토벤, 바흐, 헨델, 브람스 등, 클래식 음악의 거장을 수도 없이 배출한 독일.
보름 일정의 해외 촬영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는…….
“어! 선배님, 오셨어요?”
“아, 시후 씨. 일찍 왔나 봐요?”
가요계의 요정이라 불리는 박윤지.
실제 나이는 나보다 15살이나 많은…… 올해 41살이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외모와 작은 체구, 그런데도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그녀의 발성 덕분에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뷔 22년 차의 노련한 가수다.
박윤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멀찍이서 생기발랄하게 뛰어오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선배니임!!!”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소녀를 보고 나도 덩달아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사실, 사전 미팅 때 보고 처음 보는 사이였다.
“아우! 선배님들이랑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떨리고 긴장이 돼서요. 어젯밤에 잠도 잘 못 잤어요.”
“아, 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보름이나 같이 있어야 하는데 친하게 지내야죠. 저도 언니,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헤헤헤.”
이 소녀는 데뷔 2년 차 걸 그룹 ‘테스티모’의 멤버인 ‘문리’다.
깜찍한 외모에 귀염성 있는 성격이지만 의외로 문리가 그룹에서 ‘랩’을 담당했다.
“어머! 얘 귀여운 것 좀 봐. 그래! 우리, 호칭 정리하고 편하게 지내자. 그럼…… 나는 다 이름을 불러야겠다. 괜찮지, 시후야?”
“네. 저도 누나로 모실게요.”
나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박윤지가 내게 건넨 질문이었는데. 채 입술을 떼기도 전에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대신 대답을 한 것이다.
“아! 선배님 오셨어요?”
“아, 오빠! 뭐예요!”
내 등 뒤에 서서 철딱서니 없이 씩 웃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김건무였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어, 문리 왔니? 그런데 오빠, 누나라고 부르겠다면서 왜 나는 아직 선배님이냐?”
문리의 인사에 김건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 저희 아빠가 선배님보다 두 살 어리세요. 오빠는 쪼끔…… 그렇지 않나요? 아! 그럼 삼촌이라고 부를까요?”
문리의 말에 김건무는 인상을 팍! 썼고 박윤지는 손가락으로 문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앗! 오빠죠! 건무 오빠!”
문리의 오빠! 발언에 김건무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를 바라보고 있던 담당 PD는 힐끗 시계를 쳐다보고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 모이셨으니 출발해 볼까요?”
담당 PD의 말에 네 명의 가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지윤, 김건무, 문리. 그리고 나.
이 멤버들은 지금부터 독일로 건너가 버스킹 할 예정이다.
동료 가수들과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는 버스킹 프로그램, 이것이 내가 이라는 프로그램의 출연을 결정한 이유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대략 11시간.
또 그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달래나 걱정했다.
선반 위에 가방을 올려놓기 전에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때 손을 집어넣은 가방 안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 전원을 안 껐구나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진동의 이유를 잠깐 살폈다.
SNS 채팅창에 여러 개의 짧은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 프로그램 때문에 독일에 온다던데?
- 나도 독일에 있어.
- 가능하다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
-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이 그리워…….
발신자는 뜻밖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