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괜히 그러는 게 아니지 (1)
<지킬 앤 하이드 (Jekyll and Hyde)>
4년간 브로드웨이 유명 극장에 간판을 걸며 초대박 흥행한 뮤지컬이다.
1500회에 이른 이 공연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신화라 불릴 만큼 많은 공연 회수를 기록하였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공연이 종료된 후 중국, 독일 등지로 수출이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브로드웨이에서 만큼의 흥행을 거두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작비 본전 회수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후에는 종종 브로드웨이의 각 극장에서 리바이벌 공연만 해서 <지킬 앤 하이드>의 명맥만 이어가던 그때.
2004년 한국에서 첫 공연을 시작한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은 엄청난 관심 속에서 대인기를 끌었으며 2차, 3차로 이어진 공연은 메마른 한국 뮤지컬 시장 최고의 성공을 이룬 뮤지컬로 등극하며 현재까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매회 전 좌석을 매진시키며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는 이번 5차 공연을 마친 후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
다음 6차 공연을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1차부터 <지킬 앤 하이드> 연출을 맡아 온 ‘박정엽’ 감독.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이 있었다.
처음 1차 공연 때 배우들을 캐스팅했을 때만 해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뮤지컬 계통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배우들을 섭외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배우들로 교체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시장의 뮤지컬은 어린이들을 겨냥한 작품이 많았기에 뮤지컬 전문 배우에 관한 인식도, 관객들의 평균 수준도 그저 그랬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엽 감독은 꿋꿋하게 뮤지컬의 막을 올렸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노래, 연기, 춤 실력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뮤지컬 배우들을 섭외한 감독의 연출 덕이라는 입소문을 탔다.
그 덕에 좋은 뮤지컬이라는 평을 받은 <지킬 앤 하이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만 흥했던 뮤지컬이었지만 이후 한국에서도 매회 차 티켓 매진을 거듭하며 과거 미국 브로드웨이 못지않은 인기를 끌게 됐다.
특히 5차 리바이벌 공연은 현재 영화, 드라마에서도 톱 클래스의 인지도를 가진 ‘정재운’ 배우를 기용했는데 역대 최단 시간에 티켓을 매진시켜 버리는 기록을 세웠다.
계속되는 흥행 신화에,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던 박정엽 감독의 어깨가 정말로 으쓱했던 순간은 5차 마지막 공연 날,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가진 가수 겸 배우 주시후가 공연장을 찾았을 때였다.
주시후의 뮤지컬 공연 관람 소식에 그날에는 시어터의 입구에서부터 기자들과 취재진이 몰려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싱가포르를 비롯해 미국의 기자들도 꽤 많았다.
어쩌면…… 자신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박정엽 감독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웃음 대신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오늘 아침부터였다.
“공연을 보러 와 준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엄청나게 홍보도 됐고 대기실까지 방문해 줬으니 정재운 배우의 기도 살았고. 그런데 주연? <지킬 앤 하이드>를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하! 참 내! 그럼 공연을 보러온 것도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는 거잖아?”
L.아트퍼포먼스 회의실.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있던 박정엽 감독은 끼고 있던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짜증을 토했다.
연출하고 있는 뮤지컬의 투자사인 ‘L.아트퍼포먼스’는 일본에 본사를 둔 ‘릿치’ 그룹의 계열사로 6차 공연에 관한 캐스팅을 논하기 위해 제작진을 소집한 상태였다.
박정엽 감독이 회의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박정엽 감독은 오늘 아침 대한민국의 수많은 기획사 중에서도 3대 기획사라 불리는 B&M 엔터테인먼트의 이사가 직접 걸은 전화를 받았다.
주시후에게 <지킬 앤 하이드> 6차 공연의 주연을 맡아 달라는 것.
주시후가 한국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으므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고 말하면서 좋아죽지, 이런 반응은 이상했다.
그런데 박정엽 감독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 났다.
그에게 연출이란…… 감독이 배역에 적합한 배우를 물색하거나 발굴하는 것이다.
흙 속에 파묻힌 원석에 묻은 흙을 털어낼 때 가장 큰 희열과 재미를 느끼는 박정엽 감독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연출에 침범하는 부류를 가장 싫어했다.
연출은 오롯이 연출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박정엽 감독의 처지에서 인지도를 등에 업고 겁도 없이 뮤지컬에 뛰어들어보겠다며 주연 자리를 내놓아라. 하는 주시후가 못마땅했다.
“<지킬 앤 하이드>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역이야? 달랑 드라마 두 개, 영화 하나 찍은, 배우로 치자면 완전 신인이잖아? 어디서 겁도 없이 그런 깊은 내면 연기를 하겠다고 덤비는 거야?”
박정엽 감독의 옆자리 앉아 있던 허정희 작가는 그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설마, 감독님. 주시후 씨 나왔던 드라마 안 보셨어요? 둘 다 시청률이 대박 난 드라마인데…….”
“드라마? 내가 드라마 볼 시간이 어디 있나? 그리고 나 그때 호주에 있었어.”
“와……. 대박! <왕의 신하>도 안 보셨다고요? 진짜 부럽네요. 저는 그 드라마 안 본 눈을 사고 싶은 정도로 눈 높아졌어요! 감독님이 드라마를 안 보셨으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 주시후 씨 연기하는 것을 보셨다면 겁 없다는 말은 안 하셨을 겁니다.”
“아니, 그럼 허 작가는 주시후가 6차 공연의 주연을 맡아도 괜찮다……. 이런 말이야?”
박정엽 감독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자 허정희 작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엉뚱한데 고집을 피우는구나…… 하는 한숨이었다.
그녀는 이럴 때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 감독님. 무조건 싫다고 생각하실 것만은 아닌 상황입니다. 물론 정재운 배우가 ‘지킬’ 배역에 알맞긴 하죠. 사람들이 괜히 정지킬! 정지킬! 하겠어요?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그 어떤 연기보다 대단했죠. 저희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요? 다음 6차 공연은 정재운 배우가 스케줄 때문에 못 한다는데요? 그런데 만일 주시후 씨가 지킬 역을 맡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드라마로 이미 연기상도 받았지. 가수로서도 톱 클래스지. 인지도도 정재운 배우에 비하면 훨씬 높아요.”
“저도 동감해요. 전혀 우리가 손해 볼 캐스팅은 아니라고 봐요. <블랙 리앙>까지 개봉해서 세계적으로 관심받는 배우인데 인지도가 비교나 되나요? 아! 그리고 저는 주시후 씨의 드라마를 모두 다 봤는데 연기가…… 어마어마해요. 아우! 엄청나게 소름 돋아요. 꼭 보세요, 드라마.”
무대감독을 맡은 심기철 또한 허정희 작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박정엽 감독의 한쪽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가 무언가가 궁금하거나 고민을 할 때 하는 습관이었다.
이를 캐치한 허정희 작가는 말을 덧붙였다.
“참! 소식 못 들으셨어요? 주시후 씨가 이번에 새 음원 출시한 거 아시죠? 음악 방송에서 무대 올라간 날, 1위 했었잖아요.”
“허 작가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박정엽 감독은 계속해서 한쪽 눈썹을 실룩거리며 허정희 작가에게 물었다.
“헉! 감독님만 빼고 다 알 거예요. 적어도 엔터테인먼트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흠흠!! 그런가?”
“어쨌든 주시후 씨의 이번 새 음반은 빌보드 차트를 겨냥한 거라고 하던데, 혹시 빌보드 차트 상위권에 올라가면 우리 뮤지컬이 그 덕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 덕은 필요 없는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홍보팀의 이정민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는 그 순간, 회의실 문이 열리며 L.아트퍼포먼스 대표 강수찬이 들어왔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화를 받고 오느라고요. 하시던 얘기, 마저 하시죠.”
강수찬 대표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이정민은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도 홍보는 충분하지 않아요? 이번 공연도 티켓이 매진되는 바람에 암표까지 돌았다고 하던데. 아무리 주시후 씨가 인기가 높다고 한들, 객석 좌석이 한정되어있으니 수익 면에서는 딱히 달라질 게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표 구하기가 더 힘들어질 테고 암표나 더 나돌 거로 예상합니다.”
“만일 공연장이 ‘마레나 센터홀’이라면? 그럼 확실히 우리한테도 이득이겠죠?”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강수찬 대표의 말은 회의실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킬 앤 하이드>의 공연장인 ‘시어터 마레나’는 총 9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뮤지컬 전용관이었다.
반면에 강수찬 대표가 언급한 ‘마레나 센터홀’은 26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시어터 마레나보다 객석 수가 약 3배의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으니 모두의 눈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대관료는 둘째 치고 마레나 센터홀에서 뮤지컬을 공연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오페라라면 또 모를까. 격조와 격식을 따지는 유서 깊은 마레나 센터홀에서요? 뮤지컬 공연에 절대 대관해 주지 않는 곳이잖아요.”
뮤지컬 홍보팀의 이정민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얘기를 들으니 피식하고 헛웃음까지 터져 나왔다.
“방금 전화 통화를 하고 온 곳이 PS 미디어플랫폼입니다. 중국 PS China의 한국 지부죠. 다들 PS China는 아시죠? PS 미디어플랫폼의 대표가 그러더군요. 명색이 주시후가 서는 무대인데 마레나 센터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더군요.”
“허!”
“아, 이것 참.”
“주시후 씨의 뒷배경도 참, 엄청나네요?”
강수찬 대표의 말에 회의실의 모든 사람은 혀를 내둘렀다.
그것도 잠시.
곧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한국 최고의 뮤지컬이라 칭송받으면서도 마레나 센터홀에서의 공연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주시후가 뮤지컬 업계 종사자들의 꿈인 마레나 센터홀 공연을 가능케 했다.
잠깐, 뮤지컬을 하고 싶다며 달려드는 배우는 주시후에 관한 평가를 보자면.
그의 연기는 신들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볼 때마다 놀라움 선사했고, 신이 내린 목소리, 천상의 목소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노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세계 비보잉 대회에 나가도 우승할 실력이라는 그의 춤 실력 또한 유명했다.
놀라운 실력을 갖춘 복덩어리였다.
단 한 명. 박정엽 감독만은 그 표정이 떨떠름했는데, 그 배경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에 강수찬 대표는 조심스레 박정엽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인지도도 높고 연기도 잘하고, 거기에 노래에 춤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배우인데 감독님께서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박정엽 감독은 잠시 말없이 고민에 빠져 있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도 꺼려지는 건 사실이네요. 정재운 배우의 후임으로 봐둔 배우가 있어요. 그 배우의 소속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배우와 직접 만나서 얘기도 거의 끝난 상태이고, 그 배우 역시 뮤지컬의 황태자라 불릴 만큼 무대 매너도 확실하고 연기도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지요.”
“황태자라면? 혹시…… 고준 배우 말입니까?”
무대감독 심기철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맞아요.”
“아이고! 주시후랑 붙은 게 하필이면 고준이라니! 꼭 함께 작품 해 보고 싶었던 친군데!”
심기철 감독이 앓는 소리를 하든 말든, 강수찬 대표는 박정엽 감독에게 다시 권했다.
“일단 만나 봅시다. 날짜는 회사에서 잡겠습니다.”
박정엽 감독은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걱정뿐이었다.
‘주시후가 싸이코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 * *
“싸이코 연기요?”
나는 다짜고짜 연기를 주문하는 눈앞의 사내에게 되물었다.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해서 나온 자리인데 갑자기 오디션을 보려는 분위기였다.
조금 전 L.아트퍼포먼스 본사에 도착한 나는 최재우 이사와 함께 대표실에 들어갔다.
안에는 L.아트퍼포먼스 대표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 뮤지컬의 연출을 맡고 있다는 박정엽 감독은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싸이코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건 안 해 보셨죠? 가능하시겠어요?”
라고 물어왔다.
여기서 보여 달라는 건가? 만나자마자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