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146화 (146/170)

# 146

146화 인연은 다 정해져 있어 (1)

재개된 CF 촬영.

박지선 감독의 촬영 시작을 알리는 ‘큐’ 사인이 들려오자 액션 배우들이 주먹을 뻗었다.

나는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피하다가 황민규를 찾아 등을 맞대고 호흡을 골랐다.

뒤 돌려 차기 후, 허리춤에 있던 삼단 봉을 꺼내 허공에 휘둘러서 촤악! 하고 펼친 그때였다.

“파파팟!”

“원투! 피하고 팍팍!”

등 뒤에서 작게 들리는 목소리.

귀 기울여 누군지 확인해 보내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민규!

아무리 동시녹음을 하는 촬영이 아니라지만,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잡음이라니…….

내가 조금 전 들었던 해괴한 소리가 황민규의 목소리였다고 생각하니 어이없었다.

나는 삼단 봉을 휘두르며 등을 맞대고 있는 황민규를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조용히 좀 해요, 형.”

“어? 뭐라고?!”

연기하던 황민규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 때문에 대적하던 액션 배우들의 손이 멈추는 건 당연했다.

박지선 감독은 ‘NG!’라고 외쳤고 황민규는 나를 돌아보았다.

“야! 네가 말 시켜서 NG 났잖아!”

촬영 중 잡소리로 내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고 동작을 멈춘 게 누군데?

결과적으로 황민규의 말이 NG의 원인이었으니 화를 내도 내가 내야지.

도리어 큰소리치는 황민규를 보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떠 올랐다.

“형이 이상한 소리를 내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입으로 꼭 그렇게 팍팍! 해야겠어요?”

내 목소리를 크게 키우며 짜증 내자 황민규는 아! 하는 표정으로 내 등을 퍽! 하고 때렸다.

“아! 내가 그랬어? 에이, 민망하게 그걸 또 말하고 그러냐. 아까 코치님이랑 합 맞추면서 연습할 때 그렇게 배웠거든. 그새 입에 붙었나 보다. 미안! 미안!”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며 우길 줄 알았던 황민규는 잘못을 쉬이 인정했다.

황민규의 사과가 끝나고 다시 시작된 촬영.

이번에는 다행히 황민규도 희한한 소리를 내지 않았고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삼단 봉을 펼쳐 들고 폭주하는 내 앞을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마치 검기라도 방출하는 것처럼 내가 삼단 봉을 휘두를 때마다 액션 배우들은 공중제비를 돌며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액션 연기에 한창 신바람을 내고 있을 때였다.

“컷! 수고하셨어요!”

흥이 돋아나 날뛰던 내 혈기를 억누르는 박지선 감독의 오케이 사인.

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는 뒤쪽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액션 배우 한 명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배우는 아마 신인 연기자인 듯했다. 예전에 드라마 <왕의 신하>를 촬영하기 위해 파주에 있는 ‘아트 액션 스쿨’에 몇 개월 출퇴근 도장을 찍었을 때도 못 봤던 얼굴이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탈탈 털며 환하게 웃었다.

“시후 씨의 명성을 익히 들었는데, 실제로 현장에 나와 보니 선배들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던 이유가 있네요.”

“그걸 이제 알았어? 그래서 선배들 말은 허투루 듣는 게 아니라니까! 감독님이 곧 들어갈 드라마 때문에 다른 일거리는 좀처럼 안 맡으시는데, 시후 씨 한 명 보고 스케줄까지 조정하시고 승낙하신 거 보면 알겠지?”

다른 방향에서 걸어오는 또 다른 액션 배우의 말이었다.

일전에 아트 액션 스쿨에서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가르치던 코치님이었다.

신인 연기자인 듯한 그가, 말하는 코치 쪽으로 몸을 돌리자 흙 범벅이 된 등이 보여 털어주었다.

이를 본 신인 액션 배우는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더니 날 칭찬했다.

“그러게요. 액션은 뭐! 말할 것도 없고요, 매너도 정말 끝내주시네요.”

“에이……. 그만 띄워 주세요. 액션 연기가 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코치님들께서 잘 맞춰 주시니 제가 그만큼 돋보이는 거죠.”

“겸손하기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가다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살짝 옆을 돌아보았다. 마침 황민규가 나를 힐끗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민규는 고개를 싹! 돌리더니, 옆에서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는 액션 배우에게 다가가 탁! 탁! 하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 별걸 다 따라 하네.’

“고마워요, 민규 씨.”

“하하하! 별말씀을요!”

황민규는 끝내 감사의 인사를 듣고서야 옷을 털어주는 것을 멈추었다.

* * *

“캬아!”

나와 황민규가 캔에 든 맥주를 쭉! 들이키고 한 손으로 구겨 버리자 맥주 광고 촬영은 종료되었다.

“두 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아휴,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네요.”

박지선 감독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샐쭉하게 웃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저쪽에 아직 광고주께서 남아 계세요.”

1년 전에도 광고주와 인사를 나눴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L사의 주류 파트 간부급 임원이 촬영하는 것을 조금 지켜보다 돌아갔다.

한데 오늘은 대표가 직접 촬영장에 나왔는데, 촬영 전에 인사를 나눴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 있다는 말에 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L사의 ‘하이우드’ 맥주는 국내 맥주 매출 부동의 1순위를 지키고 있었으니 그 대표의 스케줄은 나보다 더 바빴으면 바빴지, CF 촬영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표님 와이프께서 시후 씨와 민규 씨의 팬이래요.”

“아…….”

박지선 감독이 작게 속삭여 주는 말을 듣고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피곤하겠지만 잠시 시간을 내어 만나 달라는 것이다.

나와 황민규는 동시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행동에는 ‘거절할 수도 없잖아요?’라는 무언의 뜻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승낙하자 박지선 감독은 조금 떨어진 뒤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L사 대표는 아내를 데리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늦은 시간에 발을 붙들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50대 후반의 사내는 정중한 말투로 우리에게 사과부터 했는데 그런 행동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L사 정도의 회사가 있고, 특히나 광고주라는 위치에 있으면 거만함이 몸에 배었거나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사내는 달랐다.

말과 행동에 기품이 있고 진심이 느껴진 달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늦은 시각까지 촬영하는 것에 워낙 익숙해져 있어서요.”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표의 와이프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황민규는 바구니를 받아 들더니 뚜껑을 살짝 열고 빼꼼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 야간에 촬영하신다고 해서 출출하실까 봐 준비해 봤어요.”

“뭐 이런 걸 다! 정말 감사하게 잘 먹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사진 1장만…….”

대표의 아내는 40대 중·후반의 나이로 보였는데 마치 소녀처럼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히며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제가 정말 두 분의 팬이거든요.”

사진을 찍고 나서 대표와 그의 아내가 돌아간 뒤.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해요.”

“고생은요! 촬영도 재미있었고, 광고주님하고 만난 것도 유쾌했어요. 이런 선물까지 받았잖아요. 그럼 저희는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스탭들도 야식 먹고 난 후에 장비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니 편히 쉬다 가세요.”

박지선 감독은 일이 있어서 먼저 촬영장을 떠났고, 정두훈 감독 또한 액션 스쿨 식구들과 회식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형, 저도 먼저 갈게요. 맛있게 드세요.”

나는 집에 가서 마땅히 할 일은 없었지만, 황민규와 둘이 남아 음식 먹을 생각 또한 없었기에 바구니를 황민규 손에 들려주었는데…….

“야! 몇 개월 만에 만나서는 촬영 끝났다고 쌩하니 가려고 그러냐? 너, 그렇게 정 없는 놈이었어? 그리고 촬영에 지장 줄까 봐 진짜 맥주는 입에도 안 댔는데! 형이랑 새로 나온 맥주 맛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마침 사모님이 이렇게 안주까지 챙겨 주신 마당에! 나 혼자 집에 가서 마시라고? 진짜 너무하네.”

이런 볼멘소리에 결국 발목이 잡혔다.

나와 황민규는 촬영장 한쪽으로 스태프들이 가져다준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 놓고 의자에 앉았다.

“이야! 음식 봐! 이걸 만드셨다고?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퀄리티인데?”

바구니를 들여다본 황민규가 혀를 내둘렀다.

“아마 직접 만드신 걸 거예요. ‘팬심’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힘이거든요.”

“그렇지……. 그래도 보통 인식 속의 대기업 사모님은 식탁에 앉아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음미하며 우아하게 식사하시는 그런 이미지 아니냐?”

“그건 보통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장면이죠.”

나는 바구니 속에 있던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옮겼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단 모양새는 끝내주었다.

그 사이에 황민규는 벌써 캔 맥주 하나를 따서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다.

“캬아!!! 너무 시원해서 완샷 했네! 방금 나 어땠어? 완전 CF 한 장면 같았지?”

그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언제 철들려나? 하긴 제멋에 사는 사람이지. 그게 또 매력이고.

“네, 그러네요. CF 같았어요.”

무미건조한 톤의 내 대답에도 방긋 웃었다.

“그것 봐! 역시 감정을 살리려면 진짜로 마셔 줘야 하는 거라고! 아까 촬영 때 보리차가 아니라 진짜 맥주였으면 얼마나 명장면이 나왔겠어? 자! 건배!”

방금 맥주 캔 하나를 싹 비우더니 이내 캔 하나를 또 집어 든 황민규를 보고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또 만취하려고?’ 하며 괜찮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수였다.

자리를 깔고 앉은 지 20여 분 정도 흘렀을까?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기에 번번이 나를 무시하는 거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황민규는 만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저렇게 좋아하는데 왜 술이 늘지를 않니?

그리고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기도 참 힘든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이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황민규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내가! 오늘은 꼭 따져야겠어! 대체 왜 나만 그렇게 싫어하는지! 꼭 알아야겠어! 이씨! 핸드폰 어디 갔지? 야! 승훈아! 내 핸드폰 좀 갖다줘 봐!”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촬영 스태프들과 김남규 팀장 그리고 황민규의 매니저도 함께 모여 앉아 오순도순 야식을 먹고 있었는데, 황민규의 외침에 그의 매니저가 휴대폰을 손에 들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형,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인제 그만…….”

“야! 잔소리하지 말고 유라한테 전화 걸어! 전화 걸어 보라고오!”

황민규의 매니저가 나를 바라보며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말린다고 듣겠어요?’ 이런 표정도 함께 지어 주었다.

매니저가 성유라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에도 황민규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내가 그동안 때리면 다 맞아 줘, 욕하면 다 들어 줘,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진짜 할 만큼 했는데. 왜 나한테만 그렇게 쌩하냐? 진짜로…… 너무한 거 아니냐고……. 흑흑!!”

그간의 서러움이 폭발한 것인지 황민규의 대성통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황민규의 매니저는 내게 황민규의 휴대폰을 건넸다.

“여보세요? 유라야?”

“아휴…….”

내 물음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민규 오빠 목소리 다 들리네! 대체 거기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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