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금의환향 (2)
“우아! 끝내주네. 이건 그림의 ‘그’도 모르는 내가 봐도 너무 멋있다! 이런 작품 보면 사람의 능력은 참 무궁무진해. 똑같이 손가락 열 개 달렸는데, 누구는 예술을 만들고 누구는 다 태운 쿠키를 만드니…….”
한동하가 어느 그림 앞에 서서 혀를 내두르며 말을 꺼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왜 그러지?
나는, 눈치를 보는 조연석과 강화영을 번갈아 보다가 채설아 얼굴을 보고 낌새를 느낄 수 있었다.
한동하에게 눈을 흘기며 사방에 냉기를 풀풀 풍기고 있는 채설아.
아마도 한동하에게 다 태운 쿠키를 선물했던 모양이다.
“흠흠!”
조연석은 헛기침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 했다.
“이곳은 아까 말한 것처럼 6층은 그림에 조예가 깊고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야. 어머니께서 여기 있는 그림들 대부분이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명작이라 하셨어. 엄청난 고가일 게 분명해. 그래서 6층 보안을 더욱 철저히 해 놨다고 말씀하셨어.”
모두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니 내가 소환한 신계 6품의 천운자 ‘렉 누브아’의 안목으로 따져 보더라도 여기에 있는 회화가 명작인 게 분명했다. 이곳 6층에 올라온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에 환장한 신 같으니라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렉 누브아’는 그림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며 나를 그림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아! 이 그림은 해질 녘 풍경이네.”
렉 누브아의 지식이 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이 작품 이름이 『해질 녘 풍경』이야?”
같은 그림을 보던 강화영이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해질 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작품은 무척 많아. 이건 프랑스 출신의 조세프 베르네(Joseph Vernet)가 그린 『해질녘 풍경』과 아주 유사하게 그린 유화야. 그런데 조세프 베르네의 그림은 유화 기법 중에서도 ‘웨트 온 드라이’ 기법을 사용했어. 겹쳐서 칠했기 때문에 수채화처럼 보이고 거친 질감이 묵직해 보이도록 하는 화풍을 구현했지. 하지만 이 그림은 조세프 베르네의 그림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묘미가 있어서 그 가치가 커.”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렉 누브아의 방대한 지식 때문에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조연석은 어머니 곁에서 그림에 관하여 들은 바가 많았는데도 나의 설명을 듣더니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시후, 너 진짜 대단하네? 혹시 미술 공부했어?”
“후훗! 이 그림은 내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잠깐 있을 때 직접 관리했던…….”
나는 깜짝 놀라 입을 꾹 닫았다.
‘렉 누브아’가 신나서 떠드는 것을 가만뒀더니 자기 마음대로 입을 놀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응? 뭐라고?”
“아! 아니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세프 베르네의 『해질 녘 풍경』이 있다는 걸 인터넷에서 봤다고요.”
“그림 멋있네. 시후의 설명을 듣고 그림을 살펴보니 정말 중후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 같아. 혹시 너 그림도 그려?”
강화영은 그림을 요리조리 훑어보고선 나를 향해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 기대에 찬 눈빛은 뭐란 말인가?
‘당연히 잘 그리겠지?’라는 신뢰의 눈빛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 까짓거 대충 붓으로 쓱쓱 그리면 되는 거 아냐?”
“하긴……. 너라면 왠지 잘 그릴 것 같다만…….”
내 말에 조연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안 해 봐서 그렇지 그리기만 하면 무지하게 잘 그릴걸요?”
나를 만능 능력자로 보는 것 같아 헛웃음이 터진 나는 괜히 객기를 부렸다.
그런데,
“어머? 그래요? 그럼 한번 그려 볼래요?”
갑자기 뒤에서 조연석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조연석의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요? 아니요! 농담이죠, 제가 무슨 그림을 그려요?”
내가 살짝 당황한 걸 알았는지 조연석의 어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쌓아둔 말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뒤에서 잠깐 들었지만, 시후 씨의 그림 보는 안목이나 지식이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림에 해박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펜이나 붓을 잡는 것도 남다르죠. 제 생각엔 아마 기본 이상은 하실 거 같은데요? 아, 참! 만일에 수준 높은 작품이 탄생한다면 이 뮤지엄에 걸어도 될까요?
아까 2층에 걸린 그림들 보셨죠? 그중의 절반은 우리 뮤지엄 손님으로 오셨던 분들이 그려 주신 작품입니다. 현재 화가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죠. 그중 최고로 치는 작품은 장현승 화백께서 2시간 만에 그려 주신 수묵화예요.
장현승 화백보다 뛰어난 작품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도 되겠죠? 시후 씨, 1층 작업실에 준비해 놓으려고 하는데요. 괜찮죠?”
나는 입만 벙긋거렸다. 한동하와 채설아는 나를 향해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반면, 강화영과 조연석은 조금 기대가 가득 찬 얼굴이었다.
할 말만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조연석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서프라이즈 이벤트라 잘 그리려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지만, 내 그림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대충 그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한동하 채설아 커플의 표정에 조금 약 올라서 오기가 생겨서 더욱 잘 그리고 싶었다.
‘흐흠……. 신 중에 소환할 만한 화가가 있나?’
* * *
“네? 아, 예……. 어머님께서 바라는 대로 하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전화를 끊자 김남규 팀장이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는다.
“별일 아니에요. 일전에 연석 형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뮤지엄에 갔을 때 그림 한 장 그렸거든요. 그걸 스페셜 룸에 걸어도 괜찮냐고 물어보시네요.”
“그래? 나 없는 사이에 문화생활도 즐기고. 나는 뭣 빠지게 일했는데 말이야.”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의 첫 번째 스케줄이 있는 날.
김남규 팀장과 함께 대기실에서 수다 떠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푸는 와중에 김남규 팀장은 호주머니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그대로 내게 넘겨주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내게 자주 전화하는 조연석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조연석과 통화하는 내가 ‘어머님’을 자주 말하자 김남규 팀장은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내 표정을 이리저리 살폈다.
내가 별일 아니라고 하자 툴툴거렸지만, 별일 아니라고 하자 다행이라는 눈치였다.
“그런데 무슨 그림이기에? 스페셜 룸이라면 뭔가 대단한 곳 아니야?”
“아, 그게 말이죠…….”
일주일 전, 뮤지엄에서 나는 엑스트라 링으로 소환할 수 있는 신의 목록을 살피던 중 너무 유명해서 누구도 알 법한 신 한 명을 소환했었다.
‘그래. 이 정도 신은 소환해야 그림 좀 그렸다는 말을 듣지?’라며 소환한 것은 다름 아닌, 신계 품계 6품.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탈리아 출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째서 화가가 아닌 발명가로 신계에 올라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그 인물인 건 확실했다.
그리고 내가 붓을 들고 30분쯤 흘렀을까?
차 한잔 마시고 오는 일행들이 1층 작업실에 도착했을 즈음 난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을 본 일행들의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어? 이거 모나리자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눈썹 없으면 모나리자잖아?”
참으로 해맑게 웃으며 대답한 강화영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눈썹이 없으면 모나리자라니…….
그러나 그림의 ‘그’자도 모르는 일행들 뒤로 등장한 조연석의 어머니는 다른 평가를 했다.
“이게……. 지금 30분 만에 그린 그림이라고요?! 말도 안 돼!!”
급하게 그린 그림이었지만, 원본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서 놀란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이었으니 급하게 그렸다고 해도 비슷했다.
이렇게 탄생한 유화의 기름기가 마르면 2층에 전시해도 되겠냐는 조연석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응당 그러시라고 했었는데, 스페셜 룸이라니…….
어찌 보면 대강 그린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하며 격앙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성심껏 잘 그렸다면 진품 감정 의뢰라도 하셨을 기세였다.
“아, 근데 팀장님은 대체 미국에서 무슨 프로젝트를 맡으셨던 거예요? 명색이 제 매니저라는 분께서 저를 버려두고 하셔야 하는 일이 뭐였을까?”
“삐졌냐? 최 이사님한테 맡겨서? 이사님이랑 같이 일하는 게 그렇게 싫었어? 어째? 확! 일러바쳐?”
“아놔! 팀장님! 진짜, 왜 이러세요?!”
미국과 중국에서 최재우 이사의 케어는 완벽했지만, 역시 스케줄은 김남규 팀장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팀장님도 내가 편하고 익숙한지 하는 행동이 점점 나이 많은 동네 형 같아졌다.
어쨌거나 팀장님과 나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블랙 리앙> 말이야. 내년 상반기에 상영할 영화관이 잡힌 건 알고 있지?”
“네.”
“그때 맞춰서 미국 음원 시장에 네 노래를 띄워 보려고.”
이건 처음 듣는 얘기다.
만일 미국에 <블랙 리앙>이 개봉하면?
시리즈마다 인기 폭발인 왓칭 엔터테인먼트의 히어로물에서 주연을 맡았다면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받으며 주가가 올라가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그 시기에 맞춰서 미국 음원 시장에 음반을 내 놓으면, 음반의 인기도 자연스럽게 껑충 뛸 것이었다.
“아니,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해 주시는 거예요?”
내 투정에 김남규 팀장은 껄껄 웃었다.
그것은 꼭 목표를 달성한 자의 여유처럼 보였다.
“미국 음원 시장은 돈만 있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거든. PS America에서 팍팍 밀어도 될까 말까였어. 관계자들 만나서 소스 얻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였거든. 그런데 확실한 거 좋아하는 우리 PS China의 자오린 이사님께서 직접 나서 주셔서 다행이었지.”
“와……. 아무리 그래도, 제 노래인데 저만 모르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어이! 일찍 왔네?”
“형이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고?”
“인마! 원래 스타는 기다림 따위는 하지 않는 법이야.”
약속 시각보다 10분이나 늦게 나타나서 주접을 떠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민규다.
“아, 저 형 이상해! 빨리 의상이나 갈아입으세요.”
“알았다. 그나저나 우리 얼마 만이야? 한 5개월 됐나?”
맹인음악협회에서 주최했던 경매 행사에 참석했을 때 보았으니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유라는 잘 지내고 있나?
새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떤 역할인지는 모르겠다.
“형, 유라는 잘 지내죠? 자주 만나요?”
내 질문에 황민규는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유라는……. 하아!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
“왜요?”
“새 영화 들어간다고 맡은 배역에 또 흠뻑 빠졌어.”
“근데 감당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 이번에 맡은 역은 조폭 마누라야……. 요즘 유라는……. 욕이 늘었어.”
“아…….”
나는 황민규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굳이 안 보더라도, 둘 사이에 펼쳐질 액션과 육두문자가 눈앞에 선했다.
“안녕하세요!”
또 한 번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여성이 들어왔는데, 역시나 아는 얼굴이다.
‘박지선’.
작년 이맘때쯤 나와 황민규가 동반으로 출연했던 맥주 CF를 총괄한 감독이다.
“딱! 1년 만이네요?”
그녀는 손에 든 콘티뉴이티(continuity)를 나와 황민규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
콘티의 표지만 보고 벌써 입맛을 다시는 황민규의 귓가에 나는 속삭였다.
“이번에는 맥주 마실 생각하지 마요. 입에만 대 봐. 가만 안 둘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