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금의환향 (1)
7월 중순에 영화 <블랙 리앙>의 촬영은 모두 끝났지만, 그렇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더빙이 필요한 장면도 있었고, 영화 편집 과정에서 스콧 페브릭 감독이 재촬영이 필요한 컷은 상의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보 포스터 촬영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10월.
“드디어 돌아가네?”
영화 촬영을 위해 LA에 온 후,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고 10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물론 설을 쇠러 한국에 잠시 다녀왔었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좀 더 홀가분해진 느낌이랄까.
LA 국제공항에 배웅을 나온 김남규 팀장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가 부럽다는 듯 계속 툴툴거렸다.
“팀장님도 여기서 계속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일 빨리 끝내면 되죠.”
“그래, 김 팀장. 지금 맡은 작업도 거의 막바지 단계 아닌가?”
나와 함께 귀국하는 최재우 이사의 질문에 김남규 팀장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곧 끝나긴 하죠.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는데, PS China가 팔을 걷어붙이고 PS America를 서포트해 주니……. 그 후로는 순탄했어요. 아마 앞으로 한 달 안에는 마무리되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 촬영 내내 미국에 머무는 동안 김남규 팀장은 나와 별개로 일을 보러 다녔는데 그것이 뭔지 알려주지 않았다.
“대체 팀장님은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아……. 회사 일이야. 맞다! 시후야, 너 면세점에 들른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들어가도 시간이 빠듯할 거 같은데?”
진짜 한국에서 만나면 단단히 붙잡고 한번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남규 팀장이 맡고 있다는 프로젝트에 내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애써 살살 피하는 기분을 들게 하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겠어요. 그럼 먼저 한국에 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 한국에서 봐요!”
손을 흔들어 나와 최재우 이사를 배웅하는 김남규 팀장을 뒤로하고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우! 잠도 못 자고 할 것도 없고! 미쳐 버리겠구먼!”
비행의 지루함에 지칠 대로 지쳐, 좀이 쑤셔 짜증을 느낄 때쯤 인천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장의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기내 방송이 나오자 최재우 이사는 그제야 잠에서 깼는지 입가에 살짝 흐른 침을 닦았다.
참……. 부럽다.
오는 내내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다니.
“아. 드디어 한국 도착했네? 아우! 지루하고 좀 쑤셔서 혼났어.”
뭐가 지루하고, 뭐가 쑤셨다고요?
오는 내내 꿀잠을 주무셨는데요?
“아, 네…….”
하지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부랴부랴 선반에서 짐을 꺼내는 최재우 이사를 바라보았다.
“뭐해? 짐 안 챙기고? 자! 가자! 오늘은 정말로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나가는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최재우 이사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역대 최대로 모인 인파.
인산인해는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팬클럽 ‘주슈’ 회원은 물론이고, 카메라와 마이크를 가져온 취재진들은 내 얼굴이 보이자마자 열띤 취재 경쟁을 보였다.
주슈의 깐깐한 회장인 ‘강소미’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에도 공항은 질서 있는 모습이었다.
“시후 오빠!! 금의환향 축하드립니다!!”
어느덧 내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네는 강소미.
나는 꽃다발을 받으며 강소미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 회장! 든든하구먼!”
최재우 이사도 강소미가 이끄는 팬클럽 주슈 덕분에 질서 정연한 취재진과 팬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소미야. 너는 아무래도 경찰 하는 게 좋겠어. 정리에 소질 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꼭 교통과로 가렴.”
강소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부에 소질 없다는 함축적인 의미였으리라.
“주시후 씨! 인터뷰 잠깐만 부탁드려요!”
“주시후 씨! 차기작으로 생각해 둔 작품이 있나요?”
“새로운 음반은 언제쯤 발매하실 예정입니까?”
사방팔방에서 반짝이는 플래시를 받으며 취재진의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한동안 쉬고 싶습니다.”
이 말이면 될 것이다.
대답 후 나는 많은 경호원의 보호를 받으며 공항을 빠져나갔다.
정말 금의환향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한국이 좋아!’
* * *
“일루 와! 일루 와!”
멀리서 걸어오는 한동하에게 내가 하는 말이다.
“아! 오랜만!”
한동하는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오며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그게 다예요? 그게 지금 형 때문에 마음고생한 동생한테 할 태도냐고!”
나는 손가락으로 한동하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쿡쿡! 미안하다고 했잖아. 잘못했어. 미안해! 그만해!!”
간지럼을 잘 타는 한동하는 졌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사과했다.
“설아 누나는요?”
“아마 곧 올 거야. 화영이랑 만나서 같이 온다고 했거든. 시간 보니까 우리가 빨리 왔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설아랑 한차 타고 올 걸 그랬다, 야.”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차에서 내린 조연석과 정해수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라? 얘들은? 아직이야?”
모인 사람이 나와 한동하밖에 없는 것을 보고 조연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내가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지만, 특별한 스케줄 문제가 아니라면 원래 모임 멤버들은 약속 시각에 늦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일찍 와서 기다리곤 했다.
“영호 형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못 온다고 했고, 진국이 형도 라이도 생방이 있어서 못 온대요.”
“설아랑 화영이는 곧 도착이요.”
한동하가 덧붙이자 조연석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좋냐?”
“좋죠! 형도 여자 좀 만나요. 우리 설아처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돈도 잘 버는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이런 미췬!”
한동하의 팔불출 발언에 조연석이 주먹을 불끈 쥐었을 때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들! 시후야!”
“우리 왔어!”
“어이구! 우리 애기 왔쪄요? 오구오구! 오느라 힘들어찡?”
채설아에게 달려가며 내뱉은 한동하의 애교 섞인 혀 짧은 말이었다.
우리가 모인 곳은 용산구에 자리한 KR뮤지엄 정문이었다.
조연석의 어머니께서 식사와 관람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현대식 뮤지엄을 개관하셨는데, 이걸 핑계 삼아 모인 것이었다.
어차피 핑곗거리가 없어도 모였을 테지만…….
뮤지엄의 안으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사람이 엄청 많아서다.
뮤지엄 같은 곳에 와서 그림을 둘러보는 것은 고상한 사람들의 취미라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20, 30대 층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보이고, 데이트하러 온 연인들도…….
흠흠. 내 옆에도 한 커플이 있었다.
“엄마! 주시후 아냐?”
“한동하랑 채설아 커플도 있는데?”
“조연석이랑 강화영까지……. 무슨 날인가?”
“여기가 조연석 어머니가 하는 곳이라서 오지 않았을까?.”
우리 멤버를 보고 여기저기 속닥거렸지만, 극성맞은 팬들처럼 주변으로 몰려들지는 않았다.
가벼운 캐주얼복 차림으로 입장을 금하는 뮤지엄이라서 그런가?
또,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 휴대폰 꺼내 드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은 모두 예의 있고 조용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좀 둘러봤어요?”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을 때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성분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나이는 4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세련된 옷매무새와 잘 정돈된 헤어스타일, 허리가 가늘게 움푹 들어가 있는 라인을 보니 자기 관리를 잘한 듯 보였다.
“어머니. 저는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소품도 아기자기하고 모든 곳에 세세하게 신경을 많이 쓰신 듯하고, 화분들도 예쁘고요. 분위기도 좋고! 음식만 맛있으면 최고일 것 같아요.”
강화영이 알은체를 하고 나섰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조연석의 어머니가 분명했다.
조연석이 자기 어머니의 연세가 50대 후반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엄청난 동안이었다.
“어머, 화영 씨. 그렇게 마음에 들면 자주 와요. 내 며느리가 되면 물려줄 수도 있는데…….”
“에이, 엄마. 화영이랑 저랑은 거의 형제처럼 지내서 이제는 서로 이성으로 안 보여요. 화영이도 마찬가지고요.”
조연석의 어머니는 그의 말에 살짝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강화영의 사근사근한 성격이 마음에 든 것으로 보였다.
“그럼 천천히 둘러봐요. 내가 레스토랑에 미리 말해 둘 테니까 음식은 마음껏 먹도록 하고요. 저는 손님이 많아서 이만.”
1층부터 4층까지. 한참 뮤지엄을 둘러보고 나니 다들 허기가 밀려오는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그림을 건성으로 보거나 쓱쓱 지나가기 시작하자 조연석은 우리를 5층 레스토랑으로 이끌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 한 명이 우리를 어느 자리로 안내했다.
“식사는 어떤 거로 준비해 드릴까요?”
직원이 메뉴판을 주며 묻자 조연석과 나는 파스타를 주문했고, 강화영은 샐러드를 주문했다.
“설아야. 왜 이렇게 못 골라? 먹고 싶은 게 없어?”
메뉴판을 정독하는 채설아를 보고 한동하가 물었다.
“아니, 다 먹고 싶어서 고민이네?”
“아! 그런 거였어?”
채설아의 말에 한동하가 거들먹거리며 메뉴판을 펼치더니 맨 위부터 아래까지 손가락으로 죽 그으며 말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야야! 미쳤냐?”
“우리 설아가 다 먹고 싶다잖아요.”
“에휴…….”
채설아는 급하게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주세요.”
한동하는 정말로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 레스토랑의 모든 음식을 다 주문할 것 같았다.
극적으로 채설아까지 주문을 마치고 여유가 생겨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 건물 안내도를 본 나는 조연석에게 물었다.
“형. 여기 6층짜리 건물 아니에요? 안내도는 5층까지 나와 있네요.”
“아! 거기는 진짜 그림을 사랑하는 마니아들만 입장 가능한 곳이야. 초대권이 있어야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 우리도 식사하고 올라가 볼래?”
조연석의 얘기로는 그랬다.
그림 가격도 엄청난 고가인데 현대풍의 회화뿐만 아니라 국립박물관에나 전시할 법한 회화가 걸린 곳이라고.
갑자기 몸속의 엔도르핀이 샘솟고 흥미가 동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오면서 소환했던 신계 6품 천운자 ‘렉 누브아’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림은 문외한이었으니 조금이라도 흥미 있게 관람하려면 그림에 관해 잘 아는 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15년간 ‘영국 국립 미술관’에서 관장을 맡았다는 그림의 신은 자꾸 나를 재촉하며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다.
소환 해제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