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그래! 이거지! (2)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사실을 인정하는 이 남자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언제부터요?”
“음……. 오늘이 사귄 지 딱 187일째거든?”
이 형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내가 알던 이 형은 귀찮은 일은 하지 않는 편이라 날짜를 카운트할 리 없는데…….
의외로 형은, 채설아가 말한, 현명하고 자상한 남자가 맞았나 보다.
그나저나 교제한 지 6개월이 넘었다면, 우리가 설날에 모임을 했을 때도 사귀는 중이었다는 건데…….
“우아!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요? 설날에 만났을 때도 그런 낌새는 못 느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차차 설명하려고 했는데 알다시피 우리는 항상 너희 집에서 만나니까 말이야. 그런데 네가 촬영 때문에 바쁘고, 요즘 네가 해외에 계속 나가 있으니 우리끼리도 서로 만나기 힘들거든? 굳이 바쁜 사람들한테 ‘전화로 우리 사귀어요!’ 하고 광고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LA에서 찍힌 사진은요? 그것도 형이에요?”
“응. 설아가 화보 촬영 간다기에 나도 며칠 늦게 출발했지. 위치가 한인 타운 근처도 아니었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괜찮을 거로 생각해서 따라간 건데 그렇게 사진에 찍힐지는 몰랐네?”
“아휴…….”
내가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 있던 최재우 이사는 더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놈 어떤 자식이야? 당장 전화기 줘 봐! 어떤 놈이 우리 설아한테 집적대는지 목소리라도 좀 들어 보게!”
최재우 이사가 뻗는 손길을 피해 나는 휴대폰을 등 뒤로 감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놔 봐! 대체 어떤 놈이야? 우리 설아 이미지에 마이너스가 되기만 해 봐, 어디! 가만 안 둘 테니까!”
사실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이 밝혀지면 손해 보는 쪽은 채설아가 아닐 수 있었다.
상대 남배우의 인기도 채설아 못지않은 한국 최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 좋아서 만나는데 어느 쪽이 손해 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다.
나는 휴대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며 재촉하는 최재우 이사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채설아의 이종사촌 오빠인 것을 떠나서 소속사의 이사님이 아닌가?
아무래도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야 대처하기가 수월할 것이었다.
“이 사람, 동하 형이에요. 한동하.”
“뭐?”
* * *
B&M 엔터테인먼트에서 발 빠르게 대처하고 표명한 덕분에 더는 내 이름이 네티즌들의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동하의 이름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며 채설아와의 스캔들로 떠들썩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열애 사실을 두고 누가 더 인기가 있다느니, 누가 더 아깝다느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우리 모임 연예인들의 팬클럽에서 적극적으로 인터넷 여론을 움직여 결국 이 커플을 축하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는 한시름 놓은 최재우 이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 윈난성에서의 영화 촬영을 이어갔다.
이제 그것도 막바지에 이른 어느 7월의 여름.
스콧 페브릭 감독이 손에 땀을 쥐며 메가폰을 잡고 있는데 그 표정이 참으로 상기돼 있었다.
오늘 찍을 장면은 감독과 제작진이 <블랙 리앙>의 하이라이트로 기대하는 부분이다.
스콧 페브릭 감독은 생각했던 것만큼 멋진 장면이 나올 것인지 상상하는 낯빛을 드러냈다.
분명 기대보다 좋은 장면이 연출될 거라는 믿음으로 설렘 반, 걱정 반인 얼굴이다.
리앙이 사는 타리수별에 대군이 쳐들어오는 장면, 바로 엔딩이었다.
황제 ‘제수왕’의 아우인 ‘춘’과 손을 잡은 악에 근원 ‘우르타’.
우르타 군대가 타리수별 황성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접한 리앙은 급히 지구를 떠나 타리수별로 돌아갔다.
며칠간 우르타의 군대와 접전 끝에 드디어 ‘춘’과 맞닥뜨렸다.
“다들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 악에 받친 연기가 잘 나올까 걱정이 조금 되네요.”
영화 촬영을 하며 배우들 간의 우정이 제법 돈독해진 터라 스콧 페브릭 감독의 걱정 섞인 말을 내뱉었다.
모두 프로들이니 연기만큼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스콧 페브릭 감독의 ‘ready, action!’ 사인을 주시하고 촬영에 들어간 배우들.
“형님! ‘카오스 스톤’만 넘겨주신다면 백성들의 무모한 희생은 이제 더 없을 겁니다.”
“어림없는 소리! 피를 나눈 형제라고 너를 크게 믿었던 그동안의 세월이 한탄스럽구나! 어리석은 놈. 우르타가 이곳까지 쳐들어온 이상 타리수별을 그냥 두겠느냐? 네놈이 속은 것이다. 아! 타리수별의 문지기인 너는 그의 군대가 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에 일조하였으니 어쩌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나와 맞닥뜨린 이상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네놈의 피로 전쟁 통에 죽어간 수많은 타리수 백성들의 혼을 달랠 것이다!”
제수왕은 칼을 뽑아 들고 아우 춘에게 달려들었다.
춘도 무기를 꺼내 들고 제수왕을 맞이했는데, 두 사람의 액션 신은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만큼 꽤 잘 맞아떨어졌다.
챙! 챙챙!
수차례 칼을 부딪치며 팽팽한 접전을 이어나갔지만, 무예 실력 면에서는 제수왕이 우세했다.
역시 황제 자리에 그냥 앉은 것이 아니었다.
춘의 목에 칼끝을 겨눈 제수왕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춘! 지금이라도 너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봉에 나서 우르타의 목을 가져와 공을 세우겠다고 결심한다면 나는 칼을 거둘 것이다. 아우야! 이제라도 깨달아야 한다. 너의 한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터전이 짓밟혔고, 수많은 생명의 불씨가 꺼져 버렸으니, 되돌리기엔 늦었으나 더는 죄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는 너와 내가 함께 가꾼, 우리의 고향이잖느냐?”
무릎이 꿇려졌던 춘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에 제수왕의 칼날이 맞닿아 있었음에도 춘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제수왕을 몰아붙였다.
“우리? 흥! 타리수는 당신의 별이잖소? 형님이 나와 무엇을 나눠 본 적은 있으시오? 나는 항상 당신에게 가진 것을 빼앗기면서도 태자이기 때문에, 형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황제이기 때문에 참았소! 말해 보시오. 형님은 지금껏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떳떳했단 말이오? 묘 황후에 대한 나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그녀를 가로챘잖소? 그녀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었거늘, 형님은 부황께 그녀와의 혼인을 청했소! 국혼이 있기 전날 밤, 그녀가 내 소맷자락을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형님은 아시오?”
“뭐, 뭐라?”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잘해 줄 것이지, 죽은 후에 지극정성으로 신전에 모신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오? 차라리 내가 낫소! 나는 전에도 지금도 그녀를 지키는 중이니까.”
춘이 묘 황후를 언급하자 제수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수왕은 춘의 목에 겨누고 있던 칼을 천천히 거뒀는데, 춘은 이때다 싶어 소맷자락에 감추어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제수왕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으윽!”
제수왕의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지자 춘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형님. 우르타가 묘 황후의 영혼을 붙들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소.”
이 말을 마지막으로 춘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때 리앙이 대전에 뛰어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수왕과 그의 가슴이 꽂혀있는 단도를 번갈아 보던 리앙은 이내 사태를 파악했는지, 얼굴에 핏대가 설 정도로 격분했다.
“숙부님!!”
춘의 얼굴은 태평했다.
“조카야, 왔느냐?”
“말해 보십시오! 진정 그대가 부황을 해쳤단 말입니까?”
“보는 그대로다. 마침 잘 왔구나. 부황의 임종을 시켜볼 수 있게 되었으니……. 아직 형님께서는 숨이 붙어있으니, 내가 동생 된 예로 아들에게 이별을 고할 시간 정도는 주마.”
리앙은 눈앞의 원수보다는 제수왕에게 달려가는 것을 선택했다.
춘의 말마따나 부황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부황!!”
“태자. 내…… 아들아.”
제수왕은 입을 열자 피를 토하였는데 리앙은 소매로 부황의 입가를 닦아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죽을 때가 돼서야 깨닫는구나. 네가 태어났던 해에 ‘운명의 수정’이 말했다. 너는 ‘전쟁의 신’을 몸속에 봉인한 채로 태어난 타리수별의 새로운 전신이라고……. 봉인을 풀지 못한다면 너는 200살이 되는 해에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했었다. 해서 나는 봉인을 풀 방법을 찾아봤지만 결국 알아내질 못했다.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내가 그 봉인을 풀 열쇠였다는 것을……. 아들아. 전신이 되거라! 이제 내 영혼으로 너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니 악을 이겨내고, 타리수별을 지켜다오.”
“부황!! 아니 됩니다!!”
제수왕이 숨을 거두자 리앙은 온 세상이 떠나갈 듯 오열하였다.
리앙은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봉인이 깨지며 발생하는 고통이었다.
봉인이 풀리면서 고통의 여운과 동시에 온몸에 차오르는 힘을 느낀 리앙은 춘을 향해 포효했다.
리앙은 원수를 분노에 찬 벌건 눈으로 응시하며 사방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리앙이 허공으로 손을 뻗자 무형의 공간에서 ‘전신의 검’이 발현되었다.
생각만으로도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전신의 검’이었다.
리앙은 춘을 향해 손에 든 검을 세차게 한번 휘둘렀다.
둘 사이에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춘의 머리카락이 검풍에 휘날렸다.
* * *
“그래! 이거지!”
시원하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컷!’을 외친 스콧 페브릭 감독은 한바탕 웃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역시! 예전에 ‘리앙’ 오디션을 봤을 때 말이야,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아, 춘! 괜찮아요?”
너스레를 떠느라 정신없었던 스콧 페브릭 감독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급기야 대자로 누워 버린 ‘타케우치 케이’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급하게 뛰어왔다.
“아, 이제 괜찮아요. 리앙의 연기에 놀랐나 봐요. 정말 절 죽이는 줄 알았거든요.”
‘스콧 페브릭’ 감독은 ‘타케우치 케이’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나서 너스레를 이어갔다.
“내가 알죠! 방금 나도 리앙의 살벌한 기세에 오금이 저리더라고요. 그걸 고스란히 앞에서 받았으니…….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죠?”
“뭐가요?”
타케우치 케이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되물었는데 스콧 페브릭 감독의 시선이 계속해서 내게 머무르자 덩달아 나를 쳐다봤다.
“리앙의 연기는 아무리 봐도 원초적이란 말이에요. 기쁨, 슬픔, 분노! 이런 게 일차원으로 피부에 먼저 와 닿거든요? 소름이 돋는다고 해야 하나? 특히 살기를 뿜어낼 때는……. 어휴! 평상시에 우리가 알던 그 리앙이 맞나? 싶어요.”
언제 들어도 칭찬은 기분 좋다.
“칭찬 감사합니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죠?”
나는 스콧 페브릭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마지막 한 신 남았어요! 이 장면이 진짜 하이라이트니까 조금만 더 고생합시다!”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은 어느새 해가 넘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깜깜한 밤이 되어 모두의 체력이 바닥이 날 때쯤 감독의 응원 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파이팅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어진 촬영은 대결전.
리앙의 군대와 춘의 군대가 맞붙는 장면이다.
모든 배우가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촬영에 임했다. 모든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호텔 룸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원섭섭하네.”
호텔 발코니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혼잣말했다.
이렇게 영화 <블랙 리앙>의 모든 촬영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