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136화 히어로를 만나다 (3)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던 노래가 꽤 좋게 들렸는지 김남규 팀장과 최재우 이사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 방금 그거 뭐야? 네가 만든 곡이야?”
이 양반들이…… 무슨 작곡이 마음만 먹으면 뚝딱하고 나오는 자판기인 줄 아나 보다.
하긴…….
‘뚝딱하고 만들어 낸 곡으로 노래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아 온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 생각할 법도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너의 바다를 나서며」라는 노래예요.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인데 목소리가 따뜻하고 마스터링 실력이 대단하더라고요. 노래 좋죠?”
“음…… 괜찮은데? 물론 목소리 따뜻한 거야…… 널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곡을 직접 만든다니 한번 만나 보고 싶어지는데?”
김남규 팀장한테 매니저 병이 도졌나 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의 원래 소속이 아트개발실 캐스팅부였지.
나는 피식 웃으며 김남규 팀장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한테만 집중하세요, 팀장님.”
김남규 팀장은 내가 쓰고 있는 모자챙을 툭 치더니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 물론이지. 네가 이 분위기에 노래만 한 곡 불러 준다면 그 의지가 확고해질 것 같은데?”
노래 같은 거 안 불러 줘도 나한테 충실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남규 팀장은 어느 곡이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내 앨범에 수록된 노래는 아무래도…….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지. 계속 듣다 보면 질릴 수 있으니까.
아니 무엇보다 지금 이 기분으로 이 분위기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는 따로 있었다.
김남규 팀장이 평상시에 너무나 좋아하는 가수 이운세의 노래였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의 빗소리.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 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 가는 것.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잔잔해진 바다를 바라보며 김남규 팀장과 최재우 이사는 멍한 표정으로 내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두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노래가 끝나도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 가운데 김남규 팀장은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너, 요즘 연애하냐?”
“아니요. 그럴 리가요?”
“하긴…… 이사님이 어떤 분이신데, 네가 연애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김남규 팀장 말에 최재우 이사는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나는 말이야, 만일 시후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거야. 축복해 줘야지, 암! 하지만, 지금은 조금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어.”
어쨌든 연애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김남규 팀장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웃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웃고 있던 찰나, 사내 하나가 우리가 앉아 있는 벤치 쪽으로 다가와서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목소리에 발걸음이 이리로 향했네요. 아! 제 이름은 ‘빌리’라고 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방금 부른 노래가 혹시 K-POP인가요?”
갈색 머리의 미국인.
빌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얼굴에 주근깨를 한가득 달고는 씩! 웃었다.
이에 요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최고조라는 김남규 팀장이 유창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한국에서 유명한, 아주 오래된 노래랍니다.”
“아! 역시 그랬네요? 요즘 제가 K-POP을 자주 듣는데 방금 부른 노래가 꼭 한국어 같더라고요. 한국 노래는 발음이 굉장히 어렵지만, 특히 발라드를 노래할 때 한국 특유의 정서가 잘 녹아들어서 절절한 느낌이 와닿더라고요.”
청년은 김남규 팀장을 마주 보며 한국어와 한국 음악에 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는데, 그가 말하는 동안 김남규 팀장의 시선은 줄곧 그의 등에 매달린 기타 케이스로 향했다.
그것을 눈치챈 빌리는 등에 메고 있던 기타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연습용 기타예요. 제가 음악을 하거든요. 가끔 해변에서 자작곡을 부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기도 해요. 오늘도 혼자 연습 삼아 나왔다가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음악을 한다는 말에 김남규 팀장의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만일 한국이었다면, 저 청년이 한국인이었다면 당장에 한 곡 뽑아 보라며 길거리에서 오디션을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요? 기타라면 얘가 아주 끝내주게 치는데. 그런데 이 친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김남규 팀장의 손가락이 나를 향했다.
내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평온하게 표정을 지을 리가 없다.
적어도 악수라도 청했을 텐데.
나와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는데도 청년의 표정이 별 반응 없자 김남규 팀장은 빌리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는데…….
“유명하신 분인가요?”
“더 열심히 하자. 아직 멀었나 보다.”
“아, 네에…….”
뜻밖의 질문에 최재우 이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김남규 팀장은 배를 잡고 웃으며 청년에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별로 유명한 건 아닙니다. 외국 가수인데 모를 수도 있죠.”
“아……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익기는 하네요. 저는 동양 사람 얼굴을 잘 구별 못 하겠더라고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 기타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저희가 이 친구 노래를 듣던 중이었는데, 기타를 보니 흥이 돋네요.”
“얼마든지요.”
빌리는 기타 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 들자 최재우 이사가 내 등을 툭! 쳤다.
“열심히 해. 팬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야지.”
그 말에 나는 굳게 결심했다.
확실하게 홀려 주리라…….
나는 받아 든 기타를 품에 안고 기타 줄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조율을 끝나고 제대로 잡아 든 기타.
그리고 나는 손가락에 낀 엑스트라 링에 의지를 전달했다.
‘신계 6품 천운자 ‘마이클 헤지스’를 소환하고,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신 ‘에로스’ 소환.’
그러자 두 신이 내 의지에 끌려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기타 핑거 스타일의 거장은 현란한 기타 연주를 펼쳤고, 에로스 신은 용기와 희망의 기운을 널리 퍼트렸다.
청중이 달랑 3명이었지만,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지만, 기왕 노래하는 김에 제대로 잘하고 싶었다.
“오! 「I want you」. 오랜만에 듣네?”
김남규 팀장의 말마따나 내 디지털 싱글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 「I want you」의 도입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 앞에 서서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빌리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는 곧 앉은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음악을 경청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시선이 내 손가락에서 떠나질 않는다.
기타 좀 만지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핑거 스타일의 연주가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지.
핑거 스타일의 도입부 반주가 끝나자 기타 소리를 뚫고 청량하고 맑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 항상 곁에 있는 너.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의 존재는 항상 힘이 돼.
눈을 동그랗게 뜬 빌리는 기타 치는 내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내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많이 들어서 단련되었을 법한 김남규 팀장 역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저 모양이니, 당연한 건가?
에로스의 기운도 입혔겠다.
신의 축복을 받은 내 목소리를 직접 들었겠다.
그것도 바로 가까운 코앞에서 라이브로…….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빌리는 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만 짓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신의 기운을 거둬들이자 그제야 빌리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 혹시 이름이…… 주시후……인가요?”
“맞아요! 이 친구가 주시후랍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가수이자 배우죠.”
김남규 팀장은 나를 대신하여 빌리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는 잘 키운 자식을 자랑하듯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 말도 안 돼! 진짜 주시후라니! 얼굴은 못 알아봤지만, 그 노래는 잘 알고 있어요. 진짜 너무너무 좋아하는 노래예요. 제가 주시후 씨의 노래를 듣고 기타와 노래를 시작했거든요. 왕 팬입니다!! 이렇게 만난 것이 아주 꿈만 같아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제 영웅이에요!”
대학 졸업 후 취직 준비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내 노래가 큰 힘이 되었다는 빌리는 내게 음악적 영감을 받아 싱어송라이터가 되었다고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빌리와의 만남은 내게도 큰 활력소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야.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음악에 매진해야겠는걸.’
깨끗하고 선명하게 빛나는 달빛과 반짝거리는 별빛이 밤바다 위에 내려앉은 그 날
나는 누군가 히어로가 되었다.
* * *
다음 날.
왓칭 엔터테인먼트의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는 1탄 이래로 제작된 속편 영화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모두 관람했다.
그리고 『왓칭 인물 대백과 사전』까지 사서 인물 하나하나를 나노 분석까지 했다.
광팬 입장에서 영화 속 히어로를 직접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오늘은 진짜 히어로들과 영화 촬영 전 잡힌 미팅 일정이다.
<블랙 리앙>의 스토리 중 지구에 온 리앙이 히어로들에게 타리수별의 구원요청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의 촬영을 위해 각 시리즈의 주연배우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PS America 부대표이자 미국 영화 촬영 일정을 챙겨 줄 ‘짐 마틴’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곧 도착한 곳.
미국 왓칭 스튜디오의 영화 촬영 세트장 입구에 세워진 저층 빌딩.
5층짜리 건물로 안내하는 짐 마틴의 뒤에 나와 최재우 이사가 차례로 따라갔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최재우 이사의 얼굴을 보았다. 상기된 내 얼굴만큼이나 그의 얼굴도 흥분 반 걱정 반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걱정되기도 하겠지.
사실 <블랙 리앙>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배우들도 무척 많은 편이다.
영화 속 배경이 중국 태고 시절인지라 중국계 미국 배우들로 캐스팅해야 하는 이유도 한몫했다.
하지만 곧 만날 배우들은 조금 달랐다.
한 명 한 명이 이미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아니 이름만 들어도 전 세계인들이 열광할 톱스타들이다.
그중 할리우드에서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로버트 페이토’는 영화 <아이언 퍼스널>의 주인공인 ‘존 스파크’역을 맡았는데 과연 어떤 성격일지?
최재우 이사도 이런 부분을 걱정하는 듯싶다.
너무 유명한 배우들 틈바구니에서 내가 기죽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나를 인정할까? 뭐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