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132화 (132/170)

# 132

132화 두 여자 (2)

“우아! 소월이라고 했나? 피아노를 어쩜 저렇게 잘 치지?”

‘맹인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 행사가 시작되기 전,

협회에서 후원 중인 연주자들의 작은 콘서트를 보고 강화영이 하는 말이다.

연주회장에는 피아노를 비롯해 바이올린, 첼로 등의 클래식을 연주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악이나 판소리, 민요 등을 선보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기타와 베이스, 드럼처럼 실용음악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아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성인들의 참여도 가끔 눈에 띈다.

장르 불문하고 이처럼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많은 이들이 뛰어난 기량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협회에 도움을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서는 물질적으로 후원을 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재능 기부를 하는 후원자들도 꽤 많았는데, 협회에서는 후자 쪽을 더 좋아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음악가들이 돈 주고도 못 배울 레슨을 해 주는 것을 두고 협회 관계자가 이를 싫어할 리가 없다.

이렇게 음악가들의 재능 기부 덕분에 ‘맹인음악협회’ 소속 회원들은 제법 뛰어난 음악 실력을 뽐내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김소월은 여러 공연자 중에서 가장 특출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

“눈이 안 보이는데 저만큼 연주하려면 대체 얼마나 연습해야 하는 걸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워…….”

“소월이는 정말 영재예요. 그런데 연습량까지도 엄청나죠. 제가 놀랄 정도라니까요? 가끔 제가 연습에 게을러질 때면 저 아이를 보고 반성을 한답니다.”

그녀의 말에 대꾸하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와 강화영은 동시에 목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았다.

“어?”

앞머리가 없는 귀 넘긴 검은 단발머리.

낯익은 얼굴이다.

아니, 유명한 아티스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예전에 만났던 기억이 있기에 나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요. 몇 년 만인지? 그때가 주시후씨 데뷔 전이었는데, 맞죠?”

3년 전 제대하고 일거리를 찾던 도중.

나는 누나의 친구인 권철용 대표가 설립한 ‘IN 컴퍼니’의 단기 알바로 행사 MC를 맡았던 적이 있다.

Q전자 창립 기념행사.

그때 행사장에서 MC를 보며 초청 음악가로 천재 피아니스트 ‘루치오 정’을 소개했었다.

1부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그녀가 칠 피아노를 손보고 있었던 조율사가 내게 피아노를 권하지 않았더라면…… 권철용이 내게 마이크 테스트를 해 보라며 노래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가수가 되어 있을까?

아주 잠시 옛 생각에 빠졌던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를…… 기억하세요?”

3년 만에 본 ‘루치오 정’은 예전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정갈한 검정색 단발머리 머리 스타일과 하얀색 정장 그리고 금테 안경까지.

그녀는 겸연쩍은 듯 코를 찡긋거렸는데 안경이 살짝 아래로 흘러내리자 치켜들며 대답했다.

“사실, 그때 사회를 봤던 청년이 엄청난 톱스타인 주시후 씨라는 사실은 얼마 전에 알게 되었어요. 제가 TV랑 담쌓고 살고 있거든요. 나중에 알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특히 시후 씨가 피아노 연주 음원을 발매했을 때 정말 팬이 되었거든요. 아…… 그때 사인이라도 받아두는 거였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천재 피아니스트 앞에서 제가 주름잡았네요. 참! 선생님께서 소월이의 피아노를 봐주시는 거예요?”

루치오 정의 나이는 대략 40대 안팎이다.

사적으로 처음 말을 섞는 자리에 호칭이 애매해서 나는 그냥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네. 처음에는 기분 전환 삼아 협회 행사에 몇 번 참석했는데 소월이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진지하게 가르치게 됐어요. 저도 스케줄이 있는지라 진득하게 옆에 붙어서 가르칠 형편은 안 됐었고 숙제만 내 주며 종종 레슨하는 정도였는데, 소월이가 워낙 재능이 남다른지라 요즘엔 레슨 횟수를 점점 늘리는 중이에요. 가르치는 맛이 쏠쏠하거든요.”

“아, 그랬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내 말에 루치오 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내 제자인걸요. 참! 소월이가 시후 씨 얘기 많이 하더라고요. 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인연이 닿았다고. 가끔…… 한 번씩 협회 행사에 참석해 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무대 위를 보니 김소월의 피아노 연주가 방금 끝이 난 모양이다.

김소월을 마지막으로 주최 측에서 준비한 연주가 끝이 나고 이어서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은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여주인공이었던 성유라와 두 명의 주연 배우들이었다.

이들은 드라마에 수록되었던 곡을 차례로 연주했는데 반응이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으면 O.S.T 또한 덩달아 사랑받는 법이다.

배우들이 연주한 곡들은 음원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곡이라 청중들은 멜로디가 귀에 익었던지 대부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어느덧 연주가 모두 끝이 나고 행사의 진행을 맡고 있던 사회자는 잠시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맹인음악협회’의 협회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네더니 내 쪽을 힐끗거렸다.

어김없이 찾아온, 틀리지 않는 그 느낌과 함께 무대 맨 앞 의자에 앉아있던 협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주시후 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행사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위해서 재능기부를 한번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말이 좋아 재능 기부지, 무대 위에 서라는 거다.

하지만 왕년에 기부 천사라는 말도 들어본 나다.

돈이 왕창 들어도 좋은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 판국에,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화영아, 너도 왔으니까 재능 기부 할래?”

내 말에 강화영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너도 피아노 조금 친다며?”

“내가 언제?”

예전에 드라마 <왕의 신하>를 촬영하던 중 중국으로 해외로케를 갔을 때의 일인데.

전승원 PD는 내게 ‘다음번에 음악 드라마를 찍을 예정이라며 차기작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라는 의사를 밝혔던 적이 있다.

“감독님. 그 드라마에 여주는요? 생각해 놓은 배우 있으세요? 혹시 저는 어떠세요? 저도 노래는 좀 하는데요. 피아노도 칠 줄 알아요.”

그때 강화영이 이렇게 했던 말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그때 그랬잖아. 뻥이었어?”

내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강화영은 손바닥으로 내입을 틀어막았다.

“뻥이 아니라…… 여기서 어떻게 피아노를 쳐? 나는 그냥 취미로 조금 치는 정도란 말이야.”

주위를 힐끗거리는 게 아무래도.

조금 전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내려온 배우들을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들은 다 피아노 전공자들이고 내가 들어도 흠잡을 곳이 별로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연주를 해냈지만.

“너는 나랑 같이할 거니까 괜찮아. 나 믿지?”

강화영은 조금 망설이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이렇게까지 챙겼으니…… 그녀가 모르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이 틈바구니에서 소외당하는 느낌은 이제 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무대 위에 오른 강화영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다.

강화영과 내가 함께 할 곡은, 그녀가 요즘 집에서 종종 연습하고 있다는 「눈의 노래」.

내 정규 앨범 타이틀곡이다.

강화영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심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을 보낸 후, 무대 한쪽에 놓여있는 기타를 집어 들었다.

간단하게 조율을 마친 나.

마이크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자 무대 밑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거리에 하나둘씩 가로등이 켜지면, 나는 너를 기다려.

노래의 첫 소절과 함께 시작된 내 기타 연주에 맞춰 강화영의 피아노 반주도 시작되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골목길을 돌아 내게 오는 길…….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내 노래를 경청하고 있을 때 나는 강화영을 바라보았다.

못하겠다고 우는소리를 할 땐 언제고, 그녀의 연주는 제법 괜찮았다.

‘짜식…… 잘하면서 빼기는…….’

* * *

‘맹인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경매 행사.

음악가들과 연예인들의 애장품을 경매로 내놓아 수익이 난 경매금은 협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했다.

무대 위에 경매 판이 설치되고 행사 참여자들 손에 번호 판이 주어지자 본격적으로 경매 행사가 시작했다.

그런데 자선 경매 행사는 경매에 부칠 물건을 미리 기부한 후 참여자가 낙찰을 받는 것이 보통인 반면, 이번 경매 행사의 경우는 조금 색달랐다.

“자! 첫 번째 기부자는 과연 어느 분일까요?”

“저요!”

“제가 하고 싶어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손을 들고 서로 물건을 내놓겠다며 난리다.

누구든, 어떤 물건이든, 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매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머리핀부터 인형까지 아이들의 애장품이 난무했다.

그러다 일곱 번째 경매가 끝나고 나서야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말린 덕분에 이제부터는 조금 고가의, 어른들의 물건들이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여덟 번째 기부자는…… 네! 황민규 씨입니다. 무대 위로 올라오세요.”

진행자의 말에 황민규는 씩 웃으며 무대로 향했다.

그가 야심 차게 꺼내 놓은 애장품은 브라운 계열의 가죽 재킷이었다.

“이 재킷으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탈리아 여행 중에 큰맘 먹고 데려온 아이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장인이 한 땀 한 땀…… 아끼느라 여태껏 한 번도 입어보질 못했고요…… 우리 돈으로 800만 원이 조금 넘는…….”

“8만 원!!”

황민규의 장황한 설명에도 이탈리아의 유명 장인이 한 땀씩 바느질했다는 그의 가죽 재킷은 8만 원에 팔렸다.

무대 밑으로 내려온 황민규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내 재킷 불쌍해서 어쩌냐?”

“좋은 데로 갔잖아요, 형. 크큭큭큭!”

“웃냐?”

“그러게 안 입을 걸 왜 사요?”

“야!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을 했다는데 어떻게 안 사?”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순간 귓가에 다른 경매가 시작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아홉 번째 기부자는 ‘루치오 정’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가 어떤 물건을 내놓을지 모두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이것은 다음 달에 발매되는, 열두 번째 피아노 연주곡 음반에 수록될 「Sing in chorus」의 피아노 악보입니다. 이 곡은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해야 완성이 되는 곡이기 때문에 제목도 ‘합창’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저는 마음에 맞는 파트너를 만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두 파트를 혼자서 다 녹음했네요. 제가 1년간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곡인데 혼자 연주할 수 없으니 아쉽게 타이틀곡이 되지 못한 불운의 곡이기도 합니다.”

루치오 정의 설명을 듣던 강화영이 내 오른편에 앉아서 조용히 속삭였다.

“나 아까 정 선생님이 피아노 연주하는 거 듣고 완전 팬 됐잖아. 그래서 저 악보 꼭 갖고 싶네. 그런데 내가 치기에는…… 엄청 어렵겠지?”

“갖고 싶으면 일단 도전해 봐. 어려우면 내가 알려 줄게.”

“정말?”

고개를 끄덕이고 왼편을 힐끗 쳐다보는데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눈에 밟힌다.

성유라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얘도 저 악보가 되게 갖고 싶은가 보네.

아무래도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라 원작자가 직접 그린 악보가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유라야, 너도 악보에 관심 있는 거야?”

나는 왼편에 앉은 성유라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루치오 정 선생님이 직접 건네주는 악보잖아.”

성유라는 낙찰 의지가 확고했다.

하지만 나는 이때만 해도 몰랐다.

이후에 두 여자에게 어떤 출혈 사태가 벌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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