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두 여자 (1)
내 주위에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자, 이상함을 감지한 요신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급기야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요신의 움직임보다는 ‘에오스’의 응답이 빨랐다.
“아악!”
요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새벽의 여신은 함수영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에오스 님을 뵙습니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인 예를 갖추자 인상을 쓰고 있던 에오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이런 형식적인 행동을 상당히 좋아했다.
하지만 표정은 처음 등장보다 나아졌다고 하나 에오스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짜증이 가득했다.
“선인! 모이라이의 축복을 받아 놓고, 왜 나를 부르는 거야? 귀찮게시리!!”
귀찮으면 내 소통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만.
꼭 부르면 응답하면서도 괜한 심통이었다.
“모이라이 님은 제가 직접 뵌 적도 없고, 저는 에오스 님이 좋습니다.”
“그래?”
흠흠!! 헛기침하는 에오스의 얼굴에 아주 잠시 미소가 피었지만, 정말 잠시였다.
그녀는 눈앞의 함수영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홀린 것이 선인인지도 못 알아보는 어리석고 멍청한 잡신 같으니라고.”
“으악!”
에오스는 찰나 도망을 시도하려던 요신의 모가지를 쥐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선인! 이 잡것을 정화하거라.”
“네?”
“정화하라고!”
“제가요?”
잡아 놨으면 됐지, 정화까지 하라는 에오스의 말에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그냥 하라고 했다.
굳이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이유를 묻자 에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이 옳고 그름을 가려 상급 엑스트라 링의 시험을 통과하는 것까지 내가 도와야겠느냐?”
신의 반지의 오묘함을 깨쳐야 신계에 들 수 있다고 했으니 요신을 정화해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 또한 시험 일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인의 반지에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 충분히 네놈의 힘으로 가능할 것이다. 음악의 전당에서 나온 아폴론의 반지이니…… 네 목소리가 가장 큰 무기이자 정화수의 역할을 하겠구나. 신의 힘을 가진 목소리를 지녔으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신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온 신경이 저절로 반지에 집중되었다.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내 몸을 감싸자 딱히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정화에 대한 깨우침이 인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낮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오자 요신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운명의 신 모이라이에게 흑미화안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폴론의 반지의 힘을 빌려 요신을 정화시키니, 그대는 인간계를 어지럽힌 죗값을 치르리라!”
신의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은 나를 옮아 매듯 더욱 거세게 감쌌고, 그에 따라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내 말은 흡사 고드름과 비슷한 모양의 뾰족한 검은 파편의 형상을 띄고 요신에게 튀어 나갔다.
“끼야아아!! 꺄아아악!!”
소름 끼치게 듣기 싫은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요신의 온몸에 박힌 검은 파편들.
“요신의 영혼을 정화해 신계로 보내니 처벌을 부탁드립니다.”
나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고개를 숙이며 질서와 율법의 신 ‘테미스(Themis)’에게 울림으로 소통을 보냈다.
테미스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졌는지 검은 파편들은 곧 요신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신형과 함께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를 감쌌던 검은 기운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손가락에 낀 신의 반지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을 보며 나는 의식을 천천히…….
잃어가려는 찰나.
찰싹!
“아앗!”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정신 안 차려? 뒷수습은 안 할 것이냐?”
따귀를 한 대 맞고 났더니 눈앞에서 별이 번쩍거렸다.
“기운이 빠져서 그럽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헛소리 집어치우고 들어가거라.”
에오스는 내게서 등을 돌렸고, 이내 그녀의 모습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후우!!
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걸어왔던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룸 안으로 들어서자 문영호와 황민규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서 형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뭘, 뭐라고 해. 기억도 안 나는데…… 맞지. 시후야?”
“네?”
“그때 있잖아. 나랑 맥주 CF 찍고 나서 나 술 취했을 때 말이야. 내가 건무 형 촬영장에 뛰어들어 난동 부린 거.”
“아! 그때 난리도 아니었죠. 형 억지로 끌고 나오느라 창피해서 혼났어요.”
나는 대답하며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둘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평온했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았던 것 같다.
이 세상에 요신의 존재가 없어졌으니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으리라.
“후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하자면 어떻게 풀어놓아도 내가 미친놈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야! 그게 그렇게 한숨 쉴 일이었어? 인마! 형이 기분 좋게 한잔하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황민규의 말에 활짝 웃었다.
그의 이런 너스레가 다행인 것은 처음이었다.
* * *
“왜? 그래도 타던 차를 타야 편하지 않겠어?”
“아니야. 심심할 것 같으니까 네 차 타고 갈래.”
“그래?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강화영은 히죽 웃었다.
강화영은 타고 온 차에서 내 차로 옮겨 탔고, 그녀의 매니저는 내 로드 매니저인 김훈에게 주소를 받았다.
오늘 내 스케줄은 인천에서 열릴 경매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알고 강화영이 동참하기로 하여 우리 집 앞에서 만난 참이다.
좋은 뜻으로 모이는 행사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으니 그녀가 동참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사실 내가 허락하고 자시고는 필요치 않았다.
참여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자격 조건이 필요 없는 행사였으니.
‘맹인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개인 소장품 경매 행사.
경매를 진행해서 수익금은 전부 맹인음악협회에 기부하겠다는 의도로 개최된 행사다.
처음 이 협회를 알게 된 것은 꼬마 피아니스트 김소월의 영향이었다.
예전에 신인이었을 때 강화동이 MC를 맡은 「스타 메이킹」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출연 당시 아홉 살이었던 맹인 소녀 소월이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예전에도 ‘맹인음악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주회에 게스트로 참석했다.
그런데 며칠 전 문영호, 황민규와 함께 클럽에 갔을 때 뜻밖의 말을 들었다.
성유라를 비롯해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에 출연했던 배우들과 음악 전공자들이 ‘맹인음악협회’ 주최 경매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성유라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참석의 뜻을 밝혔다.
중국으로 돌아가 영화 촬영을 재개하기까지 며칠의 시간이 남아있었던 데다가 딱히 잡혀있던 스케줄도 없었고, 무엇보다 인연이 있는 협회의 행사였으니 좋은 일을 하는데 빠질 이유가 없었다.
아마 성유라가 참석한다고 하니 황민규도 무조건 올 것이 뻔했다.
드라마 카메오 출연까지 했었으니 동참할 명분이나 차고도 넘쳤다.
“네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텐데 괜찮겠어?”
성유라의 생일에 행사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문영호도 참석하길 희망했지만 이미 스케줄이 잡혔던 터라 아쉽게 함께하지 못했으므로 나는 강화영이 조금 걱정되었다.
참여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드라마를 함께 촬영하며 이미 우애가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에 숫기도 없는 녀석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다.
“괜찮아. 좋은 뜻으로 참여하는 건데 아는 사람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강화영이 씩씩한 얼굴로 야무지게 대답을 하는 모습이 당차게 보였다.
역시 마음이 참 예쁜 녀석이야.
“그리고…… 너 있잖아.”
그녀가 뒷말을 이으며 미소를 지어 보일 때.
그 모습에서 꼭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귀여움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로 손을 가져가려다가 현실을 직시하고 기지개를 켰다.
“아우! 시작도 하기 전에 피곤하네?”
* * *
“오빠!! 시후 오빠!!”
행사장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 문을 열기도 전에 차창으로 성유라가 깡충깡충 뛰며 나를 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해맑다.
“얀마, 그만 뛰어. 땅 울린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내려 성유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헤헤헤! 오빠 보니깐 반가워서 그러지.”
“반갑기는 며칠 전에 봐놓고?”
“잊었어? 나 오빠 팬 카페 회원이야! 팬은 언제나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고 싶어 한다고……아, 춥다! 들어가자 오빠!”
“아, 잠깐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때마침 강화영이 코트를 입고 차에서 내렸다.
“어? 강화영 씨?”
성유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평정심을 찾았는지 반달 눈을 만들었다.
“반가워요! 처음 뵙네요.”
“안녕하세요.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성유라와 강화영.
두 여자가 인사를 건네는 분위기가 참으로 어색하다.
가뜩이나 2월의 겨울이라 날씨도 추운데 싸늘한 분위기 때문에 한기가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와…… 너무 추운 거 아냐? 왜 다들 나와 있어? 아, 나 기다렸구나?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강화영 씨, 아니에요?”
때마침 황민규가 등장했는데 이때만큼 반가움을 느낀 것은 그를 알고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강화영이라고 해요.”
강화영은 활짝 웃으며 황민규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조금 전 성유라와 인사를 할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좀 더 나긋나긋하다고 해야 할까?
“아, 알죠! 시후한테도 영호한테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황민규도 호탕하게 웃으며 강화영에게 악수를 청하자 옆에 있던 성유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성유라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 보이는 것은,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자, 추우니까 일단 들어가자!”
내가 옷깃을 여미며 앞장서자 다들 조용히 뒤따랐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있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드라마를 찍으며 몇 개월간 함께 했던 동료들.
모두들 나와 성유라를 보고 반가움에 달려왔다.
이를 보고 강화영은 주춤거리더니 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나는 강화영이 이 상황에 어색함과 소외감을 느껴서 그러는가 싶어,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내 옆으로 바짝 당겼다.
진정한 친구 사이란 위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법.
“응?”
“분위기에 주눅 들지 말라고.”
“응.”
내 말이 힘이 되었는지 강화영은 내 옆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화영입니다.”
“어머! 실물로 보니 더 예쁘시네요.”
“잘 오셨어요. 드라마에서 보고 실제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 예뻐요.”
“선배님, 드라마 잘 봤어요. 진짜 피부미인이시네요.”
“아, 후배님. 저도 드라마 잘 봤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칭찬 일색으로 인사하는 도중,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았던 신인배우가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본 성유라는 대뜸 강화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화영 씨. 내가 더 어리지만, 내가 선배죠?”
“아, 그래요? 혹시 어느 연도에 데뷔하셨어요?”
“저는 2015년에 했는데요? 화영 씨는요?”
“저는…… 2016년도요.”
“그것 봐요! 내가 선배 맞네!”
갑작스러운 선후배 타령에 나는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황민규가 바짝 붙은 두 여자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15년이나, 16년이나. 1년 차이 가지고 무슨 선후배야. 그냥 둘이 편하게 언니 동생 해요.”
오늘 황민규가 참으로 열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