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128화 (128/170)

# 128

128화 정화하는 자 (1)

천상경을 지키는 사자의 말이 이어졌다.

“선인께서 헛것을 본 것도 아니고, 어느 신의 축복이나 노여움으로 인한 저주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인께서 끼고 계시는 엑스트라 링이 상급 각성에 들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사자의 말인즉슨, 내게 괴이한 것들이 보이는 이유가 모두 반지 때문이라는 것인데.

‘신계에서 만들어낸 반지이니 혹시 내가 본 것은…….’

“네, 맞습니다. 선인께서 보신 모든 대상은 망자의 혼 같은 게 아니라 신입니다. 사실 신의 수는 선인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 많습니다.”

다행히도 귀신은 아니란다.

그것 하나만으로는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망자의 혼을 보는 일상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 이쯤 생각했을 때 사자의 말이 이어졌다.

“원하신다면 망자의 혼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신께 요청을 드려보겠습니다.”

‘네? 아니요! 무슨 그런 요청을! 절대 필요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설명을 계속해서 드리자면 신들이 모두 신계에만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신들은 태어났건 만들어졌건 간에 모두 영겁의 시간을 살게 되지요. 해서 신들은 영겁의 삶이 지겨워지면 때로는 스스로 공허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또한, 어떤 신들은 잘못을 저질러 영원한 지하세계에 갇히는 벌을 받기도 하고, 신들 간의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인간 세상과 비슷해 보였다.

그것을 선택할 수도 강요될 수도 있다는 사자의 말에 나는 침음을 흘렸다.

사후에 신계에 오르게 되면 영생을 누릴 줄 알았더니 신도 죽을 수가 있는 거구나.

그렇게 신의 수가 줄어야 신계에서는 새로운 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00년 동안 여덟 전당에서 올라오시는 여덟 명의 선인 외에도 신계에서 태어나는 신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겁의 세월을 살고 있는 신들은 그 무료함을 달래려 자청해서 예부터 인간계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해서 때로는 인간계에 오랫동안 머물기도 하고, 잠시 다녀오기도 하지요. 아마 선인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계에서 지내고 있는 신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설산에서 보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중국에 윈난성에서 영화 촬영을 마치고 호텔에서 쉬는 도중 설산에서 보았던…… 내게 손을 흔들어주었던 여인에 관해 물었다.

사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날, 나는 최재우 이사와 함께 옥룡설산에 올라가 보았다.

내가 본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최재우 이사가 호텔 난간에 서서, 매일매일 설산을 바라보며 너무나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길면 1년이 걸릴 수 있는 촬영 기간 동안 나를 서포트하기 위해 곁에 머물러 있는 그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아, 그것은 제가 알기로는 새벽의 여신께서 웁……!!”

천상경의 사자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새벽의 여신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설마……에오스가 무슨 수작을 벌인 건가?

아무래도 낌새가 그렇다.

사자가 말을 하다가 입이 틀어 막힌 것도 그렇고.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오스 님?”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천상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음? 어? 흠흠!! 나를 찾았느냐?”

‘제게 무슨 장난을 치셨습니까?’

“어? 장난? 그것이 뭔 개소리냐? 내가 그렇게 한가한 신으로 보이느냐!!”

발끈하는 행동을 보니 분명하다.

내 눈에 신이 보이게 된 것을 이용해 장난질을 친 것이.

‘아니라면 사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 손을 좀 놓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중요한 얘기를 나누던 중이라…….’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천상경의 사자가 숨통이 트였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본분을 다하려 말을 이었다.

“제가 어디까지? 아! 선인께서는 반지의 상급 각성으로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되었고 천상경의 도움 없이 직접 소환할 수 있게 되셨지요. 그에 따라 신을 볼 수 있는 능력 또한 함께 갖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선인의 자질을 시험하는 마지막 단계의 각성 능력 때문입니다. 선인께서는 흑과 백,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신들이 종종 인간계를 어지럽히는 것을 바로 잡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사후에 신계에 올라오셨을 때 혹시 ‘정화의 신’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상경의 사자의 설명이 계속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내 방문이 열렸다.

“시후야, 자니?”

어머니였다.

굴전, 소고기전 등의 부침개와 과일까지 한가득 들고 온 어머니께서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갸웃하시더니 방문 틈으로 보이는 거실을 향해 손가락질하셨다.

“저거. 신발장 옆에 있는 상자는 뭐야? 열어 봐도 돼?”

잊고 있었다.

강화영의 생일 팬 미팅 장소에서 만난 문영호가 건넨 상자.

나를 만나면 언제든지 주려고 차 트렁크에 넣고 다녔다고 했다.

내가 없어도 뻔질나게 내 집에 드나들면서 그냥 집에 가져다 놓을 것이지.

나는 내 방에서 빠져나가 신발장 옆에 두었던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작년 ABS방송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으로 받게 된 최우수상 트로피였다.

“연말에 내가 해외에 있느라 ‘연기대상’ 시상식에 참석을 못 했잖아. 영호 형이 대리 수상해서 가지고 있었대요. 내일 집에 갈 때 가져가려고.”

“아, 엄마 아빠도 TV로 봤는데, 영호가 대신 나가서 받더라? 이게 그거구나?”

어머니는 트로피를 이리저리 돌리며 쳐다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단하네! 아이고, 우리 아들. 자랑스럽다. 금을 벌어 왔네!”

어머니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을 연상케 하는 여인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순금이었다.

* * *

놀고먹는다는 것이 딱 이런 것일까?

나는 집에서 이틀 동안 죽어라 놀고, 죽어라 먹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행복했던 본가에서의 설날 일정이 끝나고 청담동의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번 한국에서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로드 김훈이 항상 운전했는데, 이상하게도 김남규 팀장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형, 팀장님은요? 전화도 꺼 놓으셔서 연락이 안 되네요?”

내가 김훈에게 묻자 그는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 안 하고 가셨어? 미국 가셨는데?”

“엥? 언제요?”

“한참 전인데……. 보름 정도 됐을걸? 미국에서 다른 전화 쓰시거든. 번호 알려줄 테니까 한번 해 봐.”

미국에 갔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최재우 이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PS China에서 마련해 준 미국의 거주지. 내가 이곳을 비우고 중국으로 해외 로케를 떠나있을 때 김남규 팀장이 잠시 쓸 거라고 했었지.

대체 김남규 팀장이 할 일이 무엇이기에 미국에서 거주한단 말인가?

“팀장님 말이에요. 영어는 좀 늘었어요?”

한참 영어를 배운다고 학구열에 불타올라 있었던 김남규 팀장의 모습이 아른거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야아, 말도 마. 겁나 잘하셔, 이제.”

“아, 그래요?”

조금 의외였다.

중국어는 어렵다고 금방 때려치우더니 영어는 다행히 잘 맞았나보다.

잠시 후 김훈은 차를 정차시켰다.

낯익은 주위 풍경. 익숙한 집 앞이다.

‘외국살이’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기간 외국에 나갔다가 온 거지만, 몇 년 만에 보는듯한 반가운 건물이 나를 맞이했다.

“집에서 뭐 할 거야?”

김훈은 차에서 내 짐을 내려주며 물었다.

“글쎄요. 한국에서 푹 쉬다가 가는 일정이니까 일단 그냥 좀 쉬려고요.”

“그래. 혹시라도 어디 나갈 일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전화 줘.”

“이사님이 주신 차 있어요. 혼자 다녀도 괜찮아요.”

사적인 일로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정색하는 얼굴로 손사래를 친다.

“안 돼! 어디 나갈 일 있으면 무조건 이사님한테 보고하고, 나한테 전화해.”

“네, 형.”

나는 양손이 무겁게 짐을 가득 들고 건물 안으로 향했다.

짐도 꽤 많았고, 어머니가 싸 주신 음식이 한가득이었다.

김훈이 올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우겨서 기어이 혼자 들고 올라가는 길이다.

혼자 다 못 먹는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어머니는 ‘혼자 먹는다고? 너희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 몇 명인데?’ 하고 바리바리 싸서 주셨다.

그러고 보니 다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현관에 도착해서 짐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연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씨! 놀래라.”

문 앞에 문영호가 떡! 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아마 삐삐삑! 소리를 듣고 문 앞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형은 왜 여기 있어? 설날 마지막 날인데, 집에 있지 않고?”

나도 없는 빈집에 왜 들어와 있느냐는 말은 이제 필요 없다.

어차피 모두들 아지트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이제는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문영호는 내가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짐을 손에 들고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갔다가 왔지. 혹시 이거 어머니가 싸 주신 명절 음식이야? 이거 기다렸는데.”

“형 집에서 안 먹었어? 아휴…… 나는 명절 음식 이제 질렸어.”

“응. 우리 엄마는 음식 더럽게 못 하셔.” “아……. 많이 먹어.”

나는 문영호의 등을 툭 치고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진다.

누구지?

[어이, 주배우! 한국에 왔다며? 그럼 형한테 연락했었어야지.]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카메오로 출연했던 황민규의 메신저톡이다.

내가 언제는 먼저 연락했었나? 새삼스럽게.

[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짧고 간단하게 답장을 보내고 나니 휴대폰에서 바로 진동이 이어졌다.

[혹시 오늘 클럽 안 갈래? 아! 가 본 적은 있냐?]

[안 가요.]

요즘 배우들 사이에서 클럽 가는 게 유행인가?

중국에서도 영화 <블랙 리앙>의 부황 역을 맡은 ‘갈리오’가 클럽에 가자고 졸라대더니, 이번엔 황민규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데뷔전에는 친구 놈들과 종종 클럽에 가보기는 했지만, 딱히 재미는 못 느꼈었다.

재미도 없는데 굳이 갈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 때문에 시끄러워지면 뒷감당이 안 될 것이었다.

[가자! 룸 잡을 거라 사람에 치이는 일은 없을 거야.]

[안 감.]

두 번 거절 했더니 그 이상 답장이 오질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몸을 맡겼다.

그새 문영호는 본가에서 가지고 온 음식을 하나씩 꺼내 냉장고에 넣어두며 정리하고 있었다.

“형! 여기 형네 집 같다? 정리하는 폼이 아주 편안해 보이네?”

“그럼, 당연하지. 너 없을 때 어머니가 반찬 해오시면 내가 다 정리해놓고 내가 다 먹고…….”

“그래. 울 엄마 아들 하자.”

문영호가 한 손을 들어 내 말에 화답했다.

피식 웃고 있는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벨 누를 사람이 없는데?”

문영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집에 올 만한 사람들은 모두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세요?”

문영호는 현관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왜 그래? 누군데?”

내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문영호는 예의 차린 목소리를 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뵙겠습니다.”

으응?

의아함이 생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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