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놀라기는 이르다 (2)
우주에서도 아름답고 평화로운 ‘타리수 별’.
이곳 사람들의 수명은 대부분 800년을 웃돈다.
타리수 별은…… 사람들이 긴 삶 동안 무료함을 달래고자 별을 가꾸며 아꼈기에 지구의 아름다움과 비교해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는 곳이다.
그래서 다른 별 사람들은 타리수 별의 사람들을 반신(半神)으로 여긴다.
그들의 수명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들이 별을 떠나지 않고 은거하며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함 때문이기도 했다.
베일에 쌓여 있는 타리수 별의 황제 ‘제수’
제수 황제는 그의 아름다운 ‘묘’ 황후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는데, 이 황자가 바로 ‘리앙’이다.
“이 아이를 꼭 태자에 봉해주세요.”
묘 황후는 리앙을 낳자마자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져 세상을 떴다. 눈을 감기 전 그녀는 제수에게 약속을 받아 냈다.
사람들은 현 시국을 태평성대라 칭송했지만, 황권 다툼에서만큼은 그 말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 황후가 세상을 뜨고 나서, 제수 황제는 리앙을 데리고 황족 성역으로 들어갔다.
‘운명의 수정’ 앞에 태자를 각인시켜 수정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는 것.
이것은 태자 책봉에 있어 꼭 필요한 절차였다.
운명의 수정 앞에 선 제수. 그의 품에 안긴 어린 핏덩이.
운명의 수정은 운명을 점치더니 ‘리앙은 자기 몸 안에 ‘전쟁의 신’이 봉인되어 태어났다’고 했다.
3000년 만에 나타난 전쟁의 신.
제수 황제는 품속의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가 있는 이상, 이제 그 누구도 타리수 별의 위험이 되지는 못하리라.
흐뭇한 웃음이 제수의 입가에 번지려던 그때,
운명의 수정은 그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주었다.
「그 아이는 200살이 되기 전에 죽을 운명이 있다.」
통탄을 금치 못하던 제수 황제는 운명의 수정에게 방법을 물었다.
「아이의 몸속에 검은 봉인을 풀게 되면 전신과 함께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제수 황제는 ‘운명의 수정’ 앞에 리앙을 태자로 각인시키고, 아들이 시한부 운명이라는 것을 숨긴 채 만천하에 ‘전신의 탄생’을 선포했다.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으니 방법을 후에 찾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 * *
“아직 리앙의 출연 분량은…… 촬영 시작도 못 했는데, 뜻밖에 휴가네요? 쉬는 동안 다들 뭐 할 거예요?”
‘스콧 페브릭’ 감독이 오전에 촬영을 마치고 나자 모여 있는 배우들에게 물었다.
“글쎄요. 감독님은요?”
좀 전까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타리수 세계에 전신의 탄생을 선포한, 타리수 별의 황제 역의 ‘갈리오’가 되묻자 스콧 페브릭 감독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서 잠시 쉬었다가 와야 할 것 같은데요?”
감독의 말에 갈리오는 눈을 큼지막하게 뜨며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과장된 모습이었는지 ‘근엄, 진지했던 조금 전의 황제는 어디로 갔나?’하고 싶을 정도다.
분장은 아직 황제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는 그 촬영 중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와우!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메이킹 카메라가 저렇게 찍어 대고 있는데 말이에요. 설마 감독님! 카메라를 의식한 대답은 아니겠죠?”
“아닙니다! 저는 사랑하는 제 와이프와 딸이 보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어요.”
갈리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메라에 고스란히 찍히고 있으니 말을 말자는 표정이다.
그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35세 안팎인 것은 확실하다.
“리앙은? 걸프렌드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나와 같이…….”
중국계 미국 배우인 갈리오는 아직 미혼이었는데, 이번 휴일 동안 중국 남부 곳곳의 클럽을 섭렵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여자 친구는 없지만, 집에는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 마이 갓! 이번에도 사랑하는 가족들인가?”
갈리오가 한 손을 들어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할리우드 액션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가족들도 보고 싶지만, 친구들도 그리워서요. 이번에 한국에 가면 영화 촬영이 끝나기 전에는 또 언제 갈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케이! 케이도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죠?”
‘타케우치 케이’는 내 물음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배우들이 긴 휴일 동안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집’은 그 한 단어만으로도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곳이 틀림없다.
제작진과 촬영 스텝들 또한 잠깐이나마 고국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촬영 중 장소 이탈 시에는 본인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PS China에서 통 크게 항공권 비용을 결제하기로 한 덕분에 모든 사람들은 원하는 휴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촬영 도중 긴 휴일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영화 <블랙 리앙>의 중국 윈난성에서의 해외 로케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 중이었다.
그런데 영화의 전반부를 찍고 나자 한 가지 문제가 닥쳤다.
중국의 설날.
중국에서는 최대로 큰 명절로 치며 춘절이라 불렀는데, 그 기간은 음력 1월 1일부터 대략 십여 일간 지속하였다.
한국에서 3, 4일 쉬는 설날과 비교했을 때 몹시 긴 기간이다.
이때의 중국에서는 회사, 기업, 상점 할 것 없이 대부분이 휴무였는데 <블랙 리앙>의 촬영 팀에게는 이것이 문제였다.
중국 위난성 촬영장에서는 스태프 절반이 현지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스콧 페브릭 감독은 흔쾌히 휴가를 내주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데 별수 없지 않은가.
차라리 가족들의 품에서 잘 쉬고 다시 모여 촬영하는 것이 오히려 촬영할 때 높을 효율을 낼 것으로 생각했다.
올해의 춘절 기간은 11일.
해서 모두에게 11일간의 긴 휴식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네 말대로 비공식 입국할 거지만 이미 정보가 다 세서 공항에 팬들이 마중 나올지도 몰라.”
숙소로 돌아온 내게 최재우 이사는 선택권을 주었다.
“VIP 터널로 조용히 나갈래? 아니면 공항에서 팬들 얼굴 한번 볼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내일 오전 비행기라고요? 그거 미룰 수 있어요?”
“왜? 남아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너! 혹시! 갈리오와 클럽에 가기로 한 건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내일은…….”
내 계획을 듣더니 최재우 이사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렇게 하자!”
* * *
[할리우드에 진출한 가수 겸 배우 주시후의 한국행이 사실상 불발되었다. 예약해 두었던 항공권도 취소한 것으로 알려져 기다리던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는 가운데, 이번 설날 기간 고국을 방문하지 않는 주시후의 향후 일정에 대해 귀추가 주목된다.]
“시후 오빠는 안 오나 봐.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동남아권 배우들은 대부분 오늘 낮에 모국에 도착했대. 공항 인증 샷이랑 기사가 엄청나게 올라오더라.”
“그럼 시후 오빠는 한국에 안 들어오고 중국에 있는 거야? 에이. 얼굴 한 번만 보게 한국에 와 주지.”
나란히 앉아서 휴대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리던 세 명의 소녀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은 비단 세 소녀에게서만은 아니었다.
200석 규모의 작은 홀.
무대를 바라보며 길게 늘어앉은 소녀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조금 전 인터넷 연예 뉴스에 뜬 기사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순한 마음으로 여기 온 거면 그냥들 가지? 다들 꼭 뭘 바라고 온 것처럼 보이잖아!”
꽉 채운 객석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안경을 낀 야무지게 생긴 여자가 주위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를 냈다.
주시후의 팬클럽 ‘주슈’의 부회장을 맡은 ‘박영심’.
그녀는 주슈에서 서른 명 정도 되는 인원을 데리고 생일 팬 미팅에 참석한 참이다.
박영심의 말에 주위의 술렁거림이 싹! 하고 사라졌다.
원래 안경 뒤로 보이는 눈매가 사나운 탓에 팬클럽 내에서도 무서운 언니로 통하는데, 심지어 부회장을 맡은 2인자다.
그녀의 눈 밖에 났다가는 팬클럽은 둘째 치고 팬 카페에도 발을 못 붙일 것이 뻔했다.
또한, 평상시에는 말없이 과묵한 성격인데 한번 화를 냈다 하면 회장인 강소미도 못 말릴 지경이었다.
아니! 안 말렸다.
박영심이 화를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딱 그랬다.
“시후 오빠가 친구들에게 엄청 의리 지키는 거 알지? 그럼 시후 오빠가 없는 자리에선 우리가 대신 의리를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못마땅하면 군소리 말고 지금 다 나가!”
박영심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리스마 있게 장내 분위기를 휘어잡고서는 옆쪽에 앉아있는 타 팬클럽 회원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팬클럽 아이들이 주객전도하였고, 이 때문에 분위기를 흐려 죄송하다는 사죄의 의미였다.
“괜찮아요. 주슈에서 도와주시고 참석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요.”
주시후, 조연석, 강화영, 한동하, 진국, 정해수, 문영호 등등.
이들이 서로 절친임을 잘 알고 있는 팬들은 각종 행사나 팬 미팅에서 언제부터인가 서로 품앗이를 해 왔다.
행사 준비부터 진행까지 모자란 부분은 서로 채워주고 도우며.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들처럼 팬덤끼리도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한편, 팬 미팅 대기실에서도 우정을 나누는 다정한 소리가 이어졌다.
“시후는 한국에 안 오나 봐요?”
“이야…… 서운하다, 너? 옆에 있는 우리보다 한국에 있지도 않은 녀석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어떻게 해 그럼. 네 생일이고 나발이고 그냥 가?”
조연석이 너스레를 떨자 강화영이 손사래를 쳤다.
오늘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이 팬 미팅의 주인공은 한국의 톱클래스 여배우, 강화영이다.
“아니요! 오빠, 무슨 그런 말씀을!”
조연석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풀렸는지 씨익! 하고 웃었다.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도, 모르긴 몰라도 아마 스케줄이 꽉 차 있을걸? 워낙 바쁜 몸이잖아.”
“그건 그래. 그리고 만일에 한국에 들어왔다면 김남규 팀장님이 제일 신나서 마중 나간다고 하셨을 텐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잖아.”
문영호까지 한마디 거들자 강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기실을 한차례 둘러보던 그녀는 아까부터 진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국 오빠는요?”
“진국이는 무대에 올라갔을걸? 잊었어? 오늘 진행 맡았잖아.”
“아…… 그랬죠. 아까부터 같이 수다를 떨었던지라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진국 오빠는 Q시트 한 번도 안 들여다보고 무대에 올라간 거예요?”
“야야! 연습은 무슨……아마 큐시트 없이도 잘만 진행할걸? 진국이는 가수보다 MC 체질인가 봐.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애드리브로 잘 치고.”
예전에 주시후의 생일 팬 미팅 때 진행을 맡아 본 적이 있는 진국.
현재 음악프로그램의 MC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강화영 생일 팬 미팅 때에도 MC를 자청해, 지금 무대 위에서 진행하는 중이다.
“시후랑 동화, 그리고 설아까지 못 와서 좀 아쉽기는 하지만, 대신 우리가 생일 축하 많이 해 줄게.”
조연석의 말에 강화영이 환하게 웃었다.
“화영 씨, 지금 무대에 올라가셔야 해요.”
진행 요원이 강화영을 데리고 대기실을 나섰고, 진국의 주인공 소개를 끝마치자 그녀는 무대 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