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미국행 (1)
“시후 씨?”
자오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며 시야가 환해지는 걸 느꼈다.
여기가…… 어디?
아! 고스트 자오의 서재에 발을 디디고 나서 눈앞에 캄캄해졌었는데.
분명 내 몸이 옆으로 기우는 걸 느꼈었는데, 지금 나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왜 그래요? 안 들어오고?”
나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상황 파악 중이었다.
자오린은 앞서 걷다가 뒤로 돌아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내 팔뚝을 꽉! 하고 잡는 자오린의 손길에 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 괜찮습니다. 잠시 현기증이 나서요. 들어갈까요?”
자오린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자오팅쿤’. 신명 고스트 자오.
그의 서재는 꽤 넓긴 했으나 평범해 보였다.
오래되었지만 잘 정리된 방안의 중앙에는 손때가 탄 책상이 중심을 잡고 있었다. 햇살을 한번에 받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창문 앞이었다.
양쪽 벽면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책장들. 그 안을 가득 채운 책들.
특이한 점은 없었다.
“여기가 증조부님께서 잠들어 있다는 곳입니까?”
나는 책장 안을 가득 채운 고서들을 훑어보며 자오린에게 물었다.
이 집, 저 집의 서재라는 곳을 본 경험이 거의 없으므로 다른 서재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별다른 것을 감지 못한 나는 그저 다른 서재들과 비슷하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특이한 점을 찾으라면 오래된 고서가 많이 보인다는 것.
아무래도 신계의 선인이었으니 고대사에 관심이 많았겠지.
“그것은 비밀스러운 공간 안에 있어요. 서재에는 황 아저씨나 메이드 분들도 출입하시니까요.”
자오린은 고서를 둘러보고 있는 내 옆으로 붙어 서더니 내가 훑어보고 있던 책장에서 고서 대여섯 권을 뽑아 들었다.
“아…….”
책장에서 책 몇 권이 뽑혀나가자 비어있는 공간으로 작은 센서가 드러났다.
자오린은 망설이지 않고 센서에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삐리릭!
경쾌한 인증 멜로디와 묵직한 기계음이 함께 섞여서 들려왔다.
‘대단한걸? 집 안에 이런 장치라니…….’
책장이 옆으로 저절로 밀려나며 비밀 공간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나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오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후 내게 고개짓하며 안으로 먼저 진입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것을 확인한 나는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또 뭐가 있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감이었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서자 자오린은 제일 먼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으응? 뭐가 별로 없네요?”
5평 남짓한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고스트 자오의 사진과 커다란 금고 하나가 다였다.
“그렇게 보여도 이 금고 안에는 향후 우리 ‘자오’ 가문에서 해야 할 일과 손대지 말아야 할 일이 자세하게 적힌 파일들이 들어 있지요. 비밀 파일이니 그것까지 보여드리기는 힘들 것 같아요. 아! 제가 시후 씨와 여기에 함께 온 이유는…….”
말을 하다 만 자오린이 벽에 걸려있는 증조부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 좀 보실래요?”
저택의 입구에 걸려있는 초상화와 다를 바 없는 고스트 자오의 사진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서 본 것은 초상화였고, 이것은 사진이라는 점?
물론 느끼는 바가 다르긴 했다.
반지가 각성하기 전에는 그저 자오린의 증조부였다지만, 엑스트라 링의 상급 각성을 도와준 감사한 신이었으니.
조금까지만 해도 한 공간 안에 있었는데 사진으로 다시 만나니 왠지 모르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내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돌았다.
“증조부님의 사진이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이분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한번 들여다보실래요?”
“반지요?”
생각지도 못했다.
자오린이 증조부 손에 낀 반지에 관심을 둘 것이라고는.
하긴. 그도 살아생전 재물의 성전의 선인이라 신의 반지를 끼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자오린은 왜 이 반지에 관심을 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부터 내 반지에 유독 관심은 그녀였다.
나는 고스트 자오의 사진 속에서 빠르게 반지를 찾아냈다.
내가 끼고 있는 엑스트라 링 외에 다른 신계의 반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보면 그저 흔한 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신이 내린 선인의 반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지의 보석 색깔은 검정색.
고스트 자오는 상급 각성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의 흑색 보석을 감싸고 있는 은은한 검은 기운.
그것은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더러는 보석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사진이었지만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는 흑기를 보며 내심 깜짝 놀라고 있을 때.
“역시…… 시후 씨 눈에도 보이나 봐요?”
“네?”
자오린이 흑기의 움직임을 봤을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것은 신계의 반지이며 전당의 주신들이 발탁한 선인들의 증표다.
일반인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반지의 기운이 자오린의 눈에는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저희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 사진을 보며 그냥 평범하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 눈에는 조금 달랐거든요. 생명력이 느껴진 달까?”
어떻게 자오린이 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몹시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신계의 반지라고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저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뭐가 보인다는 거죠?”
내 질문에 자오린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다.
“시후 씨 손가락에 낀 반지에서도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는데 모르는 척하시겠다? 어? 보석의 색깔이 바뀌었네요? 참……신기하게도?”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확신했다.
보통 사람들은 반지의 보석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찬란하고 영롱한 하얀색 보석으로 보일 것인데.
신의 반지를 알아보는 인간이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나려던 그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쯧쯧! 선인이라는 놈이 그 정도에 놀라기는……. 그 아이는 ‘재물의 성전’에 특별히 마음을 쓰고 있는 인간이라고 하더구나. 그 인간의 눈에 반지 기운이 보이는 게 어쩌면 선인으로 발탁될 수도 있겠어?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훗날의 이야기이니 그 인간에게 잘 둘러대거라.”
‘아, 에오스 님!’
큰일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내게 울림을 보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것도 참으로 희한했다.
천상경을 통한 울림은 보통 귓가에서 공명되어 들리던데, 오늘은 왜 머릿속이란 말인가?
마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말이 떠오르는 것처럼…….
“모르느냐? 상급 각성을 하게 되면 신과 바로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쯧쯧쯧! 천상경의 사자 놈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네놈의 머리가 아둔한 것이냐?”
‘예전에 천상경의 사자님께 깨우침을 받은 바는 있습니다.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지금이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저도 앞으로 천상경을 거치지 않고 신계의 신들과 바로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하지만 신들이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지. 선인의 부름에 답을 할 만큼 신들은 한가하지 않거든. 대신 신을 소환하는 데 있어서 앞으로는 천상경을 통한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신들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태초 티탄신과 여덟 주신을 비롯한 신족이 아니라면 신계 품계 3품인 ‘신혜’까지는 네놈의 부름에 끌려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1·2품의 신들은 신족들도 부리기 까다로워 하는 신성들이라 소환은 어렵겠지만 혹시라도 그들의 능력을 빌리고 싶은 날이 온다면 소통이라도 해 보거라.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주절주절 네놈에게 떠들고 있는 것이지?”
‘감사합니다! 에오스 님!’
앞에 세워둔 자오린을 바라보며 나는 다급하게 에오스의 말을 잘랐다.
아니나 다를까?
자오린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왜 말이 없죠?”
나는 자오린을 향해 활짝 웃으며 되물었다.
“듣고 싶은 대답이 무엇입니까?”
자오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무엇을 어떻게 물어볼 것인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시후 씨가 출연했던 한국 고전 드라마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때에도 시후 씨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던 게 맞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라마 <왕의 신하>를 촬영할 때 사극이라는 콘셉트에 맞지 않는 이 반지가 꽤 골칫거리였는데 다행히 손목까지 덮는 의상이라든가, 손가락 테이핑으로 감출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볼 때 시후 씨의 주위로 노란 기운이 몰려드는 것을 본 적 있어요. 그때는 내 눈을 의심했죠. 그런데, 무대에 선 당신을 보고는 알게 되었죠. 저것은 증조부님의 사진을 보며 느꼈던 반지 기운이라고 말이죠.”
자오린의 디테일한 설명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답니다.”
“시후 씨에게 지금 당장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곤란하다면 앞으로 이 이상 캐묻지 않을게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따지고 들면 어찌 대답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오린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시후 씨가 처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제가 당신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처음 봤을 때! 그때부터 저는 항상 당신의 편이었어요. 한국지사인 ‘PS 미디어플랫폼’에서 드라마 <왕의 신하>에 투자를 하게 된 이유도 당신 때문이랍니다. 그러니, 언젠가 제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진실만을 얘기해 줘야 합니다.”
“약속하죠.”
* * *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조금 전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온 나와 최재우 이사는 PS America에서 보낸 차를 타고 현재 이동 중이다.
“1시간은 족히 가야 하니 조금 쉬세요.”
전에 뉴욕에서 우리 일행을 수행했던 ‘짐 마틴’이 마중 나와 있었는데, 알고 보니 PS America의 ‘Deputy CEO(부대표)’란다.
“그럼 조금만 쉴게요. 역시 공항에 많은 인파가 몰리면 피곤하네요.”
최재우 이사와 함께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 때 마주한 팬들과 기자단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한국이나 중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교포들이 많이 사는 LA였기 때문일까?
한인 방송국의 카메라와 인터넷뉴스의 기자들, 거기에 수많은 한국 팬들이 서로 엉겨 쉽사리 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역시 그렇죠? 미국에서도 드라마 <왕의 신하> VOD서비스 이후, 시후 씨의 인기가 급상승 중이라 제가 경호원을 배치해 둔 것이랍니다.”
PS America의 경호원들이 없었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동의한다.
어쩐지…… 많은 팬들이 마중 나와 주었지만,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이 좀 많은 듯싶었다.
나는 짐 마틴의 말에 한시름 놓았다.
그래도 다행히 완전 무명은 아니구나.
[미국 왓칭 스튜디오의 영화 촬영 세트장]
앞으로 이곳에서 <블랙 리앙>의 촬영 준비가 있을 예정이다.
본 촬영의 대부분은 ‘타리수 별’ 촬영장인 중국 윈난성에서 하겠지만, 다른 히어로들이 잠깐잠깐 등장하는 장면에 꼭 필요한 세트장이 이곳 LA에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크랭크 인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그동안 LA에서 대대적인 대본 리딩과 액션 스쿨의 수업이 있을 예정이다.
촬영은 나중 이야기고, 지금 나는 LA의 도심가를 달리며 내 눈 앞에 펼쳐진 멋들어진 창밖 풍경에 심취해 있다.
“바로 이곳입니다. 시후 씨가 머무를 집이요.”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짐 마틴’은 행인도 별로 보이지 않는 조용한 주택가 한곳에 차를 세웠다.
나는 차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시작되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새로운 도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