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화 준비가 끝났다 (4)
“으응? 여긴 어디지?”
꿈속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자오린의 뒤를 따라 그의 증조부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은 내가 아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면증이 생긴 것도 아닐 테고.
더군다나 잠의 신 힙노스의 축복을 받은 이후로는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내 의지대로 할 수가 있었으니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나와 내가 서 있던 공간을 집어삼킨 검은 연기.
내가 생각했을 때 그것은 어둠의 기운이었다.
예전에 중국 인촨에서 폭탄 테러를 당했을 때 암흑의 공간 속에서 본 적이 있는 그런 기운이었다.
지하 세계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 하데스의 사자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몰고 왔던 칠흑 같은 어둠.
‘허! 그럼 내가 또?’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에 봉착한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이번에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외부에서 충격을 받았던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난 조금 전까지 철옹성 같은 ‘자오’ 가문의 저택에 있었는데.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있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내가 누워 있는지,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조차도 모를 일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며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던 나는 결국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될 대로 되라지.’
어둠 속에 갇힌 채로 마치 한 달이나 지난 듯했기 때문에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실제로는 누웠는지 엎드렸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 이쯤 되면 뭐라도 나 와야 하는 거 아냐?! 귀신이든 악마든 저승사자든 나오라고!”
나는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신병 걸리기 딱 좋은 어둠이었다.
그때였다.
“보기보다 인내심이 없는 인간이군.”
어둠 속 저편에서 나지막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륜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였는데, 내 추측이 맞는다면 분명 노인일 것이다.
“그대가 ‘음악의 성전’에 발탁된 선인인가?”
사내의 말이 끝나자 허공에 새하얀 점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점점 커지며 처음에는 주먹만 하게, 그리고 축구공만 하게 커지더니 이윽고 방문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그 순간 쾅! 하고 공간이 흔들리며 파앗! 하며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 눈부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어쩌면 그 통증은 눈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궁금하겠지? 눈을 한번 떠 보거라.”
나긋한 목소리가 고막에 전해지자 온몸을 들쑤시던 진동이 조금씩 사라지고 마음에도 평정심이 생기는 것을 느낀 나는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누구십니까?”
나와 노인은 새하얀 빛 구체 안에 서 있었는데, 구체 밖은 사방팔방이 새까만 어둠 속이다.
흡사 그것은 어둠이 빛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다.
나는 앞에 선 노인에게 물었다.
사실 노인이라고 하기엔 좀 젊었다.
나는 그의 나이가 60대 정도일 거로 추측했다.
“나? 자네가 발을 들여놓은 방의 주인이지.”
노인은 마치 중국 고전 의상과도 같은 소매가 넓은 하얀색의 옷은 입고 있었다. 소매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 들었다.
‘영패?’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신계의 품계를 나타내는 신분패였다.
노인은 그것을 내게 잘 보이게끔 앞으로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계 품계 6품의 천운자라네.”
음? 이 방의 주인이…… 자오린의 증조부가…….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후손들을 위해 몇백 년 후까지의 안배를 해놓은 비상한 두뇌를 가진 사업가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번뜩하고 떠올랐다.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으로 뛰어났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노인은…….
“나도 한때는 ‘재물의 성전’의 선인이었지.”
그랬다.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었다 싶었는데,
엑스트라 링이 상급 각성을 할 때, 천상경을 지키는 사자가 내게 깨우침을 전달한 적이 있다.
그때 신계 6품 천운자의 리스트를 훑어보며 얼핏 보고는 지워 버렸던 이름.
재물을 지키는 신 ‘고스트 자오’였다.
내 앞에 있는 존재는 어둠으로 공간을 잠식시킨 악마가 아니라 빛으로 뚫고 나온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도 안도하듯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천천히 서 있는 공간을 다시 훑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려는 결계인 듯 우리를 감싸는 빛은 구체 안으로 침범하려는 검은 기운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를 보던 나는 의아해 했다.
“마치 지하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가 본 적은 없지만 ‘하데스’의 지하 세계가 딱 이런 분위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고스트 자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각성 구의 인일세. 자네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은 그 엑스트라 링의 상급 각성을 위해 신계에서 준비해 둔 필연적 만남 때문이지.”
나는 왼손 검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찬란하고 영롱했던 노란색의 보석이 점점 그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게 왜, 왜 이러죠?”
‘고스트 자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나도 반지가 상급 각성에 들기 전에 그랬던 기억이 있으니……. 그나저나 나는 원래 머리가 좋아서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손대는 사업마다 승승장구했기에 재물의 성전의 선인으로 발탁되었다만, 자네는 얼떨결에 주웠다지?”
“아, 예…….”
그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주눅이 들었다.
내 표정에 무안함이 여실히 드러났던지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자네는 그 여태껏 선인으로 발탁된 그 어떤 인간들보다도 반지의 능력을 아주 옳게 잘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
그것은 신들의 세뇌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처음부터 선인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었지만, 신들을 만날 때마다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것이 ‘선인의 덕목’이다.
선인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지키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행복을 안겨 주며 그들의 위험 앞에서 나를 희생하며…….
“그래. 그런 것들 말이야.”
‘고스트 자오’는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껏 해 온 일들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반지가 상급 각성에 들게 되면 선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겪게 된다네. 자네는 상급 각성한 반지의 보석 색깔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검은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고스트 자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다면 왜 어둠의 상징인 흑색인지도 알고 있고?”
그것까지는 알 리가 없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흑색은 혼돈을 의미한다네. 보석 색깔이 흑색으로 변하는 이유는……상급 각성에 접어든 반지 때문에 선인들은 그때부터 시험에 빠지게 된다네. 혼돈 속에서 말이야. 만일 자네가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그 관문을 넘을 수 있게 된다면 자네가 끼고 있는 엑스트라 링은 저절로 손가락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야. 신계로 입성하는 거지. 하지만 반대로 혼돈의 벽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말을 멈춘 ‘고스트 자오’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한가득했다.
혼돈? 그것이 무엇이기에, 얼마나 무서운 시련이 내게 닥칠 예정인데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이니 오늘은 오늘의 일을 하도록 하지.”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고스트 자오’가 나를 각성 구 안으로 소환한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내가 어떤 것을 알아야 한다든가, 무엇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신계의 여덟 주신이 자네에게 나를 보낸 이유는, 반지의 상급 각성 때문이지. 경험치가 잔뜩 쌓여있는데도 상급 각성에 들지 않아 특히 음악의 전당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나는 자네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도록 ‘운명의 신’ 모이라이 3자매가 엮어 놓은 인연이지.”
반지가 중급 각성을 했을 때는 첫 앨범을 녹음했던 순간이다.
그때, 나 스스로 뭔가 얻은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항상 행복해질 수 있는 좋은 음악을 만들기를 바랐었지.
이번에도 역시 깨달음이 있어야 했던 건가?
“진정한 선인이라면 흑백, 옳고 그름, 선악을 가릴 수 있어야 하지. 그래야 혼돈의 벽을 깨고 신계에 올라갈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을 테니까. 신계에서 원하는 신이 그런 거거든.”
‘고스트 자오’의 말을 듣던 나는 속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 신들이 그렇게 무자비해?
나를 바둑알처럼 이리저리 옮겨 두는 아폴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첫 대면에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고 했던 에오스의 인격이 백이고, 선이고, 옳음이란 말인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스트 자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태생이 신이라 안하무인 하시지. 그분들께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네. 이미 셀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신으로 살아오신 분들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네. 우리는 애초에 선으로 태어났지. 신계에서 선한 신을 원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에서 포함되어 있어. 선악 구별이 없는 신들만 세상에 가득하다면 그것이 하늘이겠는가? 지옥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행동이었다.
그들에게는 삶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되었고, 그때 인간은 만들어지지도 않았다고 했지.
신 중에서도 태초의 신들과 신족들은 그 자존감이 얼마나 높을지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자네가 가진 재능은 보잘것없었네만, 인간을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할 줄 아는, 선과 옳고 그름을 모두 갖춘 자가 아닌가?”
‘고스트 자오’는 당연한 말을 저렇게 했다.
생명의 가치와 위대함은 나 말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그뿐만 아니라 자네는 음악의 전당의 반지를 가졌지만, 음악 신들의 능력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에로스의 능력을 더 많이 사용했지.”
“그거야…….”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인간들에게 기쁨과 용기, 희망을 널리 전달하는데 에로스의 능력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을 테니.”
그랬다.
노래할 때도 연기할 때도.
나는 감정, 감성, 정신을 지배하는 신 ‘에로스’의 능력을 많이 사용했다.
물론 사심을 채우고자 했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상에 나를 알리려면 먼저 유명해져야 했고,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매력이 필요했다.
시작은 그랬지만, 여러 사람들이 내 노래를 내 연기를 좋아하게 되자 슬슬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다.
위축된 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고, 절망 앞에 선 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나 역시 그걸로 족했다.
생각해보니 인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자네는 앞으로…….”
‘고스트 자오’는 내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곳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 노래를 듣고 기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내 연기에 감탄하는 사람들과 내가 구한 사람들.
트럭에 치일 뻔했을 때 내가 구했던 아이, 중국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에서 내가 구했던 샤오비.
수많은 얼굴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돌아다녔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때의 감정이 온몸에 고스란히 전해지며 온몸의 털들이 쭈뼛하고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 주위로는 서서히 검은 연기가 몰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