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준비가 끝났다 (2)
‘누구지?’
열린 운전석 창문 쪽을 향해 내게 말을 거는 사내.
강한 궁금증이 밀려오는 것과 함께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강화영의 집 대문을 열고 나왔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일 것이다.
어쩌면 삼촌일 수도 있겠지만, 이목구비가 닮은 것이 분명 가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것은 사내의 눈총뿐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정교육은 잘 받았나 보구만. 예의는 있는 것을 보니?”
“아, 예…… 감사합니다.”
“그래도 나는 반댈세.”
다짜고짜 반대한다는 말에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네?”
그러자 사내는 뭐가 못마땅한지 혀를 끌끌 차며 또 한 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남자가 말이야. 좀 체격도 우람하고 보기에 듬직한 맛도 있어야지, 예쁘장하게 비실비실 생겨서는 원! 자기 여자는 둘째치고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겠냐는 얘기야.”
지키는 거야, 잘할 수 있죠.
그런데 누구를요? 설마 강화영을요? 제가 왜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위로 솟구쳐 올랐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 오해를 풀어드리려 한마디 하려는데 마침 대문이 열리며 강화영이 밖으로 나왔다.
“어? 아빠? 왜 나와 계세요?”
역시 강화영이 아버지였다.
강화영은 잰걸음으로 걸어와 나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에 섰다.
내 얼굴과 부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는다.
“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시후와는 그냥 친구 사이예요.”
강화영이 아버지에게 팔짱을 끼며 매달리자 그녀의 부친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역시 애교떠는 딸에게는 약도 없다는 옛말이 딱 맞다.
“그래? 이 녀석이 그 녀석 아니야? 네가 매일 같이 출연했던 드라마 틀어 놓고, 그 녀석이 부른 노래라며 항상 흥얼거리던…… 아니야?”
“제, 제가 언제요?!”
“집에 있을 땐 항상 그러잖아. 맞는데? 그 주시후라는 녀석? 자네가 주시후 아닌가? 우리 딸 남자 친구.”
강화영의 아버지가 내가 물었다.
“네. 제가 주시후가 맞기는 한데……남자친구는…….”
“아니예욧!!”
“흠흠!! 아니면 말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화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헛기침을 연신 내뱉던 그녀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네는 운동을 좀 해야 하겠는데?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좀 하게.”
“아빠! 시후한테 운동이라뇨. 무술 감독님이 인정한 무술 천재예요. 그리고 쟤 복근이 얼마나…….”
“뭐야? 너 저 친구랑 그런 사이인 거야? 알몸을 봤어?”
“아, 아뇨! 드라마에도 나와요. 상반신 탈의한 거.”
“아 그래?”
두 부녀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버지의 착각과 강화영의 변명.
강화영이 집에서 대체 뭘 했기에 아버지가 단단히 오해하셨을까?
“자네 군대는 다녀왔나?”
“네, 다녀왔습니다.”
“흐음……. 곧 미국에 영화 찍으러 간다던 그 녀석이 자네 맞지?”
“네. 그게 저입니다…….”
“어쨌든 나는 장거리 연애도 반댈세.”
나도 아직 딱히 연애할 생각은 없다.
아니, 생각이 있으면 뭣하나? 시간이 없는데. 무엇보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아, 예. 알겠습니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강화영이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빠! 저희 가요. 시후야, 가자.”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강화영은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강화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침묵이 어색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 그랬어?”
내 질문에 강화영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되묻는 그녀에게 나는 다시 말했다.
“집에서 만날 그랬냐고 묻…….”
“아니얏!!!”
곁눈질하며 나를 힐끗거리던 그녀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 * *
인천 국제공항.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벌써 소란스럽다.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몰려온 이유에서다.
“우와……이거 뚫을 수 있을까요?”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김남규 팀장에게 물었다.
내 출국 소식에 평상시보다 더 많은 팬들이 배웅 나왔는데 인산인해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릴 정도였다.
“안 되는 게 어디 있겠냐? 가면 가는 거지.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은 저렇게 하지만 김남규 팀장의 표정을 딱 보아하니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그러면 그렇지.
갑자기 공항 안쪽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인파가 둘로 나뉘어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가장 안쪽에 내 팬클럽 ‘주슈’의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역시 강소미! 길 터 주는 실력 봐라! 진짜 대단한 회장님 아니냐?”
“그러게요. 항상 소미의 도움을 받네요.”
“그거 알면 미국에 가서도 가끔 팬 카페에 사진도 올려주고 글도 좀 써 주고 그래.”
“넵! 길 다 텄네요. 가요! 팀장님.”
차에서 내려서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를 붙잡거나 막아 세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따라다니는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연예부 기자들도 그동안 강소미의 활약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들 ‘주슈’가 사고 예방 차원에서 이런 질서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너무나도 반겼다.
요즘엔 타 연예인의 팬클럽에서도 많이 따라 하는 추세였고.
반으로 갈라진 길을 걸어가며 나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팬들의 손에 들려있는 피켓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모인만큼 피켓의 내용도 더 다양하다.
대부분 건강하게 국위 선양하고 다녀오라는 내용이었는데, 간혹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글귀들도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도 하드캐리’라든가.
‘그레이스 류한테 눈길도 주지 마세요!’라든가.
‘그레이스 류’는 영화 <블랙 리앙>의 히로인이다.
그녀의 국적은 홍콩이었고, 내가 <블랙 리앙>의 오디션을 보기 전부터 이미 여주인공으로 확정되어 있던 배우다.
극 흐름을 보면 그리 많은 컷에 출연하지 않지만, 비교적 출연 빈도가 높은 캐릭터다.
이를 알고 있는 팬들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하는 말이다.
“시후 오빠! 건강하게 다녀오세요!”
“잘 다녀오세요!”
“저희를 잊으시면 안 돼요!”
사방팔방에서 들리는 응원소리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잘하고 올게요! 추우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 * *
“대략 언제쯤일까?”
의자를 끌어다가 앞에 놓고 앉아, 천상경을 내려다보던 새벽의 여신 에오스.
그녀는 손등으로 괴고 있던 턱으로 천상경을 가리켰다.
“글쎄요. 확실치는 않으나…….”
에오스의 등 뒤에 서 있던 음악의 성전의 주신 아폴론.
그는 에오스의 물음에 답을 하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대신 그의 왼쪽 손바닥을 쫙! 피며 허공에 있는 기운을 한곳에 응집시켰다.
허공에서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생겨나기 시작한 빛.
이것은 서로 엉겨 붙어 아폴론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그러더니 그곳에서 파앗! 하고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폴론은 각성 구의 성공적인 소환에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 위에 생겨난 빛 구체를 들여다보았다.
찬란하고 영롱한 노란색 구체.
그 안에는 보기만 해도 스산한 기운이 도는 검은빛이 갇혀 있다.
“찰나일 것입니다. 반지의 상급 각성은.”
아폴론의 말을 들은 에오스의 표정이 갑자기 구겨진다.
그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을 보고는 아폴론은 아뿔사! 하고 말을 덧붙였다.
“인간계의 시간으로 길어도 이틀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에오스는 명확한 것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앞에서 ‘이제’, ‘곧’, ‘아마’, ‘글세’ …… 이런 낱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녀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폴론이 정확한 시일을 짚어주자 그제야 에오스의 표정이 다시 평온해졌다.
한층 밝아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 아폴론은 손바닥 위에 소환했던 빛 구체를 허공에 던졌다.
또다시 한번, 파앗! 하고 빛 덩어리가 사방팔방으로 뿜어져 나가며 칠흑과 같은 검은빛을 분출하더니 삽시간에 사라졌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에오스는 검은 빛줄기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폴론에게 물었다.
“인간도 알고 있나?”
“에오스여!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 선인이 그것을 어찌 알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오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다가와 아폴론의 옆에 나란히 선 행운의 여신 티케였다.
“그래? 모르고 있다고?”
다시 등을 돌려 천상경을 쳐다보는 에오스의 입꼬리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티케는 덕분에 오해했는지 에오스의 등 뒤로 가까이 서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대가 귀띔이라도 해 주는 게 어때?”
“걱정? 호호호호!!”
에오스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더니 한참을 웃는다.
“내가 왜 걱정을 하지? 이런 볼만한 구경거리가 또 어디 있다고?”
티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 새벽의 여신이 언제 인간 걱정하던 신인가?
천방지축 그 성격이 어디 가나 싶어 티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마음대로 해. 나중에 뒤치다꺼리하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지나 말라고.”
티케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에오스는 천상경을 보는 것에 집중하며 혼잣말했다.
“엑스트라 링이 상급 각성에 들면 저 인간의 표정 볼 만하겠는데?”
* * *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
“여긴 또 어떻게 뚫죠?”
내 질문에 김남규 팀장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방금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게이트 밖으로 나가려는데 얼핏 봐도 여기 모인 팬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사님이 알아서 하실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김남규 팀장이 앞서서 걸었는데, 게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수십 명의 경호원이 내게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제일 뒤에는 그저께 중국으로 먼저 출발했던 최재우 이사와 PS China의 자오린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와요. 시후 씨.”
“안녕하세요. 어떻게 자오린까지 함께 왔어요?”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죠.”
공항에서 나를 둘러싸는 많은 인파를 무사히 헤치고 자오린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올라타자 최재우 이사가 입을 열었다.
“오느라 고생했고, 오늘의 스케줄은…….”
최재우 이사가 또 스케줄을 읊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미국에 갈 때까지 아니 미국에 가서도 최재우 이사와 함께 일해야 하는데, 그것이 든든하면서도 살짝 앞날이 걱정스럽다.
워낙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그의 그런 성격이 종종 피곤해서였다.
“짐을 풀고…… 저녁 식사는…… 내일은 특별히 갈 곳이 있어.”
“특별한 곳이요?”
네! 네! 하며 최재우 이사의 스케줄 설명을 듣다가 특별한 장소라는 말에 내 귀가 움찔거렸다.
“내일은 저랑 함께 저희 본가에 가게 될 거예요.”
자오린의 말이다.
자오린의 본가라면…….
전 세계의 많은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특히 정확히 어떤 사업인지는 모르지만 어두운 부분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는 PS China의 회장 ‘자오위안’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회장님과 미팅이 잡혀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자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저의 가장 소중한 장소로 시후 씨를 초대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