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118화 준비가 끝났다 (1)
“준비는 차질 없이 돼 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최재우 이사에게 물었다.
왓칭의 새로운 히어로 영화 <블랙 리앙>의 주연으로 발탁되고 난 후.
나는 한동안 분주하게 미국에서 지낼 준비에 들어갔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소속사 사람들이.
B&M 엔터테인먼트의 본사에 와서 나는 곧바로 이사실을 찾았다.
요즘엔 김남규 팀장보다는 최재우 이사와의 면담이 잦았다.
최재우 이사가 아무래도 영어에 능통한지라 PS America 쪽과 소통, 책임을 맡을 적임자이기는 했다.
그리고 원래 그는 일을 칼같이 잘했다.
“큼직한 부분은 웬만큼 해결이 끝났지.”
내 질문에 최재우 이사가 대답했다.
나와 한마디 하는 동안에도 뭐가 그리 바쁜지 서류와 컴퓨터를 번갈아 가면서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컴퓨터 모니터를 내가 잘 보일 수 있게 앞으로 돌려 주었다.
“봐봐, 어때?”
“우와!!”
최재우 이사가 보여준 것은 미국에서 1년간 내가 머무르게 될 집이었다.
앞마당엔 푸릇푸릇한 녹색 잔디가 쫙! 하고 깔려 있고.
그 뒤로 빨간 지붕과 붉은색의 벽돌로 지어진 탄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오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집 옆으로 차고가 딸려있었는데, 언뜻 보아도 대여섯 대는 주차 해놓을 수 있을 만큼 커 보였다.
거기에 적당한 크기의 풀장까지.
담벼락 안으로 모여 있는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크고 넓어도 너무 그랬다.
“너무 넓은 것 아니에요? 여기서 혼자 지내요?”
내가 입을 떡! 하고 벌리자 최재우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포터가 누군지 잊었어? PS China야, 인마.”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중국 최대의 투자사였지.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가장 큰 문제는 의식주였는데, 아무래도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집이었다.
이것은 PS America와 PS China 측에서 빠르게 해결에 나섰다.
PS America에서는 미국에서 촬영 시 머물 거처를 준비했고, PS China에서는 적당한 호텔을 인수해서 내놓았다.
“호텔을 인수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그게 PS China 자오린 이사 스타일이야. 내 사람, 내 배우 불편한 꼴을 못 보는 거지. 그리고 자오린도 뛰어난 사업가야. <블랙 리앙>으로 그만큼 거둬들일 자신이 있으니 투자하는 거지. 주연 배우가 너이니 아마 확신할 거야.”
<블랙 리앙>의 세계관이 중국의 태고 시대를 바탕으로 하므로 중국 현지 촬영은 불가피했다.
하필 또 촬영장으로 잡힌 곳이 중국 ‘윈난성’이다.
물론 특급 호텔도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배우를 포함한 스태프와 제작진이 열 명, 스무 명도 아니고.
촬영의 편의성, 이동성을 고려하고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PS China에서는 촬영 팀만을 위한 호텔을 마련하였다.
자오린이 투자하기로 나선 이상 금전 문제로 고생할 일은 앞으로도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미국에 있다가 중국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하러 가게 되면, 그동안엔 김남규 팀장이 미국에 가 있을 예정이야. 미국에 마련한 너의 집에 묵을 예정이고.”
“엥? 저랑 중국에 같이 가시는 게 아니고요? 빈집엔 왜요?”
“빈집이니까 보내는 거야. 집 지키라고.”
웃으라고 한 얘기인가?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의문스러운 눈초리로 최재우 이사를 쳐다보았다.
김남규 팀장을 미국까지 보내는 데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 농담이야. 김 팀장은 따로 할 일이 있어. 나중에 일이 성사되면 얘기해 줄게.”
그럼 그렇지.
회사에서 헛돈을 쓸 이유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든 간에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 주겠지.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1년이라…….”
<블랙 리앙>의 제작진들은 촬영 기간을 1년 안팎으로 예상하였다.
“지금 사는 집은 어떻게 할래?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월세라도 놓을래?”
최재우 이사가 여전히 쌓여있는 서류들을 검토하며 내게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데 1초의 고민도 없었다.
“그냥 둘게요. 어머니께서 자주 오셔서 청소해 주실 거고…….”
아마도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내 집은 완벽하게 지인들의 아지트가 될 것이다.
사실 내 집만큼 모이기 좋은 장소도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예닐곱의 톱 배우들이 카페에 떴다고 생각해 보라.
따라다니는 카메라와 팬들 때문에 얼마나 피곤하겠는지를.
“그래. 그럼 집은 그냥 두기로 하고. 참! 이것 봐봐. 오늘 오후에 나갈 기사야.”
최재우 이사는 태블릿PC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는 기사였다.
그것을 쭉 훑어보는 동안 최재우 이사는 손을 바삐 움직여 몇 건의 서류에 사인을 끝내놓고 내게 물었다.
“괜찮아? 빼거나 보충하고 싶은 내용은 없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사실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김남규 팀장은 나에 관한 홍보 기사를 내보내며 한 번도 내게 먼저 보여주거나 가감할 내용을 상의한 적이 없다.
그가 일을 대충 하거나 못해서가 아니다.
워낙 하는 일이 많은 매니저인지라 본인조차도 자료를 검토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원래 홍보 기사는 홍보 전략실의 일이었으므로 매니저들은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최재우 이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상의하며 내게 의견을 묻고 일일이 챙겼다.
그의 능력이 전설적이라는 소문은 내가 겪은 바로는 100% 사실이다.
지금의 이사라는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아마 B&M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이종사촌이라는 이유는 한 1%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꼼꼼하기가 그지없었으니…….
* * *
[가수 주시후 미국 할리우드 진출! 성공 확률은?]
[역대 할리우드에 진출한 내로라하는 한국 배우들의 실패 요인 TOP10]
[영화평론가들이 말하는 배우 주시후. 그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다.]
다음 날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풀린 나의 할리우드 진출 소식.
언론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이를 반박하다시피 B&M 엔터테인먼트에서 삽시간에 홍보 자료를 풀었다.
왓칭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새로운 히어로, 서포트는 PS America가 하고, 그 뒤에서 중국의 PS China가 지원한다.
기나긴 자료를 배포했지만, 무엇보다 이 단 한 줄의 기사가 미치는 영향은 무지하게 컸다. 이에 우려의 목소리는 점차 응원의 목소리로 바뀌어 가고, 나는 성공하리라는 모두의 염원 속에서 미국행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주일 남았네? 흑흑.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진국이 애써 눈물을 짜내려 하는데 눈물은커녕 눈가가 젖어 들지도 않는다.
“형은, 에휴…… 연기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어, 그래.”
진국에게 핀잔을 주자,
“시후야. 잘 다녀와. 보고 싶을 거야.”
이번에는 조연석이 나섰다.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와!! 대박!! 역시 형은 연기 천재시네요.”
“그러냐? 하하하!!”
“진짜 대단하세요! 난 왜 눈물 연기가 안 되지?”
진국과 조연석이 나를 앉혀 놓고 연기 놀이가 한창이다.
내가 이런 사람들이랑 무슨 송별회를 하겠다고.
말이 좋아 송별회지 대낮부터 우리 집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분위기 좋은 바에서 함께 와인을 마시고 싶은 남자 연예인 1위, 조연석.
함께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 남자 연예인 1위, 한동하.
극장에서 영화 관람을 하며 팝콘을 나눠 먹고 싶은 여자 연예인 1위, 채설아.
그리고 진국까지.
이 네 명은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까부터 소주를 들이마시고 있다.
와인 잔을 들고 ‘cheers’를 외칠 것 같이 우아하게 생긴 조연석은,
“안주 멀었냐?”
하고 외쳤다.
그러자 주방에서는 집밥 해 먹이고 싶은 남자 연예인 1위로 뽑힌 문영호가 다 되었다고 대답했고, 함께 쇼핑 가면 짐을 잘 들어 줄 것 같은 남자 연예인 1위, 정해수가 양손에 접시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고급 인력들의 재능 기부 현장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야!! 화영이는 왜 안 와?”
“화영이가 애냐? 올 때 되면 오겠지.”
마른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으며 한동하가 묻자 채설아가 대답했다.
그녀는 이어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녁 먹어야지, 이제. 영호야, 저녁밥 먹자.”
채설아가 아직 주방에 있는 문영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평상시에는 ‘영호 씨’ 하고 부르더니 소주가 들어가니 그냥 다 친구다.
하긴, 둘이 동갑내기 친구이기는 하지.
“누나, 제가 해 드릴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으음……. 시후가 해 주는 건 다 맛있지! 아무거나 대령해라!”
인제 보니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나는 휴대폰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뜩이나 잘 채워 놓지 않는 냉장고를 대낮부터 털었으니 일단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는 상황이었다.
‘장을 봐 와야겠지?’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차키를 챙겨 현관문을 앞으로 향했다.
장을 보려면 마트까지 꽤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행을 준비하는 몇 개월 동안은 거의 스케줄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볼일을 보려면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최재우 이사가 집 주차장에 차를 한 대 놓고 간 참이다.
평상시에는 바깥 출입을 해야 할 때는 무조건 김남규 팀장과 함께였기에 운전을 기회가 마땅히 없었는데, 오늘은 마침 김남규 팀장도 옆에 없고, 오랜만에 직접 차를 몰아 볼 절호의 기회였다.
2년 전에 아버지 차를 한 번 몰아 보고 처음이지만 운전 실력이 어디 갔으려고?
그때 징- 징- 하며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 화영아.”
집안 행사로 인해 저녁 6시 정도면 도착할 것 같다던 강화영이 8시가 넘도록 여태 오지도 않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 아! 너희 집이 어디랬지? 그럼 주소 보내 줘. 마트에 들렀다가 데리러 갈게. 술? 나는 아직 안 마셔서 괜찮아. 응. 앞에 가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나자 모두들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궁금하다고?
“화영이가 지금 집에서 택시 타고 출발하겠대요. 개인적인 일을 보느라 오늘은 매니저가 없다고…… 제가 지금 마트에 장 보러 갈 거니까, 나간 김에 데리고 올게요. 가까운 거리라서요.”
“그래. 데리고 가서 장 보지 말고, 꼭 장보고 나서 데리러 가라.”
한동하의 의미심장한 말에 모두가 웃었지만, 표정들이 왠지 슬프다.
괜히 둘이 붙어 있다가 사진 찍힐라. 스캔들 조심해라.
이런 의미다.
“알겠습니다!”
친한 친구끼리 마트에 함께 가는 게 뭐가 어떻겠냐고 하겠지만, 강화영과 나란히 장을 보는 사진이 다음 날 인터넷에 돌아다닌다면 발 벗고 나서서 해명한다고 해도 그 여파는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집 밖으로 나선 나는 마트에 들러 빛의 속도로 찌갯거리를 주워 담고 강화영의 집으로 출발했다.
“화영아, 2분 후면 도착해. 슬슬 준비하고 나오면 될 것 같아.”
나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창밖을 훑어보았다.
단독주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동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하얀색의 벽돌 건물.
강화영의 집 앞이었다.
“아직 안 나왔나?”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자 12월의 칼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때 대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런데 강화영이 아니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사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가 탄 차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열려있는 운전석 창문을 통해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주시후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