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블랙 리앙 (4)
왓칭 종합 엔터테인먼트 본사에서 <블랙 리앙>의 오디션을 보고 온 다음 날.
“내일모레 왓칭 본사에서 다시 들어 올 수 있냐고 묻는데?”
최재우 이사가 김남규 팀장에게 물었다.
원래 우리는 이틀 후 귀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처리해야 할 급한 스케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김남규 팀장은 손가락 두 개를 동그랗게 만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네. 내일모레 오후 1시. 알겠습니다.”
최재우 이사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나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보통은 오디션을 보고 나면 소속사에 당락 결과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다시 보자고 하는 걸까?
궁금증이 생긴 나는 최재우 이사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 기다렸다.
“한 번의 오디션으로 배우들을 다 뽑을 셈인가 보네.”
그의 말을 듣고 대강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오디션을 보고 나니, 배우들이 다 마음에 드는 거다.
주연 배우 한 명만 뽑고 돌려보내기에 아깝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아마 어제 오디션을 본 배우들 가운데 조연도 뽑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소환하는 것이고.
“저만…… 다시 불려가는 건 아니겠네요?”
내 물음에 최재우 이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몇 명이나요?”
“중국의 ‘황서우촨’, 일본의 ‘타케우치 케이’ 그리고 너! 그중 한 명은 ‘리앙’ 역을 맡을 거고, 한 명은 ‘춘’ 역을 맡을 거 같아.”
최재우 이사가 이런 정보들을 어떻게 그렇게 발 빠르게 입수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춘’이라면 리앙의 삼촌이다.
리앙의 터전인 타리수 행성을 피로 물들이는 장본인이다.
사실 춘은 악역이기도 하지만 무척 멋있는 캐릭터다.
잘생기고 강한 남자이며 타리수 행성의 백성들과 왕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그가 왜 타리수 행성의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스토리를 알고 나면, 그냥 나쁜 놈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춘…… 역도 괜찮지 않아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내가 그 역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도 나름으로 매력이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래도 최재우 이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행여나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 ‘자오린’ 앞에서는 더더욱 하면 안 돼. 알지?”
“넵!!”
내 씩씩한 대답에 최재우 이사는 피식 웃었다.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모두가 네게 거는 기대가 엄청나게 커서 그래.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사람들이 많잖아. PS China의 자오린 이사는 직접 뉴욕으로 오겠다며 바로 출발할 거래.”
“자오린이요? 왜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이래저래 할 일도 많을 텐데, 공사다망한 그녀는 왜 굳이 오디션 때문에 미국까지 오겠다는 걸까?
“길게 말은 안 하지만 짜증이 난 거겠지. 중국의 ‘황서우촨’ 소속사에서 왓칭 엔터 쪽에다가 무언의 압박을 넣은 거잖아. 중국 기업 ‘T.U.I’의 투자를 들먹이면서 말이야. 그걸 PS China에서 가만 보고 있겠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는 거예요?”
“아이고! 주 배우야! 할리우드가 얘들 장난이냐? 왓칭 엔터 쪽에 믿는 구석 하나 없이 너를 보냈을 것 같아?”
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판이 크다.
서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크고 작게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래,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되지.
모레 왓칭에 들어가면 확실히 보여 줘야겠다.
‘리앙’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다음 날 점심나절 때쯤 나는 호텔 룸에서 자오린을 만날 수 있었다.
장거리 비행에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히 씩씩했다.
“아니! 방이 왜 이래요? 특별히 잘 모시라고 당부했는데?”
자오린이 호텔 룸으로 들어서며 대뜸 하는 말이었다.
룸 3개에 거실과 서재까지 딸린 비즈니스 스위트룸인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나?
“이 정도면 훌륭합니다. 장기 투숙할 것도 아닌걸요. 시후가 뉴욕에 오래 머물게 된다면 그때는 집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최재우 이사는 모든 대처에 능한 인재인지라 이럴 때 해야 할 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돌려서 잘도 했다.
자오린은 방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 이제야 내가 눈에 들어온 것인지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죠. 자오린은요?”
최재우 이사를 의식해서인지 아까부터 영어로 말하는 그녀였다.
덕분에 요즘 한창 영어 공부하는 김남규 팀장도 적잖이 알아듣는 표정이었고.
“저요? 저는 요 며칠 골치가 아픈 것 빼고는 다 괜찮네요.”
씩씩하다 못해 무서운 여자.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뭐라도 드시겠어요? 아니면 마실 것으로?”
미국에 와서 영어에 더욱 자신감이 붙은 건지 김남규 팀장이 자오린에게 말을 붙였다.
“저는 커피로 할게요.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조금 피곤하네요. 아! 아이스로요. 속도 타는지라…….”
룸서비스를 주문하는 김남규 팀장을 보며 그녀는 손을 휘이! 휘이! 저어 바람을 일으켰다.
얼굴에 손부채질을 몇 번 하고 나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싱긋 웃는다.
“아! 열이 조금 받아서 그만…….”
룸서비스가 도착하자 그녀는 주문한 커피를 시원하게 쭉 들이켰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며 기다렸고.
그녀의 입에서 미국까지 급하게 날아온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
이내 그녀는 말문을 열었다.
“T.U.I에서 ‘황서우촨’을 밀고 있는 것 아시나요? 그 대표가 ‘황서우촨’의 큰아버지라는 얘기가 있어요. 그쪽에서는 이번 영화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부터는 기업 전쟁입니다. 그게 제가 미국에 온 이유이고요.”
PS China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T.U.I는 투자를 하네 마네 했다는데.
그것이 자오린을 자극했나 보다.
그래도 전쟁이라고 할 것까지야…….
“투자사와 배우의 소속사가 이해관계만 성사되었다면 이런 것은 꽤 흔한 일이지 않나요? 더군다나 대표가 배우와 한집안 식구라면 더 감싸고 돌겠죠. PS China에서 시후를 케어해 주시잖아요. 이게 그렇게 심각한 사항입니까?”
최재우 이사가 자오린에게 물었다.
대답하는 자오린의 표정은 싸늘했다.
“심각하죠? 우리는 시후 씨가 스스로 배역을 따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어요. 그리고 시후 씨가 정말 실력으로 그 역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죠. 그런데 T.U.I에서 자꾸 왓칭 엔터 쪽에 어필을 하네요? 내일 세 명의 배우들을 다시 소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덕분에 그 일본 배우만 한 번 더 기회를 얻게 되고, 남 좋은 일 시켰네요. 그 중국 배우보다 일본 배우가 더 많은 점수를 받았거든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자본을 보유하고 있길래 돈으로 마구 밀어붙이는 걸까요?”
대외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PS China.
사실은 세계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그런 ‘자오’ 가문 앞에서 투자라니.
그녀는 앞에 있지도 않은 적을 깔보는 듯한 눈빛을 허공으로 쏘아 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우리 PS China가 시후 씨의 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투자 운운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이번에 뉴욕에 온 이상 이일은 확실하게 처리할 거예요.”
그 ‘처리’라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최재우 이사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자오린은 다시 평온한 얼굴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T.U.I에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에요. 다시는 미디어 사업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예요.”
어려서부터 큰 규모의 사업만 맡아서 한 까닭일까?
한 기업을 한 분야의 사업에서 힘으로 억눌러 배척시키겠다는 이런 무서운 얘기를 자오린은 웃으면서 잘도 했다.
“이는 우리 PS China의 위상을 높이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해요. 아! 너무 무거운 얘기만 늘어놓았나요? 기업 간의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시고, 시후 씨는 내일 시후 씨가 할 일만 잘하면 돼요.”
과연 자오린은 어떤 방식으로 PS China의 위상을 드높일까?
궁금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다.
나는 자오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 * *
다음 날, 왓칭 엔터테인먼트 본사.
낯익은 방에서 낯익은 빈 책상을 바라보며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
며칠 전 <블랙 리앙>의 오디션을 보러왔던 그 공간이다.
내 양옆으로 두 명의 배우들이 더 앉아 있었는데, ‘황서우촨’과 ‘타케우치 케이’였다.
심사 위원들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오디션 룸에는 묘한 기류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여유 있게 앉아있는 ‘황서우촨’이 먼저 그 정적을 깼다.
“주시 후씨. 이런 데서 만나니 정말 반갑네요. 중국에서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저도 반갑습니다.”
‘황서우촨’이 중국어로 내게 인사를 건넸는데 ‘타케우치 케이’가 나를 힐끗거렸다.
‘중국어도 하나?’ 이런 눈치다.
“블랙 리앙의 삼촌인 ‘춘’이 무지 미남으로 표현되었다던데 주시후 씨의 눈부신 외모를 보니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가요? 하긴 당신은 ‘춘’역에 안 어울립니다. ‘춘’은 항상 진중한 캐릭터거든요.”
“네?”
같은 시각.
왓칭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한 방에서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몇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미국에서도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PS America의 본부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요. 그 이름이 PS China인 것도 알고 있죠.”
왓칭 엔터테인먼트 사장직을 맡은 ‘알렌 마던’.
그의 말을 들고 나서 자오린은 단도직입으로 용건을 꺼냈다.
“알고 계시다니 말이 짧아지겠네요. 그럼 제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도 알고 계신가요?”
‘알렌 마던’은 사실 오늘 중요한 점심 선약이 있었다.
그런데 PS China의 대표이사가 본사에 방문한다는 통보를 받고는 약속을 취소한 터다.
그는 PS China가 그럭저럭 운영되는 중국의 투자회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기업인 중 한 명이다.
세계 곳곳에 지사를 둔 PS.
이곳에서 왓칭의 사장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투자를 하든 투자금을 빼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PS China에서는 투자한 적이 없으니…….
“투자 계획인 겁니까?”
‘알렌 마던’의 질문을 받은 자오린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네. <블랙 리앙>이요.”
“아, 그 영화에는 이미 많은 투자사가 참여한 터라…….”
“그렇습니까? T.U.I도요?”
자오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알렌 마던은 그녀의 눈을 쳐다보고는 갑자기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