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115화 블랙 리앙 (3)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심사 위원 세 명 중 가운데 앉아 있는 사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콧수염을 기른 심사 위원이라.
아마 ‘왓칭’의 새로운 히어로 영화 <블랙 리앙>의 감독을 맡은 ‘스콧 페브릭’일 것이다.
아주 깐깐한 성격이라고 들었다. 수염을 기른 모양이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긴 해도, 인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저는 올해로 (만) 23살인 주시후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가수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고 지금까지 총 두 작품의 한국 드라마를 찍었습니다. ‘왓칭’의 히어로 시리즈를 여태껏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모두 봐 온 팬으로서 이번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화 촬영에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연기 경력이 다소 모자란 감이 있긴 하지만 캐릭터 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오디션을 몇 번 해 본 경험상,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말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점수에 플러스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나다.
어찌 들으면 경력도 모자란 놈이 호기만 넘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이 방법이 조금 통했는지, 아니면 원래 오디션을 보러온 지원자들에게 모두 그렇게 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사 위원들이 나를 빤히 보며 내 말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특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준비해 오신 것을 볼 차례군요. ‘리앙’은 검을 잘 다뤄야 하는 캐릭터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무예는 익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로 다듬어 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자! 시작해 볼까요?”
스콧 페브릭 감독은 심사 기록표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시작을 알리자 오디션장에 있던 스태프 중 한 명이 가짜 검을 가져다 주었다.
이때까지 스콧 페브릭은 심사 위원 중에서는 유독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별 기대감이 없을 때 보여 주는 심사 위원의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나는 이런 때에 시선과 분위기를 확! 잡는 법을 알고 있다.
‘금소추 소환.’
신계 품계 5품의 신장, 금소추의 소환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능력을 빌리기만 해도 10분의 1만큼 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보통은 그것으로 오디션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신을 직접 소환하기로 한 이유는.
예전에 B&M 엔터테인먼트에서 금소추의 능력을 실험해 보고자 소환을 해본 적이 있다.
소품실에서 빌린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보법을 펼치며 나대다가 의자를 두 동강 내 버렸다.
그땐 신의 기운을 조절하지 못해 그런 일이 벌어졌지만, 그 이후로 많은 힘 조절과 연습으로 이제는 금소추의 능력을 내 것처럼 쓸 수 있다.
“검법의 신 금소추가 소환을 허락합니다.”
천상경의 공명이 이어지고 나는 검을 치켜세워 들었다.
상대를 세워놓고 검을 겨루는 듯, 실제 전투를 방불케 하는 한차례의 검술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초식으로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으며 기운을 방출시켰다.
심사 위원들이 앉아 있는 방향이었다.
“wow!”
“oops!”
“Oh my god!!”
이걸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금소추를 직접 소환한 이유는.
뜻밖의 강풍에 머리카락들이 잔뜩 헝클어졌지만, 심사 위원들은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들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코앞의 동양인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과연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먼저 스콧 페브릭은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던 등을 떼고 몸을 테이블에 가까이 붙였다.
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거리에서 보려고 하는 행동임을 잘 안다.
양옆의 심사위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무런 효과 장비도 없이 어째서, 어디서 이런 강풍이 불어 왔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낯빛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는데?”
“저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죠?”
물론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말한다고 해서 믿지도 않을 테고.
나는 흠흠! 헛기침하며 연기 테스트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냈다.
“좋아요. 이번엔 연기를 한번 보고 싶군요.”
일단 넘어간다는 말에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웃자 심사위원 중 홍일점이 따라 웃는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앞쪽에 있는 카메라를 보시고 분석해 오신 ‘리앙’을 연기해 주시겠어요?”
“네.”
대답하면서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오디션 비법이다.
반전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와 더불어 나는 한 가지를 더 준비했다.
신계 품계 5품의, ‘카이잘(Caizal)’
죽음의 여신 ‘케레스 (Keres)’가 전장을 누빌 때 그 선봉에 서서 길을 텄다는 공포의 신이다.
눈빛이나 목소리만으로 공포심을 들게 했다는 이 신의 능력을 쓸 일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상황에 아주 적합한 듯싶다.
카이잘의 능력은 빌렸을 뿐 직접 소환하지는 않았다.
그가 심어 주는 공포가 얼마만큼 위력적인지 아직 시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준비를 마친 나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콧 페브릭 감독이 ‘ready, action!’하고 외쳤다.
일순간 내 표정은 확 달라졌다.
생글거리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리고 카이잘의 능력을 사방팔방으로 분출시켰다.
다물고 있던 내 입술이 무겁게 움직였다.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 * *
오디션 룸.
탁!탁! 탁!탁!
고요한 이 공간에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테이블 위에 두 개의 프로필을 놓고 고민에 잠겨 있는 ‘스콧 페브릭’ 감독.
신중히 처리하는 그의 모습에 같은 공간 안에 있는 또 다른 심사 위원 두 명은 숨을 죽이며 스콧 페브릭의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오디션을 볼 배우들은 총 다섯 명이다.
그중에 네 명의 오디션이 끝난 상태고.
아직 한 명의 한국 배우가 밖에서 대기하는 상황이지만, 스콧 페브릭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명의 배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까부터 그랬다.
지원자들의 오디션을 쭉, 다 보고 나서 심사 기록표에 매긴 점수를 토대로 배역을 분담해 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스콧 페브릭은 달랐다.
처음 오디션 룸에 들어온 배우와 두 번째로 오디션을 본 배우, 둘을 비교하고 그중 한 명을 떨어뜨리며 프로필 파일을 뒤집어 놓았다.
처음부터 그는 계속 상대평가를 한 것이다.
이번에 그가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고민하고 있는 프로필의 두 주인공은.
이미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적잖이 활동하고 있는 중국의 ‘황서우촨’.
또 한명은 일본 배우 ‘타케우치 케이’다.
두 배우의 프로필을 놓고 또다시 상대평가에 들어간 스콧 페브릭에게 기다리던 스태프가 말을 건넸다.
“마지막 지원자 들어오라고 할까요?”
진행 스태프의 말에 스콧 페브릭은 손사래를 쳤다.
“마지막 배우와는 아직 약속된 시간까지 30분이 남아 있지 않나요?”
아직 들여보내지 말라는 말이다.
둘 중 누굴 떨어뜨릴지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스콧 페브릭 감독의 침묵이 다시 시작되자 이번엔 심사 위원 중의 한 명이 스콧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엔 뭘 고민하시는 건가요?”
‘왓칭’ 종합 엔터테인먼트에서 이사직을 맡은, 심사 위원 ‘알리 헬렌’.
그녀의 말에 스콧 페브릭의 미간이 아주 잠시 찌부러졌지만, 그는 이내 평온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 전 그녀가 미팅 자리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의 ‘황서우촨’을 캐스팅할 경우 중국 ‘T.U.I’에서 투자를 하겠다고 했던 말.
스콧 페브릭은 소신이 뚜렷한 감독이다.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지닌 그는 그 말이 떠올라 잠시 불쾌했다.
“이 두 명의 배우 모두 마음에 드는데, 너무 대조적이라 고민이 되네요. ‘황서우촨’은 많은 표정을 가지고 여유롭게 표현하는 배우이기는 하나, 무예가 너무 약합니다. 반면 ‘타케우치 케이’는 표정이 차갑기가 한결같더군요. 원래 그런 성격으로 보입니다만…… 검을 다루는 것이 편안해 보일 정도로 무술에 뛰어나니, 선택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 말에 잠자코 있던 다른 한 명의 심사 위원이 입을 열었다.
“무예는 아마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볼 한국 배우가 가장 뛰어날 겁니다.”
“네? 어떻게 아시죠?”
두 명의 심사 위원의 시선 집중을 받은 사내,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동양인이다.
‘블랙 리앙’의 액션을 책임질 무술 감독 ‘게리 자오’.
그는 중국에서 출생했지만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첫 시작을 할리우드에서 했고, 사실 그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여태껏 단 한 작품도 해 본 적이 없다.
“저 친구 아시아권에선 액션 쪽에선 엄청 유명해요. 저 친구 이름을 모르는 무술 감독은 아마 없을걸요? 막상 액션 연기를 선보인 작품은 달랑 하나뿐인데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알리 헬렌’이 호기심을 보였다.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의 표정을 보니 예쁘고 곱게 생긴 것이 액션과는 영 안 어울릴 것 같은데……하는 얼굴이다.
“한국에 ‘정두훈’이라는 유명한 무술 감독이 있어요. 그의 액션 연출은 이미 할리우드에도 소문이 날 정도죠. 그 감독이 가장 아끼는 배우라고 했습니다.”
“누가요?”
“중국의 동극 감독이요.”
갑작스레 거론되는 동극 감독 이야기에 이번엔 스콧 페브릭이 관심을 보였다.
동극은 할리우드에서도 여러 작품을 히트시킨 유명한 ‘스크린의 붉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 한국 배우가 동극 감독과 함께했던 작품이 있나요? 영화는 찍은 적이 없는 것 같던데, 동극 감독이 어떻게 아는 걸까요? 둘이 아는 사이일까요?”
게리 자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동극 감독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말하더군요. 새로 들어갈 영화에 꼭 같이하고 싶은 한국 배우가 있다고요.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릅니다만, 오디션을 보고 나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콧 페브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들은 얘기는 일단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괜히 편견으로 볼 수도 있으니 제 소신대로 보도록 하죠. 자! 마지막 지원자 들어오라고 하세요.”
곧 심사 위원들의 눈앞에 마지막 지원자가 서 있었다.
스콧 페브릭은 이 한국 배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놀라운데? 프로필 사진이나 카메라에 담겼던 그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원래 인물의 절반도 못 담아냈잖아? 세상에 이런 얼굴을 가진 배우가 있었나? 대단히 신비롭고 묘한 눈동자인데?’
스콧 페브릭은 속으로 깊은 감탄을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직 외모 말고는 아무것도 검증된 것이 없기에.
간신히 콩닥거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그는 입을 열었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현지인보다 더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는 이 한국 배우에게 그는 한번 또 놀랐다.
이번에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배우로 가득했다.
스콧 페브릭은 앞서 고민하던 중국, 일본 배우들의 프로필을 뒤집어 엎어 놓았다.
그리고는 애써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특히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자! 시작해 볼까요?”
잠시 후 한국 배우의 무예 시범이 이어졌는데, 스콧 페브릭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wow!”
배우의 마지막 동작과 함께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전신을 덮쳐온 것이다.
‘뭐지? 이건 뭘까? 트릭인 건가?’
스콧 페브릭은 의자에서 등을 떼어냈다.
이제 연기 테스트를 할 차례인데, 가까이에서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배우가 연기할 준비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자 스콧 페브릭의 정말 촬영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외쳤다.
“Ready…… action!”
순식간에 배우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미소로 일관하던 그의 얼굴에는 차디찬 냉기가 돌았으며 눈동자는 칠흑 같은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맙소사! 저게 연기라는 건가?’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더니 머리털이 쭈뼛하고 섰다.
그리고…….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나지막하면서도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그는 펜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덜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