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그런 사람 아닙니다! (2)
삐리리!
통화 종료 음이 울려 퍼진 뒤 대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입을 떡 하니 벌리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황민규는 심하게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형…….”
“지금 이 표정 말이냐?”
“네.”
“흐음. 그렇구나. 잘 기억해 둬야겠네.”
황민규는 지금의 감정을 잊지 않으려는 듯 가슴에 한쪽 손을 올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연신 진지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성유라 효과가 직방이네요?”
한참을 웃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처음 보는 두 명의 신인 연기자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부탁드려요.”
둘 다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 얼굴들이 사뭇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런데 여자 후배들의 등장에 황민규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이 눈이 들어왔다.
“반가워요.”
황민규가 손가락 두개를 펴서 이마에 가져다 대려고 한다.
‘아, 저 허세. 또 시작이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낚아채서 움직이지 못하게 꽉 붙들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같이 촬영하실 분들이신가 봐요.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신인 연기자들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자 황민규가 그때까지 잡혀있는 손을 뿌리치더니 나를 째려봤다.
“아, 왜?”
“내가 형 살린 줄이나 아세요. 내가 그냥 뒀으면 이따가 형 뺨에 불이 날걸요?”
“뭔 소리야?”
“여자들이 싫어한다고요, 그 손가락으로 이렇게 경례하는 거요. 재수 없어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황민규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랬구나.”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자 스태프가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왔다.
나는 황민규의 등을 토닥거려주고는 촬영장으로 향했다.
얼마나 잘 꾸며 놓았는지 마치 정말로 카페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느긋하게 앉아서 커피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네.’
하지만 현실은 일터.
이곳은 맥주 CF 촬영현장이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촬영이 끝나면 오늘은 신나게 놀게 될 테니.
지금쯤 다들 우리 집에 모였을까?
집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지만 않으면 참 좋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카메라가 세팅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스탠바이 할게요!”
스탠바이 사인에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데,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신인배우는 첫 CF 촬영에 초조한 마음이 드는지 연신 애꿎은 손톱을 뜯고 있다.
참, 안쓰러워 보였다.
“저……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내가 말을 걸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선배님. 저는 고민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딱딱한 건 그녀의 말뿐이 아니었다.
긴장한 것인지 몸이 굳어서 그녀의 행동은 무척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민주 씨. 마음 편하게 있어요. 소개팅하는 장면 찍는 건데 예쁘게 나와야죠.”
“아…… 첫 CF 촬영이라 너무 떨려서요. 선배님이랑 함께 찍는다고 생각하니까 더 떨려요. 보기 흉했어요?”
“흉한 건 아닌데, 꼭 빚쟁이 앞에 앉아계신 것 같이 보였어요.”
농담을 던지자 고민주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그제야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네. 지금 예쁘시네요. 자!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요?”
어차피 풀 샷 촬영 본은 영상만 쓸 거라고 했으니, 둘이 무슨 사담을 하든 상관없을 것이었다.
“아! 방송에서 선배님이 책 읽는 거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떨까요?”
“좋아요. 그럼 준비해 볼까요?”
우리 쪽의 분위기는 비교적 화기애애했고, 저쪽은?
간간이 들려오는 황민규의 말소리로 인해 촬영 준비를 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을 뿐.
대체로 조용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마 이별하는 장면을 연출해야 해서 그런 것이겠지.
“먼저 풀 샷 따고 나서 개별 촬영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돌자 나와 고민주는 미리 얘기한 바와 같이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민규 쪽도 풀 샷 촬영은 무난하게 넘어가는 듯 보였다.
오케이 사인을 받고, 이어서 나와 고민주의 개별 촬영이 시작되었다.
“스탠바이! 큐!”
고민주가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사이에 내 표정은 점점 무료해져만 갔다.
금세 앞에 있는 이 여자에게 흥미를 잃은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고민주의 대사가 이어졌다.
그녀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나는 그나마 얼굴에 짓고 있던 미소를 싹 지워 버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요. 그냥 재미가 없어져서요.”
“네?”
황당한 표정이 된 고민주는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 딴 곳만 쳐다보았다.
이 이상 말을 하기 싫다는 제스처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얼굴로 고민주가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퇴장하자, 내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굴 만나더라도 그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건가?
“후우…….”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내 왼쪽 눈에서 한 방울의 그리움이 뚝 떨어졌다.
“오케이! 시후 씨 수고하셨어요.”
내 촬영 타임이 끝나자 이번엔 황민규의 개인 촬영 준비가 한창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려 대기실로 가려다가 잠시 미루어두었다.
그가 따귀 맞을 장면이 너무 궁금해서였다.
“한 방에 따악! 때리고 끝내 주세요. 어설프게 맞으면 더 아파요. 아셨죠?”
황민규가 상대편 신인 연기자에게 신신당부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따지고 보면 황민규도 톱스타이고 그와 비례에 외모도 아주 출중했는데, 초면에 이런 배우의 따귀를 때린다는 것이 연기라고는 하나 상대편 연기자에게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카메라 앞에 서본 경험이 많지 않은 신인일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과연 황민규는 몇 번을 얻어맞게 될까?
맞고 나서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탠바이! 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남녀.
“헤어져.”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어. 이 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 말에 황민규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사랑이 장난이야?”
황민규가 여자의 팔을 붙잡자 그녀는 팔을 뿌리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황민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끌어안았다.
“제발 부탁이야.”
여자는 그를 밀쳐 내더니 따악! 하고 따귀를 때렸다.
“너의 이런 점이 너무 싫어.”
카페 밖으로 나가버리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황민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한쪽 손을 들어 따귀 맞은 볼을 감싸며 혼잣말했다.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할게요!”
CF 감독 박지선이 오케이 사인을 내고 나서 황민규에게 다가갔다.
“민규 씨 얼굴 괜찮아요? 방금 연기 너무 좋았어요. 역시 천생 배우이신가 봐요. 최근에 진짜로 실연당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표정이 나오죠?”
나도 의외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한 번에 오케이가 되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상대편 배우 덕분이다.
그렇게 시원한 스윙과 찰진 소리라니…….
사실 황민규의 연기도 리얼하긴 했다.
그것은.
“유라 효과예요. 큭큭큭.”
내 말에 박지선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뭐 어쨌든 수고하셨어요. 다음 촬영장으로 이동할게요.”
스태프들이 하나둘 장비를 철수하자 우리도 옆 촬영장으로 이동했는데, 계속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황민규를 보니 아직 많이 아픈가 보다.
“형, 괜찮아요?”
“응. 곧 가라앉겠지. 그나저나 걱정이네.”
“왜요?”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증이 밀려왔다.
워낙 생각하는 것이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새로 나온 이 맥주 말이야. 목 넘김이 부드럽고 끝 맛이 개운하다던데 안 마셔 보고 어떻게 그걸 표현하냐는 거지.”
“마셔 보게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
“형, 원래 맥주 안 마시잖아요.”
술이라고는 와인과 위스키만 마실 줄 안다던 황민규.
맥주를 마셔 보겠다고 하니, 갑자기 예전에 전승원 PD의 생일을 축하하던 자리가 떠올랐다.
그때 아마 소주를 들이켜고는 화장실에서 떡실신이 된 채 발견되었지?
“그래도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게 낫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왠지 황민규가 또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 * *
“하하하! 하하하! 기분 조아아! 2차 가자!”
한껏 신난 황민규가 허공에 손가락을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촬영 도중 한잔, 두잔 맥주를 들이켜던 그는 결국 맥주 맛을 알아버렸다.
목을 콕 찌르는 탄산이 상쾌하다나?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실실거리며 웃음을 흘리는 황민규를 보고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촬영이 끝나고 나서 광고에 동원된 남은 맥주를 끝까지 홀짝거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기어이 취했다.
그날의 소주 사태와 같은 추태를 부리지는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제발 토하지만 말아다오.’
촬영이 끝난 후, 배우 동료들이 모여 있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황민규가 씩 웃더니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어디 가게? 시후야?”
나는 그의 손을 걷어내며,
“집에 가야죠. 저 오늘 약속 있어요.”
라고 했지만 황민규가 다시 내 소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안 돼! 못가! 나랑 2차 가자! 울 집에 가아. 응?”
“어휴……. 혀는 잔뜩 꼬부라져서.”
떼어 내려고 해도 얼마나 꽉 붙잡고 있는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로 떼어 내려 했다가는 옷이 찢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황민규에게 한번 당해봤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이거 어쩌죠?”
나는 그의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죄송하지만, 민규 형님 집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을까요?”
매니저는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오히려 도와달란다.
“집이 어딘데요?”
“한남동이요.”
이번에는 김남규 팀장을 쳐다보았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네. 내가 뒤따라 갈 테니까 민규 씨 집 앞에서 옮겨 타도록 해.”
“알았어요. 그럼 빨리 가요. 다들 기다리겠네.”
내가 앞장서자 황민규가 헤헤 웃으며 내 팔에 팔짱을 꼈다.
“가자! 울 집으로! 고고! 고고!”
“신났네. 신났어. 아, 질척거리지 말고 좀 떨어져요. 간다니까요. 아휴…….”
황민규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얌전하게 앉아있는 황민규.
그는 옆에 앉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는 중이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황민규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속삭이던 매니저의 목소리에 황민규는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응? 다 와따고? 여기가 울 집이라고?”
주절거리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뜬 황민규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니자나! 아니자나! 어? 차 세워! 차 세워 봐!”
나는 황민규의 말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카페 앞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 돼요! 그냥 가요! 세우지 마세요!”
사고 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엔 내가 소리쳤다.
“안 세워? 그럼 나 그냥 뛰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