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110화 (110/170)

# 110

110화 그런 사람 아닙니다! (1)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

스케줄 때문에 집에 거의 있지 않은 것도 한몫했지만, 틈틈이 엄마가 와서 청소해 준 덕분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정리할 것도 딱히 없다.

짐도 많지 않은 데다가 집에서 뭐라도 하고 뒹굴어야 어지럽혀지는 것이지 요즘엔 어지럽힐 시간도 없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저녁상.

보쌈과 족발, 닭볶음탕, 치킨, 피자 등등.

사실은 모두 배달 음식이다.

내가 거실 테이블에 가지런히 음식들을 펼쳐놓자 김남규 팀장이 손이 바빠졌다.

“뭐해? 어서 먹자. 배고프지 않아?”

요즈음 화장품 모델로 발탁되어 오늘은 그 행사장에 다녀왔는데, 저녁 만찬 때 열심히 사진에 찍히느라 거의 식사를 못 하기는 했다.

배는 고픈데, 행사장에서 간신히 맛만 봤던 스테이크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물론 배달음식도 원래 좋아했지만 요즘 자주 먹으니 질리기도 했고.

스테이크와 배달음식은 갭이 너무 커서, 눈앞의 음식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

“팀장님 많이 드세요. 배달 음식은 이제 좀 그만 먹고 싶어요. 아!! 엄마가 해 준 집밥 먹고 싶어요.”

내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깔짝거리자 핀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음식 잘하잖아. 네가 해 먹으면 되지.”

테이블 가까이로 붙어 앉으며 젓가락을 집어 든 문영호다.

“내가 해 준 음식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

“야! 저번에 나랑 <한 끼만 줍쇼> 출연했던 거 방송 보니까, 집주인이 아주 맛있다고 야단이더만. 그걸 꼭 먹어 봐야 아냐?”

“쳇! 재료 사다가 놓으면 뭐해? 해 먹을 시간이 없어서 다 썩어나간단 말이야.”

나는 폭풍처럼 젓가락질 하고 있는 문영호를 바라보며 두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문영호가 시도 때도 없이 내 집에 드나들었다.

내가 집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이다.

“근데 형은 왜 자꾸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있는 거야?”

음식을 오물거리던 문영호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어? 네 집이 편해서 그래.”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나도 없는데 그렇게 들락날락해도 되는 거야?”

“그게 싫었으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말았어야지. 큭큭큭.”

“그래. 이김에 확! 바꿔 버릴까 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집에 들어왔을 때 문영호가 반겨주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썰렁하게 불이 꺼져있는 집에 들어오는 것보다야 누군가가 수고했다며 반겨주는 편이 좋은 건 당연한 거겠지.

“야, 참아! 비밀번호 바꾸면 나 말고도 불편해 할 사람 많아.”

“응?”

“종종 너 없어도 너희 집에서 모이거든. 해수 형이랑 연석이 형도 그저께 다녀갔고. 다 같이 모일 때는 가끔 화영이도 와.”

“뭐?”

만남의 광장이 따로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집은 그야말로 아지트가 되어있었다.

삐삐삑! 삐삐삑!

그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덜컹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어? 형?”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방금 집안으로 들어온 사내를 쳐다보았다.

“진국이 형, 저녁 먹었어? 같이 좀 먹자.”

“아냐. 난 생각 없어. 니들끼리 먹어.”

집 안으로 들어선 진국이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저 형은 또 뭐야? 아! 대체 비밀번호 모르는 사람이 누구야? 있긴 있어?”

내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김남규 팀장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진국이 요즘 회사에서 안무 연습하느라 죽어나거든. 진국이 집이 너무 멀어서 여기서 왔다 갔다 하라고 했어. 네 집은 회사에서 가깝잖아.”

“아니! 내 집인데 왜 팀장님 마음 대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집은 이미 아지트 겸 숙소였다.

* * *

“뮤비 끝내주네. 이거 풀리면 반응이 대단하겠어.”

“그러게요, 팀장님. 그나저나 블랙 타이거도 연기를 꽤 잘하네요?”

“그치? 동혁이는 배우 해도 되겠어.”

방금 블랙 타이거의 신곡 뮤직비디오 영상을 보고 난 후 김남규 팀장과 문영호의 반응은 호평 일색이었다.

“그래도 연기는 역시 시후죠! 우와! 시후 오열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니까요. 무슨 뮤비 퀄리티가 저렇게 높냐? 저는 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요.”

“네티즌들이 항상 말하잖아. 시후는 울 때가 가장 예쁘대. 큭큭.”

“아, 그래요? 저는 그 말은 들었는데…… 키스 장인이라고. 킥킥킥.”

“아! 뭐래!”

“야, 가수가 저렇게 연기해 대니, 나 같은 배우들이 실직자가 되는 거야. 적당히 해라, 응?”

내가 인상을 쓰든 말든 김남규 팀장과 문영호는 둘이 낄낄거리며 웃고 난리다.

“이제 뭐 할 거야? 다음 작품은? 차기작은 정했어?”

한참을 웃고 난 뒤에 문영호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조금 진지해진 것을 보고는 나는 그렇게 답했다.

“아직 생각 안 해 봤어. 일단 회사에서 잡아놓은 스케줄 소화하면서 생각해 봐야지.”

“아서라! 말도 마. 시후 앞으로 시나리오가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와도 지금은 읽어볼 시간도 없을걸?”

내 말에 김남규 팀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은 광고며 행사 스케줄을 소화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사실 드라마와 시놉시스 몇 개를 읽어 보기는 했다.

그런데 어째 모두 비슷비슷한 캐릭터다.

사극이나 현대극이나 하나같이 한 여자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순정남 캐릭터.

이러다가는 착한 남자로 이미지가 낙인찍혀 버릴 것만 같아서 전부 고사했는데, 아마도 한동안은 계속 그런 역할만 들어올 것 같다는 생각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골라야 할 것 같아. 형은 어때?”

“나야 뭐. 요즘 화보 촬영 몇 개 하면서 작품 고르고 있지. 아 참! 근데 너 다음 주 수요일에 스케줄 있어? 다들 모이기로 했는데.”

문영호의 말에 나는 김남규 팀장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스케줄이 있냐고 묻는 제스처였다.

김남규 팀장은 태블릿PC를 꺼내 들고 화면을 톡톡! 누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수요일에 스케줄 있네. 아! 그 맥주 CF 촬영이구나!”

들려오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이 지어졌다.

하지만 곧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노는 것이 좋아도 일은 하면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에이. 나는 모임에 못 가겠네. 아쉽다. 내 몫까지 재미있게 놀아.”

“그래? CF 촬영을 밤새도록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그럼 끝나고 와. 어차피 이 집에서 모일 거니까.”

“어?”

집이 개판이 되겠구만.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황민규랑 동반이네?”

김남규 팀장이 말을 꺼냈다.

“황민규요? 뜬금없이 둘이 왜요?”

“뜬금포는 아니지. <말할 수 없는 시간>에 황민규 촬영분이 방송 타고나서 둘이 잘 어울린다느니, 브로맨스 터진다느니 반응이 얼마나 좋았는데?”

“아, 그랬어요? 맥주도 안 마시는 사람이 무슨 맥주 광고래?”

사실 황민규가 싫어서 투덜거리는 것은 아니다.

뭐든지 열심히 하려는 그의 열정만큼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번 촬영 때도 그의 열정이 나를 힘들게 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지울 수가 없다.

* * *

국내 맥주 매출 순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L사의 ‘하이우드’

그 광고 촬영 현장의 중앙에 나와 황민규가 서 있다.

황민규는 오늘 한껏 멋을 부리고 등장했다.

네이비 색상의 줄무늬 슈트를 입고 머리에도 잔뜩 힘을 줬는데, 이번 기회에 광고주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을 모양이다.

“이번 맥주 광고의 콘셉트는 실연입니다. 실연의 갈증을 맥주로 해소한다는 뭐 이런 내용이죠. 자세한 건 콘티를 참고해 주시고요. 30분 후에 리허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아! 의상은 저희 쪽에서 준비해두었으니 갈아입으시면 돼요.”

나와 황민규의 손에 콘티뉴이티(continuity)를 쥐어 주는 CF 감독 박지선의 말이다.

감각적인 색채와 치밀한 구성으로 요즘 뜨고 있다는 이 젊은 감독의 얼굴은 상당히 깐깐한 성격을 연상하게 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나긋한 것이 다행히 배우들에게 우호적인 것 같다.

30여 분의 대기시간이 생긴 나와 황민규는 대기실로 이동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촬영 때 입을 옷가지를 건네 준다.

무던한 블랙계열의 슈트였다.

반면에 황민규는 청바지에 캐주얼 재킷을 건네받고는 코끝을 찡그린다.

“우씨! 너는 정장 입고, 나는 청바지 입나 보네.”

그의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꼭 나와 같은 옷을 입겠다며 매니저를 시켜 기어이 같은 옷을 입었던 그의 열정이 떠올라서다.

“콘셉트가 달라서 그래요.”

스타일리스트가 입을 삐죽거리는 황민규를 보더니 난감하다는 듯이 말을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대기실 한쪽 구석에 앉아 콘티를 내려다보았다.

“내 건…….”

한 카페 안.

남자는 소개팅 자리에 나온 저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자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카페를 나가 버린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굴 만나도 헤어진 첫사랑의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나 보다.

“무난하네.”

아직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에 목마른 남자를 표현하는 되려나?

캐릭터를 고민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 건 왜 이래!”

대기실에 함께 앉아 있던 황민규가 짜증을 부린다.

나는 황민규가 탁자 위에 엎어 놓은 콘티를 집어 들었다.

“하하! 하하하!”

한 카페.

지금 이별하려는 남녀가 앉아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마음이 변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남자는 울먹거리며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여자가 카페 밖으로 나가버리고 혼자 남겨진 남자.

유독 맥주가 당기는 날이다.

“아! 뭐야! 나만 따귀 맞고! 야! 주시후! 너 지금 웃음이 나와?”

“광고주가 생각하는 형 이미지가 딱! 이런 건가 봐요. 하하하하!”

황민규가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했을 때 처음에는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었지만, 겪어 보고 나니 나쁜 놈은 아니었다.

성격이 조금 사차원이어서 웃긴 놈이었지.

그걸 알고 나서는 편하게 말을 터놓고 지내는 중이다.

물론 황민규가 가끔 따로 내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성유라에 관한 이야기라 일부러 안 받은 적도 있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번 촬영은 좀 힘들겠는데?

“왜요?”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떤 부분이요?”

“여자들이 날 쫒아 다닐 때 내가 싫다고 거절은 해봤어도, 아니! 내가 언제 실연을 당해봤어야 이런 표정연기를 하지.”

무슨 소리!

드라마 촬영장에서 황민규가 성유라한테 까이는 것을 직접 본 것만 해도 수십 번은 되겠다.

“형, 이 표정 한번 볼래요?”

“응?”

나는 입을 삐쭉 내밀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뭐야?”

“이거요? 형이 유라한테 한소리 들을 때마다 짓는 표정이요.”

“아! 이 시키야! 내가 언제!?”

“하하하! 하하하하! 유라한테 만날 까이면서 실연당해 본 적이 없대. 아, 나 너무 웃겨! 하하하!”

내가 신이 나서 웃자 황민규가 째려봤다.

그러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짝! 소리를 냈다.

이내 휴대폰을 꺼내 든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유라니?”

성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나 보다.

“사랑해.”

다짜고짜 내뱉은 황민규의 고백.

그리고 성유라의 고함이 내 귀까지 들려왔다.

“꺼지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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