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106화 혼자만 라이벌 (5)
어느 틈에 나타난 것인지 뒤에서 나타난 황민규가 성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성유라가 뒤로 고개를 돌리자 나 역시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어때?”
“뭐가?”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질문에 성유라의 한쪽 눈썹이 일그러졌다.
황민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입고 있던 오렌지 색상의 브이넥 티셔츠를 가리키더니 보란 듯이 가슴을 활짝 폈다.
“봐봐. 상큼 발랄하지? 비타민C가 저절로 충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아, 뭐라는 거야? 얼굴은 빵빵해 가지고 딱 탁구공 같구만.”
성유라가 툭 내던진 말에 황민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뒤돌아선 성유라의 팔을 끌고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왜 그렇게 심하게 말해?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저러는 건데.”
남의 연애사에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어제오늘 황민규의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니 내 코까지 짠내가 풍겨왔다.
“알아. 그런데 싫어!”
“흐음…… 그래. 네가 알아서 해.”
제3자의 입장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유라를 향한 황민규의 마음을 몰랐을 땐 저 사람이 왜 저러나? 싶었지만.
그의 유치한 행동들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나는 그저 황민규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 날.
촬영장에 나갈 준비를 하던 나는, 노란색의 티셔츠를 입었다가 다시 벗었다.
그리고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똑같은 옷을 두 개나 구입해 두었던 회색의 스트라이프 셔츠 두 개 중 하나는 입고 남은 하나는 종이봉투에 곱게 접어 넣었다.
내가 황민규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 *
“민규 씨, 시후 씨, 스탠바이 해 주세요.”
조연출의 말에 나와 황민규는 카메라 앵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는 것은 할 일 없이 촬영장에 나온 지 일주일 만이었다.
박은숙 작가는 촬영 전에 황민규에게 캐릭터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급하게 대본을 수정하고 없던 배역을 만든 터라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박은숙 작가가 황민규에게 만들어준 배역은 교생이다.
작가의 설명 내내 황민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느낌대로 해보겠다며 말했고, 곧 전승원 PD의 시작 사인이 떨어졌다.
“레디, 고!”
한참 학교에 나오지 않는 홍시연.
혹시나 연습실에는 나타나지 않을까?
수업은 빼먹어도 가끔 폐건물의 연습실에는 얼굴을 비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나는 오늘도 종일 수업을 빼먹고 폐건물의 연습실에서 홍시연을 기다렸다.
창밖을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진다.
오늘은 오지 않으려나 보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 교실에 들렀다.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 문을 열었는데, 며칠 전 우리 반에 배정된 교생이 문밖에 서있다.
“네가 동주지?”
“네? 네…….”
교생은 내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인마. 아무리 공부가 하기 싫더라도 수업에는 들어와야 될 거 아냐? 학생이 본분을 그렇게 져 버리면 되겠어? 피부만 좋으면 다야? 어우야! 얼굴에서 꿀 떨어지는 것 좀 봐.”
“네? 푸웁!”
거기서 피부 얘기가 왜 나와?
대본과는 너무 다른 갑작스러운 애드리브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설마하니 근엄하게 혼을 내야 하는 분위기에 이런 애드리브를 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촬영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니, 민규 씨. 거기서 웃겨 버리면 어떻게 해요? 시후 씨 볼을 살짝 꼬집고 홀딩해야 하는데.”
“자, 다시 갑시다!”
박은숙 작가와 전승원 PD가 한마디씩 했지만 깔깔거리고 웃는 것이 촬영장의 분위기는 꽤 좋았다.
“아, 네!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이 튀어나왔네요. 다시 갈게요.”
이 신은 재촬영을 하면서 단번에 오케이를 받았다.
내가 며칠 동안 봐온 그의 엉뚱하고 유치한 면모들은 카메라가 돌 때만큼은 볼 수 없었다.
본인의 입으로 연기 고수 어쩌고 할 때는 그저 자아도취에 빠진 웃긴 놈인 줄 알았더니.
레디, 고! 소리만 나면 황민규는 표정은 싹 달라졌다.
그때만큼은 내가 TV에서 보아오던, 그야말로 톱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었다.
물론 매번 그렇지는 않았다.
가끔은 지나치게 연기에 몰입하는 것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극중 김동주와 홍시연이 자주 찾는, 연습실이 있는 폐건물.
이곳은 김동주에게 아주 중요한, 홍시연을 만날 수 있는 비밀의 장소였다.
어느 날 학교 측에서는 이 건물의 출입구를 모두 폐쇄하고 철거를 시작했는데, 김동주는 몰래 폐건물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이때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교생 역을 맡은 황민규다.
“레디, 고!”
그는 가지 말라며 내 팔을 잡았다.
“위험하다니까! 가면 안 돼!”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뒤따라온 그가 이번에는 내가 입고 있는 교복 셔츠의 소매를 붙잡는다.
“놔요! 가야 한다고요!”
그의 손을 걷어내려는데 얼마나 꽉 쥐고 있던지 뿌리쳐지지 않는다.
“놓으시라고요!”
“절대 못 놔!”
나는 힘을 주어 그의 팔을 뿌리쳤다.
찌이이익!
내 옷 소매가 찢어지든 말든 황민규의 열혈 연기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내 뒷덜미를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이대로 계속 촬영을 해야 하나 싶은데, 전승원 PD의 컷 사인이 들려오지 않으니 황민규는 끝까지 나를 물고 넘어졌다.
“이거 놔요! 아! 놓으라고!”
땅에 엎어져서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황민규를 보니 발로 확!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두둑! 하고 실밥 터지는 소리를 들으니 이렇게 붙들려 있다가는 바지도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컷! 오케이!”
다행히 참사가 벌어지기 전에 전승원 PD가 컷 사인을 보낸다.
그런데도 황민규는 내 다리 한쪽에 팔을 감고 매달려서 역할에 몰입 중이다.
“선배님. 컷이요.”
“선배님? 오케이래요.”
“선배님!! 끝났어요. 놓으셔도 돼요.”
“아, 이것 좀 놓으시라고요! 진짜!”
네 번이나 놓으라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황민규는 내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붙들려있던 다리가 자유로워지자 나는 찢어진 소맷자락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의 옆을 지나쳐갔다.
“시후 씨.”
황민규가 나를 불러 세운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네?”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내가 눈을 끔벅거리자 황민규가 피식 웃었다.
“일으켜 세워주고 가야죠. 부축도 해주면 더 좋고요. 무릎이 다 까졌거든요.”
“세상에…….”
“원래 나 같은 연기 고수들은 몸을 불살라서…….”
“아, 네!”
나는 황민규와의 촬영 내내 그의 지나친 연기 열정 때문에 몹시 시달렸다.
하지만 느끼기에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엉뚱한 면을 가지고 있고, 자아도취가 아주 심한 배우였다.
* * *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첫 방송 날이 다가왔다.
ABS방송국과 청룡스튜디오에서 시청률 때문에 막대한 관심을 가지고 첫 방송을 지켜보는 것은 그 전과 같았다.
첫 방송의 시청률은 19.4%였고, 2회 방송의 시청률은 조금 더 오른 23.6%였다.
그 전에 출연했던 <왕의 신하>에 비하면 아쉬운 면이 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왕의 신하는 톱배우 4명이 주연을 맡았고, 그 외에도 얼굴이 흥행보증수표인 많은 배우들이 참여했지만, 이번 드라마에는 나와 성유라가 끌고 가는 드라마이다.
또한, 조연 배우들도 오디션을 통해 뽑은 아직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이었으므로 그에 비해 1, 2회의 시청률은 제법 많이 나온 터라 앞으로 더욱 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방송국과 제작사에서는 생각보다 많이 나온 시청률에 축제 분위기였는데, 촬영장에서는 다른 이유로 축제 분위기였다.
드라마 2회가 방송을 탄 다음 날.
“짧게 잡아도 3개월은 족히 걸릴 줄 알았는데…… 딱 두 달 만에 끝나네요.”
전승원 PD는 시원섭섭한 표정이다.
3개월로 예정했던 드라마 촬영이 오늘로 끝나기 때문이다.
“확실히 16부작은 좀 짧네요. 다음번에는 대하 사극 같은 거로 한 90편으로 가죠.”
전승원 PD의 말에 박은숙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90편이요? 아이고! 한 5년 후에나 찍을 수 있겠네요. 그 드라마.”
드라마의 시청률이 꽤 잘 나왔기 때문의 촬영장의 마지막 분위기도 무척 좋았다.
헤어지기 아쉬운 것은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만, 어쨌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마지막 신은 학생들이 졸업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여기 보세요!”
나와 성유라를 포함한 학생들은 카메라 앞에 모여섰다.
총 세 번의 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전승원PD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제작진과 배우들은 서로 수고하셨다며 박수를 보냈다.
“이제 끝났네?”
성유라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게. 그동안 수고했어.”
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성유라는 폴짝 뛰어와 나를 끌어안는다.
“야! 이제 홍시연 아니야. 그만 배역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
내 말에 성유라는 내게서 떨어지며 활짝 웃었다.
“마지막이잖아.”
마지막이라는 말이 마음에 거슬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 * *
나의 24번째 생일에 벌어진 팬 미팅 현장.
차에서 내려 행사장 입구는 걸어가는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팬들과 기자들이 따라 걷는다.
오늘의 경호를 맡은 업체에서는 이들이 내게 조금만 다가오려 해도 가차 없이 막았는데, 나는 이럴 때 제일 마음이 불편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부탁드려요.”
인파에 서로 파묻힌 사람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에 경호원들에게 부탁했다.
아마 이들은 팬 미팅 장소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들일 것이다.
일단 건물 밖에 있는 인원은 김남규 팀장이 말했던 200명이 훨씬 넘었고, 초대받은 팬들은 이미 행사장 안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었다.
내 추측대로 내가 행사장 건물 입구에 서자, 경호원들이 일렬로 서서 통제를 시작한다.
그대로 들어가려던 나는 망설이다가 뒤로 돌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두를 하나하나 다 챙길 수 없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생일 팬 미팅은 B&M 엔터테인먼트의 팬 마케팅실과 팬클럽 ‘주슈’의 합작으로 이뤄진 깜짝 이벤트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서서 무대에 오르자 주슈의 팬클럽 회장인 강소미가 초를 밝힌 케이크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선다.
생일 축하 노래가 장내에 울려 퍼지고, 촛불을 불어 끄는 것으로 팬 미팅은 시작되었다.
팬 미팅의 사회를 자청한 진국이 신나게 입담을 자랑하는 사이, 무대에 오른 나는 이곳에 모인 팬들을 둘러보았다.
한국, 일본, 중국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축하해 주러 온 팬들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색도, 외치는 말들도 달랐지만, 한마음으로 축하해 주는 팬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맨 뒤쪽에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누구길래?’
사설 경호원을 네 명이나 뒤에 달고 앉아 있는 그녀의 신분이 궁금해진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