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104화 혼자만 라이벌 (3)
“야! 여기야, 여기! 주시……훕!!”
멀리 보이는 친구들.
그중에 곽병준이 나를 보며 큰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부르다가 이광택에게 입막음을 당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것은 남들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마침 곽병준에 대한 이광택의 행동은 참으로 적절한 대처였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이광택에게 보여주고는 친구들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곽병준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멀리 있는 내게도 다 들릴 정도였다.
“얀마! 입을 왜 막아!? 친구 이름도 못 부르냐? 내가 홍길동이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지도 못하냐고!”
곽병준의 볼멘소리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놈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 봐도 참 철이 안 든다.
내가 뛰듯이 걷고 친구들과 나의 거리를 서로 좁히자 곧 그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잘 지냈냐?”
“왔냐?”
“촬영 끝났냐?”
“어.”
남자들의 대화는 참으로 짧았다.
사실 이 친구들과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말하지 않아도 원래 잘 통했던 놈들이니까.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러움, 친숙함.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의 모습이었다.
“아! 이쪽은 우리 팀장님! 알지?”
“알지…… 너를 길거리에서 캐스팅해 주신 감사한 분이시잖아.”
“맞다! 예전에 한강에서 버스킹하고 봤었네!”
“팀장님. 저도 노래는 조금 합니다.”
친구들이 김남규 팀장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때 갑작스럽게 곽병준이 자기 PR을 한다.
김남규 팀장은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하하하 웃으며 곽병준의 인사를 받아쳐 주었다.
“이 친구가 이벤트 회사에서 스텝으로 일하고 있다는 그 친구구만!”
“어? 저를 아세요? 네…… 그게 저 맞습니다. 아무리 노래하는 게 좋아도 연습생 생활 9년은 못해 먹겠더라고요.”
곽병준은 내가 데뷔하기 전에도 작은 연예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7년 차로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습생 생활을 청산하고 취직을 했다고 했다.
꿈을 쫒는 것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했었다.
곽병준은 조금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힘없이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짝! 하고 손뼉 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속 쓰린 얘기는 그만하고, 이제 뭐 할 거야?”
내 질문에 최정근은 손에 들고 있는 종이봉투 몇 개를 내 눈앞에 들고 흔들어 보인다.
“이거 간단히 먹고 여기서 조금만 놀다가 가자. 오랜만에 버스킹 스케줄 잡았거든.”
“야! 무슨 버스킹이야?”
“인마, 우리도 오랜만에 해보는 거야. 그리고 무조건 해야 돼. 여기 공연장에 스케줄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여기서 버스킹 하다가 캐스팅 당한 건, 이쪽바닥에서 알만한 애들은 다 안다고! 여기가 아주 버스킹의 명소가 됐어. 너 때문에.”
곽병준은 엔터테인먼트 연습생으로 있다가 이벤트 회사에 취직했고, 최정근은 대학을 졸업하고 실용음악학원에 강사로 취직했으며, 이광택은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갈고 닦은 피아노 실력으로 현재 유명한 재즈 팀인 ‘재즈 사가’의 일원으로 각종 재즈 공연을 섭렵 중이다.
모두들 바빴기에, 이들은 예전에 나와 함께 버스킹을 했던 후로 다시 이곳에서 뭉치게 된 것이 오늘 처음이었다.
나는 최정근이 손에 들고 있는 음식들은 반가웠지만 버스킹이라는 말을 듣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 설마 나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지금껏 일하다가 왔는데, 그럼 양심도 없는 거다?”
내 말에 최정근이 히죽 웃는다.
“안 시켜 인마! 네가 한 곡 하고 싶다고 하면 또 모를까? 너는 팀장님이랑 앉아서 구경해. 아! 맥주도 사 왔어.”
“오케이! 내가 팀장님한테 재미있게 해 드린다고 했으니까, 니들 공연 잘해라?”
내 말에 친구 놈들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버스킹이 재미있을 게 뭐가 있냐 라는 표정들이다.
잠시 후.
한강시민공원의 한쪽에서 시작된 신나는 비트가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기본은 MR이다.
버스킹하는 멤버들만으로는 드럼과 베이스를 소화할 수 없으므로 MR 반주를 틀어놓고 곽병준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주말 저녁이라서 그런 것인지, 밤공기가 선선하고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이 불어서인지, 해가 지자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갑자기 불어났다.
그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트 소리에 이끌리듯 버스킹을 시작한 청년들의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이광택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곽병준이 감미로운 발라드를 뽑아내고 있다.
그 노래가 꽤나 들을 만했던지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무대 앞에 층층이 나있는 계단에 올라앉는다.
저마다 계단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거나 맥주를 들이켜는 것을 보고 나와 김남규 팀장도 최정근이 건네준 종이봉투를 열었다.
곧 나와 김남규 팀장의 한 손에는 젓가락, 한 손에는 캔 맥주가 들려졌다.
우리 둘은 괜히 이 분위기에 신이 나서 캔을 부딪쳤다.
김남규 팀장은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더니 나를 빤히 본다.
“왜요?”
“아니, 그냥. 이런 데 앉아서 맥주를 마셔보는 것이 언제였던가 싶어서. 예전에 나도 어렸을 적에는 친구들이랑 자주 왔었거든. 그때도 버스킹을 하던 애들이 있긴 했는데, 하하하! 엉터리들이었지. 실력 있는 애들은 거의 없었어. 지금은…… 내 친구들은 이제 정말 이런 곳에 모여서 시간 보내는 걸 못하거든. 가정이 있는 놈들도 있고, 가게 때문에 바쁜 놈들도 있고. 나도 일하느라 바쁘고…….”
김남규 팀장이 젓가락으로 치킨 강정 하나를 집어 들어 베어 문다.
“음! 맛있는데? 그래도 네 덕분에 오랜만에 재밌네. 하긴, 너랑 같이 있으면 항상 스펙터클 하지. 사고를 하도 쳐서 말이야.”
“에이. 제가 언제 사고를…….”
“야! 사고가 딴 거냐? 연예인이 다음날 인터넷 기사에 이름이 도배되면 그게 사고지.”
김남규 팀장이 피식하고 웃는다.
그때 엠프를 통해 귀에 익숙한 노래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최정근이 기타로 연주하는 「I want you」, 내 싱글 앨범의 타이틀 곡이었다.
“아, 그래요? 그럼 오늘도 사고 한번 쳐요?”
“야야! 아서라. 하지 마.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오늘은 시끄러운 거 싫단 말야.”
나는 씨익! 하고 웃었다.
그러자 김남규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다.
이미 체념한 듯 누가 말리겠냐는 표정이다.
나는 친구 놈들을 바라보았다.
네 노래가 나오는데 안 나오고 배기냐 이런 표정들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친구들이 턱으로 마이크를 가리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노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스크는 잠시 턱 밑으로 내려둔 나.
대신 고개를 푹 숙인채로 마이크를 잡았다.
뒤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 항상 곁에 있는 너.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너의 존재는 항상 힘이 돼.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첫 소절을 부르자, 딴짓을 하고 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두 번째 소절을 부르자 여기저기서 오!! 하는 탄성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제일 앞에 앉은 한 여성이 옆에 앉은 친구에게 조용히 말했다.
“주시후랑 목소리가 똑같아! 완전 잘 부른다, 야.”
“야, 주시후가 할 일 없어서 여기서 버스킹을 하겠냐?”
뒤에 앉아서 초집중하며 기타를 치던 최정근을 빼고, 나머지 두 친구들은 이 얘기를 들었는지 조용히 킥킥거린다.
Baby, I want you. 너의 미소. Baby, I want you. 너의 사랑.
Want you. Want you. 원해. 너의 모든 것. 나만 바라봐줄래.
후렴부분에 들어서자 노래를 듣던 관중들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야, 주시후 아니야?”
“에이, 설마…… 주시후가 왜 여깄어?”
“턱선 봐봐! 주시후 맞다니까?!”
뒤에서 킥킥거리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심지어 곽병준은 개미만한 목소리로 ‘얘, 주시후 맞아요.’ ‘야, 얼굴 좀 보여 드려라.’하고 속삭인다.
풉! 하고 웃음이 터진 나는 노래를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서 정리하고 관중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야! 맞잖아! 주시후!”
“그 봐! 내가 주시후 같다고 했지!”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오고 구경하던 관중들이 모두들 손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뜻 시민들 속에 섞여 앉아있는 김남규 팀장을 봤는데,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 * *
성유라는 촬영장에 도착해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찾는 것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성유라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
“동주 어디 갔어요?”
이를 익히 알고 있는 스텝들은 성유라가 묻기도 전에 대답을 했다.
“시후 씨는 아직 안 왔어요.”
“아……네.”
그녀는 촬영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내가 다리를 꼬고 눈앞에 앉아 있다.
성유라와 눈이 마주친 사내는 팬을 마주한 연예인 같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인다.
“어이!”
“에잉? 민규 오빠? 오빠가 왜 거기 앉아 있어?”
“꼬맹이! 오빠를 봤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지?”
이번 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했다는 황민규다.
그는 옆에 빈 의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성유라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어. 안녕?”
대충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 성유라가 황민규의 옆에 앉는다.
“오늘 왜 왔냐니까? 오빠 촬영은 다음 주부터 아니야?”
“너도 내가 드라마에 합류한다는 소식 들었구나?”
“뭐가 합류야? 카메오로 잠깐 나오는 거면서.”
성유라가 입을 삐죽거린다.
아마 그녀는 황민규가 촬영장이 나타난 것이 썩 좋지는 않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민규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하하하! 내가 잠깐 나오는 거라 너도 속상하구나? 나는 오늘부터 매일 나올 거야. 촬영장 분위기에 익숙해져야지. 나 같은 연기 고수들은 원래 그렇게 해. 연기 잘한다는 말은 괜히 듣는 게 아니지. 이런 노력이 필요한 거야. 알아? 꼬맹이?”
“에이씨! 말끝마다 꼬맹이래!”
눈을 가늘게 뜨고 황민규를 째려보던 성유라는 촬영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갑자기 표정이 싹 변했다.
“시후 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성유라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표정이 환해지자 이번에는 황민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스태프들과 인사하며 촬영장으로 들어서는 사내.
주시후를 보고 성유라는 쪼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동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어머나! 이 옷은 어디서 산거야? 너무 잘 어울린다!”
주시후가 입은 하늘색 셔츠에 눈길을 돌린 성유라의 칭찬이 마르지 않는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황민규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어? 아…… 고마워. 늦을까봐 대충 걸쳐 입고 나온 건데.”
“대충이라니? 이런 색 셔츠는 아무나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동주 정도의 얼굴과 신체가 뒷받침되야 하는 거라고!”
주시후와 성유라의 대화를 듣던 황민규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져있는 그의 매니저에게 손짓을 했다.
“왜요, 형?”
“주시후 저 셔츠 말야. 어디서 산건지, 아니면 어디서 협찬받은 건지 알아봐.”
“그건 왜요?”
“아! 똑같은 거로 사오라고!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