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혼자만 라이벌 (2)
한강이 유유자적 흐르며 물결을 만들어내고 그 위로 달빛이 비쳐 강 위로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린다.
팔짱을 끼고 서서 거실 창문 너머로 이를 쳐다보고 있던 사내.
올해 27살이고 배우로 데뷔한 지 6년차인 황민규다.
톱스타 반열에 있는 그를 두고 수식하는 말은 참 많다.
잘생겼다. 끼가 많다. 말을 잘한다…….
사실 그는 연기보다 다방면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ASA 방송국의 공채 탤런트 출신이지만 드라마보다 CF나 쇼 프로그램 MC로 더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바탕 해주는 근거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입으로 ‘나는 배우이기보다는 아이돌에 가깝다.’라고 발언을 했던 적도 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발로 연기 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대사를 읊는 목소리도 좋은데다 감출 수 없는 끼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므로 그의 연기는 오히려 볼 만했다.
미동도 없이 서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갑자기 귀에 들리는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삑삑삑! 삑삑삑!
덜컹! 하고 현관문이 열리며 그의 매니저가 거실로 들어선다.
한쪽 귀에 휴대폰을 대고 통화를 하며 들어오는 매니저를 보더니 황민규가 그를 불러 세웠다.
“빨리 와서 앉아 봐. 뭐래?”
매니저는 황민규를 한번 쳐다보더니 손을 들어 그가 더 말하려는 것을 저지시키고는 통화를 이어나갔다.
“네. 일단 형한테 그렇게 말씀은 드려볼게요. 그런데 하신다고 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통화를 종료하고 나자 황민규가 매니저의 팔을 붙들고 소파에 강제로 앉힌다.
그는 조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매니저에게 물었다.
“뭐라는데?”
재촉하는 황민규와는 달리 그의 매니저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사실 그는 그의 아티스트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달갑지가 않다.
어디 가서도 외모나 명성으로 전혀 빠지지 않는 톱스타가 대체 왜 저러는지.
요즘 황민규가 MC를 맡고 있는 음악 프로그램만 해도 그렇다.
걸 그룹 멤버들이 그렇게 대기실 문을 두드려도 모른척하기 일쑤고, 여배우들이 전화번호 좀 알려 달라고 해도 질색을 하는 그가 왜 성유라만 문제에만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지…….
“에휴.”
한숨을 내쉬던 매니저는 황민규가 눈만 끔벅거리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흔든다.
“꼭 하셔야겠어요? 아니, 형님이 뭐가 아쉬워서요? 나중에 성유라 씨랑 작품하나 하시면 되잖아요.”
“아니, 됐고!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니까? 방금 누구랑 통화했는데?”
“최실장 님이 드라마 제작진 측과 통화를 해보셨는데 정 출연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라고 했대요. 그런데 촬영 종료까지 5화밖에 남지 않아서 갑자기 비중 있는 역할을 만들어 내는 것은 힘들다고…….”
황민규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언성을 높였다.
“카메오로라도 출연한다니까!”
“네, 네. 하세요. 카메오로 출연하시래요. 박은숙 작가님께서 배역 하나 만들어 보겠대요. 대신 출연료도 없어요. 우정 출연이니까요.”
체념하듯 고개를 젓는 매니저의 답을 듣고는 황민규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하하하! 상관없어! 같은 드라마에 출연만 할 수 있으면 돼. 유라는 몰라도 시청자들은 분명히 알 수 있게 되겠지. 나와 저 시키의 피지컬 차이를! 두고 봐. 내가 촬영장을 내 매력으로 다 씹어 먹어 줄 테니. 주시후! 이번에 널 아주 오징어로 만들어 줄 테다!”
* * *
“네? 황민규가? 황민규가 왜요? 안 됩니다. 안 된다고 하세요.”
전화통화를 하며 박은숙 작가를 힐끗거리던 전승원 PD는 작가의 눈치를 보다가 단호하게 못 박고, 전화를 끊었다.
“왜요? 황민규가 왜요?”
박은숙 작가가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승원 PD에게 묻는다.
이에 전승원 PD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을 툭 던졌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글쎄 황민규가 갑자기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잖아요.”
“그래요? 캐스팅 끝난 지가 언젠데 인제 와서 왜 그럴까?”
전승원 PD는 박은숙 작가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녀가 궁금한 반응을 보이자 조금 전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야…… 배우들은 박 작가님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좋은 시나리오에 좋은 감독이 찍는 드라마인데, 누군들 안 하고 싶어 하겠어요? 하하하!”
전승원 PD가 박은숙 작가를 추켜세우자 확실히 반응이 온다.
사람들은 대부분 칭찬에 약하니까.
“그렇……긴 하죠? 그런데 어쩌죠? 지금에 와서 새로운 인물을 넣자니 극의 흐름 상 너무 튈 것 같은데. 그리고 주연들이 이미 결정되어있는 상황에 황민규가 투입된다고 해 봤자 조연이에요. 만날 주연만 맡아하던 그 친구가 조연을 할까 싶기도 하고요.”
“아! 황민규 소속사에서는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흐음…… 그 정도는 괜찮겠네요. 카메오라도 괜찮다면 그러라고 해요.”
“정말요?”
전승원 PD는 깜짝 놀랐다.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박은숙 작가가 단번에 오케이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전승원 PD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큰 배역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정 출연을 하겠다는데, 그렇게 되면 출연료도 안 나가고 드라마 홍보도 되니 일석이조였다.
사실 방금 청룡 스튜디오의 대표와 통화를 마치고 난 전승원 PD가 노린 것은 이것이었다.
박은숙 작가의 의중을 떠본 후 그녀 입에서 오케이 허락이 떨어지는 시나리오.
황민규 정도면 시청률에 불을 지펴줄 땔감으로 차고 넘쳤는데, 이 땔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겠다니 이런 기회를 놓치기에는 아까웠다.
“그래도 그렇게 되면 작가님이 어느 정도 대본 수정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박은숙 작가의 눈치를 보며 전승원 PD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우리 드라마를 위해서라는데 출연할 인물 하나 넣는 게 어려운 일이겠어요? 뭐, 상관없어요. 배역은 적당한 것으로 골라 보죠.”
* * *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저물기 시작하자 촬영장이 몹시 시끌벅적하다.
스텝, 제작진들은 카메라와 장비를 세팅하느라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였다.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 의 오늘의 촬영장소는 한강시민공원이다.
노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신을 찍어야 했기에 모처럼 야외촬영을 나온 것이다.
“아!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가겠네? 시후야, 이따가 촬영 끝나면 회나 한 접시 먹으러 갈까? 아니면 네 집에서 같이 배달 음식이라도 시켜먹든가? 아, 배달 음식은 좀 질리지?”
김남규 팀장은 요즘 계속 되는 밤샘 촬영에 많이 지쳤다고 어필한다.
차에서 계속 잠만 자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함께 저녁을 먹자는 얘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 오늘 저는 약속이 있어요. 친구들 만나기로 했거든요.”
“응? 어디서? 어떤 친구들인데?”
“요 옆에 시민공원에서요. 아! 팀장님 그거 기억나세요? 예전에 저 처음 만났을 때요.”
김남규 팀장은 머리를 긁적이다 비로소 생각이 났는지 아! 하고 이마를 쳤다.
“널 처음 만난 곳에 여기구나. 그때 버스킹하던 너를 보고 내가 명함을 주었지!”
“네. 맞아요.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어요. 애들이 온다고 하네요?”
한강 둔치에서의 해야 하는 촬영은 단 한 컷!
촬영이 빨리 끝날 것이 분명했기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은 터다.
“하아……네 약속이 곧 내 약속이잖아.”
김남규 팀장은 이것을 미리 얘기하지 않은 내게 서운한 표정이다.
오늘 저녁에는 같이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해피 라이프를 꿈꿨던 모양이다.
김남규 팀장의 표정이 뾰로통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요즘 공식적인 스케줄이든 비공식적인 스케줄이든 김남규 팀장은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드라마 촬영 외에는 거의 방송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데다가 극중 성유라와의 키스 신이 홍보 자료로 인터넷에 뿌려지면서 파파라치들이 극성을 부리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성유라와 나와 엮어 보겠다는 것이겠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김남규 팀장은 어쩔 수 없이 나와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야만 한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다 틀렸다는 말이다.
나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어 김남규 팀장에게 말했다.
“재미있게 해 드릴게요. 크크큭!”
“퍽도 재미있겠다! 애들끼리 노는 게 다 그렇지 뭐! 짜식들이 말야. 피 끓는 청춘들이 클럽 같은 곳을 가야지. 건전하게 한강시민공원이 뭐냐?”
김남규 팀장이 한숨을 푹푹 쉰다.
그러더니 뭔가 비밀스러운 것이 생각난 듯 조용히 목소리를 깔았다.
“너 황민규 알지?”
“네. 배우잖아요? 요즘 음악 프로그램 MC 하던데?”
내가 알은척을 하자 김남규 팀장의 말이 이어진다.
“그래. 그 황민규가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했다던데?”
“그래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카메오로 출연할 건가 봐. 그래서 대본이 조금 수정될 거라고 아까 박은숙 작가님이 말씀하시더라고. 대본은 일주일 안에 뽑아주신대. 아우, 어쩌냐? 또 다시 외워야 되잖아.”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남규 팀장을 보며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사실 나는 반지의 고유 능력 때문에 뭐든 한 번 보면 외워 버린다.
때문에 대본이나 악보, 혹은 노래가사 같은 것을 외우는 게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괜찮아요. 금방 외워요. 그런데 좀 의외네요. 황민규 같은 톱스타가 웬 우정출연이죠? 대체 누구랑 그렇게 우정이 깊길래? 하하하하!”
“너도 슬슬 나이 먹냐? 웬 아재개그야? 하하하하”
김남규 팀장과 웃고 떠드는 사이에 카메라와 장비 세팅이 끝났는지 스탭 한 명이 나를 데리러 왔다.
한강시민공원의 잔디밭.
나는 그곳에 앉아 전승원 PD의 큐 사인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태양이 뭉그러지며 하늘을 서서히 붉은 빛으로 잠식하는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고 이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렇게 여유 있게 사색을 즐겨본 것이 언제 적 일이었는지 기억을 더듬게 된다.
그러고 보면 항상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정신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혼자 잔디밭에 앉아있자니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든다.
‘내 주위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항상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구나.’
묵묵히 내 옆을 지키는 김남규 팀장, 뒤에서 응원하는 우리 식구들.
만나면 항상 티격태격해도 소중한 내 동료 배우들, 친구들. 그리고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팬들까지.
이들과의 추억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해야지. 그들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 할 수 있는 거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책없이 내 왼쪽 속눈썹에 매달려있던 눈물 한 방울이 뚝! 하고 떨어지며 볼을 타고 흐른다.
누가 볼세라 나는 손등으로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컷! 오케이!”
하고 전승원 PD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며,
“네?” 하고 전승원 PD를 바라보았다.
“오케이라고요! 방금 신 아주 좋았어요! 자, 오늘 수고하셨어요. 철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