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혼자만 라이벌 (1)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촬영장.
첫 방송을 앞두고 인터뷰를 위해 리포터와 방송국 카메라가 촬영장을 찾아왔다.
ABS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 <한밤의 연예통신>.
처음보다는 두 번째가 낫다고, <왕의 신하> 촬영 때 한 번 봤던 스태프들이라 나는 별다른 긴장 없이 카메라와 마주했다.
예전에는 드라마 주·조연 배우들이 많아서 한데 모여 시끌벅적하게 인터뷰를 해서 즐거웠다.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른 분위기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 <말할 수 없는 시간>은 나와 성유라가 끌고 가는 드라마이기도 해서다.
“안녕하세요. <한밤의 연예통신>의 방슬기입니다. 저는 지금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촬영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시작 전부터 매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이 드라마의 두 주연배우들이 나와 계신데요. 주시후 씨, 성유라 씨. 먼저 <한밤의 연예통신> 시청자 여러분께 인사 좀 부탁드릴게요.”
리포터 방슬기의 소개로 나와 성유라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말할 수 없는 시간>에서 김동주 역을 맡은 주시후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시연 역을 맡은 배우 성유라예요.”
방슬기는 <한밤의 연예통신>의 10년지기 리포터이다.
그동안 많은 톱스타들을 만나고 인터뷰를 해온 베테랑이라 그런지 그녀의 진행은 매우 매끄러웠다.
“드라마의 첫 방송이 언제죠?”
“딱 10일 남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말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은 캐스팅 때부터 워낙 유명세를 탔던 터라 시청자분들도 아마 익숙하실 거예요. 아름다운 영상으로 유명하신 전승원 감독님과 히트 메이커이신 박은숙 작가님의 합동 작품이라 더욱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인데, 거기에 주시후씨의 캐스팅 소식과 성유라씨의 합류가 결정되며 드라마 시작 전부터 반응이 너무 뜨겁습니다. 어떤 드라마인지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방슬기의 질문에 성유라가 입을 열었다.
“이 드라마는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어요. 먼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계시듯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출연하는 음악 드라마입니다만, 예술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학원물이기도 해요. 또한,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을 그린 로맨스 드라마이기도 하고요. 드라마가 아직 방송 전이라 스포일러를 뿌리는 것이 될까 봐 섣불리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판타지적인 요소도 분명 등장합니다. ‘어떤 장르다’라고 국한되어 있지 않은 드라마라 관전 포인트를 여러 곳에 두시고 시청하신다면 많은 장르의 드라마를 한 번에 만나보실 수 있을 거예요.”
“유라 씨의 설명만 들어도 벌써 너무너무 기대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로맨스를 무지 좋아하기 때문에 저는 로맨스가 기대됩니다. 아 참! 성유라 씨는 원래 발랄하고 쾌활한 캐릭터로 이미지가 굳어져 있잖아요. 그동안 드라마에서 명랑한 모습만 보여 주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조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신다고 들었어요.”
방슬기의 질문을 받은 성유라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에 들어갔다.
제작진들이 인터뷰 시작 전에 질문이 적힌 큐시트를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 방슬기의 입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 거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터다.
“네. 이번엔 좀 달라요. 그동안에는 제가 해맑은 성격의 캐릭터를 고집했던 것이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한번 역할을 맡으면 평상시에도 잘 빠져나오지 못하고 드라마 촬영이 종료될 때까지 그 캐릭터로 살아요. 그 캐릭터가 저인지, 제가 원래 그런 캐릭터인지 저도 구분하기 힘들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음…….”
대답하던 성유라의 얼굴에 잠시 곤욕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머뭇거림은 잠시.
그녀는 곧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사실 그렇게 발군의 연기를 하는 연기자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역에 몰입하기 위해 그 캐릭터로 사는 거죠. 그러다 보니 우울하고 음침하고, 악랄한 캐릭터를 맡게 되면 제가 못 버텨내겠더라고요. 예전에 대학교에서 연극을 할 때 실제로 같은 과 동기들한테 욕도 많이 먹었거든요. 알고 보니 못됐다는 둥 싸가지가 없다는 둥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어요. 나중에야 제 연기 방식이라는 걸 알고 이해는 해주었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이번 드라마에서 연기 변신을 하시게 된 이유는 뭐예요?”
“변신이랄 것까지는 없어요. 그 전과 같이 티 없는 캐릭터랍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차분해졌죠. 그리고 성숙해졌죠. 그건 시후 씨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해요. 극 중 김동주라는 남자는 홍시연이라는 여자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해요. 만지면 깨질 듯 조심스럽고 성숙하게 대하죠. 그런 사랑을 받다 보니 저도 깨발랄한 소녀에서 여자가 되더라고요. 아! 물론 극 중에서요!”
방슬기와 성유라가 둘이 마주 보며 호들갑스럽게 웃는다.
<한밤의 연예통신> 인터뷰 촬영 며칠 전, <말할 수 없는 시간>의 홍보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쫙 깔렸다.
방슬기와 제작진이 흐뭇해하는 저 표정으로 예상해 보건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나와 성유라의 키스 신 영상을 이미 보고 온 것이 틀림없다.
방슬기는 한참을 웃다가 이번엔 나를 보며 물었다.
“전승원 감독님과 박은숙 작가님이 이번 드라마는 주시후 씨를 겨냥해서 만드신 작품이라고 인터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이 두 분의 드라마에 또다시 출연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난도가 낮은 질문이다.
나는 방슬기를 보며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답을 말했다.
“두 분이 저를 미리 생각해 주셨다는 것에 그저 감사드릴 따름이죠. 제가 연기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제 두 번째 작품인데 제가 드라마를 고를 줄이나 알겠어요? 그저 감독님과 작가님을 믿고 가는 거죠. 또한 이번 드라마는 음악 드라마라는 점에서 상당히 이끌렸어요. 제가 가수라서 그런가 봐요.”
“아! 그렇죠! 주시후 씨는 가수이신데, 자꾸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네요. 혹시 드라마 촬영 중 힘들었던 점이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좀 말씀해 주세요.”
방슬기의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이번 드라마 촬영 때는 박은숙 작가님께서 촬영 현장에 항상 나와 계세요. 작가님께서는 항상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리허설을 하시는데, 그때 이것저것 주문하시죠. 연기에 관해서요. 그런데 차라리 ‘이번 신은 이렇게 해! 저렇게 해!’하고 지시해 주시면 편할 텐데,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이런 말씀을 주로 하세요. 배우들의 역량을 믿고 맡겨주시는 거지만, 저는 이게 부담이 많이 되더라고요. 제가 연기 경력이 짧아서 그런가 봐요.”
내 말이 끝나자 성유라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에이…… 말은 저렇게 해도 얼마나 잘한다고요! 일단 카메라가 돌면 눈빛이 싹! 돌변하는걸요?”
성유라의 말에 방슬기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성유라를 쳐다본다.
“어떻게 돌변하나요?”
“음. 평상시에는 제가 오빠! 오빠! 하면서 졸졸졸 따라다녀도 별로 반응도 없어요. 아!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저는 배역을 맡으면 촬영이 평상시에도 그 역에 엄청 몰입하거든요. 저번엔 실수로 촬영대기 중에 시후씨의 손을 잡은 적이 있어요. 스탠바이 중이라 감정을 살리려고 몰입하다가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죠. 그런데 시후씨가 말없이 자기 손을 쓰윽 빼서 주머니에 넣어버리더라고요. 어쨌든 제가 주변에 맴도는 것이 귀찮다 죽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다가도, 카메라만 돌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니까요.”
“아니, 유라 씨.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했다고…….”
“하하! 두 분의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네요. 촬영장 분위기도 너무 좋겠어요.”
* *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아파트.
척 보기에도 값비싼 가구들로 가득한 거실에는 한 사내가 소파에 등을 파묻고 앉아있다.
사내는 손에 든 리모컨을 조작해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TV를 보고 있던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것일까?
사내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활짝 웃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한번 거울을 쳐다보고 웃는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TV 화면을 다시 한번 보고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이씨! 어떻게 해야 저런 미소가 나오는 거지?”
짜증이 난 듯 미간을 확 찌푸린 그는 다시 소파에 앉아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네요. 촬영장 분위기도 너무 좋겠어요.”
“네. 그 어떤 드라마를 촬영했을 때보다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좋은 대본과 좋은 제작진과 촬영하는 것이 배우로서 가장 큰 행복이겠지만, 무엇보다 시후 씨가 항상 아껴주기 때문에 매일매일 사랑받는 느낌입니다. 아! 극 중에서 말이에요.”
TV 속의 성유라는 쳐다보기만 해도 비타민C가 충전되는 것만 같은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이를 본 사내도 덩달아 웃는다.
“짜식. 웃는 건 여전히 예쁘네.”
사내는 입꼬리를 실룩이며 웃다가 TV 속 리포터와 성유라의 다음 대화를 듣고는 다시 짜증을 내었다.
“성유라 씨가 본 주시후 씨의 장점이 있다면요?”
“음……. 일단 키가 크고 너무 너무 너무 잘생겼죠. 목소리도 너무 좋아서 촬영장에서 제 이름을 불러줄 때 설레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랍니다. 거기다가 성격도 좋아요. 주위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인맥도 남다르죠? 아! 그리고 이번 드라마를 함께 촬영하며 보니 손가락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출 때는 정말 섹시합니다. 단점이 없는 게 장점이지요.”
“그래요? 시후 씨 카메라에 예쁜 손가락 좀 보여주세요.”
그 순간 주시후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잡혔는데, 수줍은 듯 웃던 주시후가 손을 들어 카메라에 손가락을 보여준다.
“유라 씨가 너무 극찬을 해 주셨는데요……. 그저 평범한 손가락입니다.”
주시후의 말에 리포터와 성유라가 호들갑을 떤다.
“와우! 정말 백만 불짜리 손가락이네요. 가늘고 길고, 웬만한 여자분들 손보다 더 예쁘시네요. 비결이 뭐예요? 피아노를 치면 예뻐지나요?”
TV에서 거론되는 손가락 이야기에 사내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댔다.
“나도 어디 가서 손 예쁘게 생겼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저 시키는 남자 놈이 왜 이렇게 손가락이 예쁘냐? 저거 손에 물 한번 안 묻혀본 손인데? 아휴……. 성유라는 저런 샌님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방송에서 헤벌쭉하는 거야?”
사내가 보고 있던 예능 프로그램 <한밤의 연예통신>의 인터뷰가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한마디씩 해 주세요.”
리포터의 마지막 주문에 성유라와 주시후가 번갈아가면서 사이좋게 멘트를 한다.
“음악과 열정!
꿈과 풋풋한 로맨스!
그리고 판타지적인 요소까지!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이 6월 20일에 첫 방송을 합니다.
주말 저녁 저희가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사내는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계속 그의 신경을 긁는 듯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팍! 썼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후 건너편에서 응답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형.”
“야! 너 혹시 그거 알아? <말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왜 드라마 있잖아. 그거 작가 누구냐?”
“잠시만요. 형! 박은숙 작가님이랑 전승원 감독님 작품이라는데요? 청룡 스튜디오 제작 드라마래요. 그런데 그건 왜요?”
“나 그거 출연할라니까 감독님이랑 작가님이랑 조인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