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101화 새 보금자리 (3)
“이건 진짜 말이 안 돼!”
나를 비롯한 조연석, 한동하, 강화영, 채설아, 정해수, 문영호의 출연!
드라마에서 보는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많은 배우들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유재승이 MC을 맡은 예능 프로그램 <달리는 사람들>에 모두 출연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 홍보 차원으로 소속사에서 스케줄을 맞춰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실상은 어려웠다.
허리춤에 마이크를 채우느라 잠시 녹화가 중단된 사이에 유재승은 촬영장에 모여든 배우들을 훑으며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이건!”
“형은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말이 안 된다고 그래요?”
조연석이 히죽 웃으며 유재승에게 묻는다.
유재승이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에 그것이 웃긴 모양이다.
“연석아, 이것 좀 봐라.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 영순위 배우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마이크 차고 있는 게, 이게 현실이냐?”
유재승이 이번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덕분에 진국 씨는 이번 방송 나가면 확실하게 얼굴도장 찍겠네. 진국 씨 한 명 보러 톱 배우들이 연락도 없이 총출동했으니 말야. 그리고 시청률도 대박일거야 아마.”
유재승이 조연석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진국은 마이크를 채우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시후야. 와 줘서 고마워. 그런데 다들 어떻게 온 거야?”
“아! 형은 나 분가한 거 모르지? 요 앞으로 며칠 전에 이사 왔거든. 걸어서 한 2분 정도 걸리나? 오늘 나도 드라마 오전 촬영만 하고 끝났는데, 마침 다들 스케줄이 빈다기에 집들이 했거든.”
“아…… 그랬구나.”
진국이 고개를 끄덕인다.
와준 것이 상당히 고마운 표정이기는 한데 웃는 것이 씁쓸해 보인다.
집들이 부르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는 것 같아 나는 빨리 말을 이었다.
“회사에 물어 보니 형은 녹화 있다고 해서 일부러 전화 안 했어. 촬영 때문에 못 올 것이 뻔한데 괜히 놀자고 전화해서 마음만 들쑤셔 놓게 될까 봐 말야. 그런데 형이 카페에서 기다린다고 하길래 녹화가 빨리 끝났나 하고 한걸음에 달려왔지. 다들 이참에 형 소개해 달라는 말도 나왔고. 참! 설아 누나가 제일 먼저 형 부르자고 했어.”
내 말을 들은 진국의 표정이 감격스럽다.
그의 표정을 보니 방금 내가 한 변명이 꽤나 잘 먹혀든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촉촉하게 젖어드는 눈으로 채설아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것 같다.
하긴. 진국이 형은 처음 채설아를 봤을 때부터 여신님이라고 했었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국의 인사에 채설아가 흠흠! 하며 헛기침을 한다.
애써 못들은 척 하려던 그녀는 진국이 계속 쳐다보자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흠흠!!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씩이나? 정 그러면 다음번 멤버들 모임 때는 진국 씨가 고기 사요.”
진국은 입이 귓가에 걸려서는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채설아의 방금 발언은 그녀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어디에 구속되는 것을 좀처럼 좋아하지 않고, 항상 혼자였던 그녀가 모임이라고 말한 것.
그리고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그녀가 진국에게 다음 모임에 나오라고 말한 것.
이것은 진국을 새로운 친구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웃음이 났다.
사실 진국은 갓 데뷔한 가수치고는 어린 나이가 아닌데다가 예전 챌린지 프로그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아닌지라 스스로 의기소침해질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의 일이었는데, 진국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 내 휴대폰의 메신저 톡 알림음이 연달아서 계속 울린 적이 있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내 입에서는 탑 배우들과 가수들의 이름에 연이어 나왔는데, 진국의 그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보였던 적은 아마 이때였던 것 같다.
이제 진국에게 동료 연예인들이 왕창 생길 것이고, 그것이 나와 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괜한 뿌듯함에 계속해서 웃음이 난다.
그날 우리는 진국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다 함께 가까운 바에서 술을 마셨고, 기어이 노래방까지 갔다가 흩어졌다.
다음 날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진국의 이름이 떡 하니 올랐다. 각종 SNS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길거리를 활보하는 우리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셀 수 없이 떠돌았다.
* * *
서울 평창동에 있는 예술 고등학교.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촬영장이다.
“시현이 대사 다음에 동주가 대사를 치고! 그리고 시현이가 옆에 앉는다. 동주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빤히 본다! 대사치고! 웃는다. 그리고 컷! 이렇게 갈게요.”
전승원 PD가 이번에 들어갈 촬영 장면에 관해 설명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에서 컷을 할 것인지 전 작품에서는 그리하지 않았지만, 이번 드라마에서는 꼭 촬영 전에 전승원 PD의 브리핑이 있었다.
박은숙 작가가 저번 드라마에서는 대본을 집필하느라 현장에 얼굴을 비치는 일이 아주 드물었지만, 이번엔 대본이 최종회까지 모두 나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박은숙 작가는 대부분 현장에 나왔다.
전승원 PD의 이런 행동은 박은숙 작가를 의식한 것이었다.
혹시나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배우들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의중에서였다.
전승원PD의 설명이 끝나자 박은숙 작가가 나와 성유라에게 말했다.
“누차 말하지만, 편하게 해요. 학원물이다 보니 내가 학생들의 파릇파릇한 감정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기는 힘들거든요. 내 나이가 이제 오십이잖아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봐요. 감정 닿는 대로 애드리브 쳐도 되고요.”
박은숙 작가의 말에 성유라가 환하게 웃는다.
사실 그녀는 아까부터 생글생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감정선을 잡고 시작해야 한다나?
그간 드라마 촬영을 하며 본 성유라는 연기를 참 잘한다.
혹자는 그녀가 맡았던 명랑하고 쾌활했던 배역만 기억하며 연기 폭이 좁다고 말했지만, 내가 느낀 것은 달랐다.
그녀는 채설아의 대범함과는 다른 세심함을 가지고 있었고, 강화영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단단함이 있었다.
단 한 가지!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난감했던 것은…….
“동주야,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알겠지?”
한번 배역을 맡으면 너무 깊게 몰입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첫 촬영 때 했던 말이 불현 듯 떠오른다.
“저는 한번 촬영 들어가면 마지막 촬영 끝날 때까지 역할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해요. 그게 여태껏 제가 밝은 역할만 맡았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랬다.
그녀는 카메라 앞이든 밖이든 상관없이 홍시연이라는 극중 캐릭터를 연기했다.
아니, 연기를 했다기보다 그녀는 그냥 홍시연 그 자체였다.
“자, 카메라 돌아요! 레디, 고!”
* * *
연습실 가득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진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내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타고 춤추듯 흐른다.
지금 연주하고 있는 이 곡은 그 아이에게 들려 주고 싶어 내가 만든 곡이다.
이것을 들려 주려고 연습한 횟수가 무려 100번도 넘는다.
이제는 악보가 없어도 손가락이 기억하는지 건반을 저절로 두드린다.
오늘은 볼 수 있을까?
그 아이는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일까?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지만 어느 반인지 조차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홍시연이라는 이름.
나와 동급생이라는 것.
몸이 자주 아파 학교를 많이 빠진다는 것.
그리고 이 연습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는 것.
이 연습실은 이 학교의 학생들이 찾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
예전엔 학생들이 연습하는 공간이었겠지만, 조만간 이 건물을 헐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지을 거라며 지금은 폐쇄해 놓은 건물이다.
내 연주가 거의 끝나갈 때쯤 삐익! 하고 연습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이곳을 찾는 이가 없기 때문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왔다! 오늘은 왔구나!
나는 씨익하고 웃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어깨를 짚는다.
“뭐야? 처음 듣는 곡인데? 너무 좋다.”
홍시연이다.
나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내 어깨에 올라와 있는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
“이리 와 봐.”
내 왼쪽 옆에 홍시연을 앉혀 놓고 나는 그녀에게 들려주려 작곡한 이곡을 처음부터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란히 피아노 의자에 앉은 시현은 한참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마치 알고 있었던 곡이었다는 듯 피아노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리고 내 연주가 끝나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두 팔로, 내 한쪽 팔을 휘감았다.
“너무 좋아. 한 번 더 듣자.”
“그럴까?”
나는 시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얇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촉감이 너무 좋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눈을 살짝 감고 싱긋 웃었다.
시현의 미소에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며칠 동안 학교에 왜 안 나왔는지, 어디 아팠던 것인지, 그녀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려던 내 궁금증 또한 함께 녹아 내려 버렸다.
나는 그저 지금 이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기에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조금 전 연주했던 곡을 다시 한번 시작했다.
천천히 피아노 건반을 타고 움직이는 내 왼쪽 손가락위로 홍시현의 손가락이 살짝 얹어진다.
“왜?”
“나도 쳐 볼래.”
“그래. 그렇게 해.”
나는 왼손을 건반에서 떼어 냈다.
그러자 그녀의 왼손이 피아노 건반위에 얹어진다.
나는 오른손을. 그녀는 왼손을.
우리는 그렇게 한 곡을 나누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주를 하는 중간 중간 깜짝 놀랐다.
한번 듣고 이렇게나 완벽하게 칠 수 있다니 시현의 재능은 역시 뛰어났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내가 시현을 쳐다보자 그녀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
“너무 잘 쳐서…….”
“칫! 나는 가짜야. 흉내만 내는 거잖아. 진짜는 너지.”
그녀의 말에 내가 눈을 끔벅거리자 시현이 피식 웃는다.
“너는 피아노를 칠 때 제일 매력 있어. 나는 너의 그런 능력을 존경해.”
시현이 갑작스럽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수줍게 웃는다.
창문으로 한줄기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시현을 비춘다.
시현이 빛인지 빛이 그녀인지 모를 정도로 환하게 반짝인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턱에 살며시 손가락을 가지고 갔다.
내 얼굴과 그녀의 얼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 쉬면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
가까이에서 본 시현은 참 예뻤다.
큰 눈과 짙은 쌍꺼풀, 짙고 긴 속눈썹.
그녀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을 친다.
그녀가 완전히 눈을 감았을 때, 나도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입술이 그녀의 작은 입술위로 포개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나는 성유라와 꽤 오랜 시간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응? 왜 컷을 안 하지? 더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나는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성유라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보물을 쳐다보듯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성유라는 그때까지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내가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자 천천히 눈을 뜬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은 성유라가 한쪽 팔로 내 허리를 두른다.
‘아니, 왜 컷이 안 나와? 이러다가 19금 방송하겠네.’
나는 참다 못해 전승원 PD를 쳐다보았다.
전승원 PD와 박은숙 작가는 둘 다 팔짱을 끼고 앉아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성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님! 왜 컷을 안 하세요?”
“어? 아……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고 했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