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새 보금자리 (1)
청담동의 한적한 주택가.
아버지의 차 트렁크에서 몸뚱이만 한 이불 보따리를 꺼내 든 나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하얀색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회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싱크대 선반 위에 그릇이며 컵이며 분주하게 정리하고 계시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어, 왔어?”
“응. 아빠는 일하다 말고 뭘 이런 걸 가져다 주셨대? 그냥 사면 된다니까.”
“그래도 자식 놈이 분가하는데 이불 한 채는 해서 내보내야지. 시후야, 집 구경하고 있어. 금방 정리하고 엄마가 밥해 줄게.”
2층. 엄마가 서 계시는 깔끔한 흰색 조의 주방에는 싱크대와 선반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등 없는 게 없어 보인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장을 봐 오신 것인지 음식 재료가 한가득하였다.
회사에서 전부터 분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는 줄곧 있었다.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로드 매니저 김훈이든, 김남규 팀장이든 집에 나를 픽업하러 와야 했었는데, 강남에서 본가까지의 거리가 상당했기에 나온 말이었다.
분가를 한참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크게 마음먹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촬영 스케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보통 새벽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운전하는 매니저에게 미안함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잠을 안 주무시고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얼마전부터 또다시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서 시간을 내질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다가 집 알아볼 시간이 없어서 영원히 분가 못 한다며 김남규 팀장과 부모님께서 직접 나섰다.
부모님도 직접 내가 살 집을 골라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하셔서 그냥 맡기기로 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알아보는 것은 김남규 팀장과 부모님이 함께했고, 집 계약은 회사 측에서 진행해 주었다.
온갖 살림살이를 사다가 나른 것은 부모님이었고.
“이삿날은 짜장면 시켜 먹어야지. 힘들게 무슨 밥을 한다고…… 그리고 나 조금 있다가 촬영하러 가야 돼요.”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던졌다.
그러고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널찍한 거실에는 TV와 브라운 톤의 소파 사이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진열장에는 연말 드라마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와 내 사진으로 수놓은 액자가 가득하다.
여름을 대비한 에어컨 설치도 끝낸 상태고, 창문에 쳐놓은 커튼까지 완벽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앞에 높은 건물이 없어 햇살이 쭉 뻗어 들어온다.
나는 손바닥으로 이마에 그림자를 만들며 신난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다.
“앞이 탁 트여서 너무 좋네?”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다.
창밖으로 1층에 공원 하나만 보였는데 파릇파릇한 나무가 무성한 것이 몹시 보기 좋았다.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에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게 저 공원 덕분이야. 구에서 관리하는 거라서 이 앞에는 건물도 못 들어온대. 괜찮지?”
“응, 엄마. 너무 좋아. 고생하셨어요. 집 알아보시느라.”
나는 걸음을 옮겨 엄마가 침실로 정해놓은 방문을 열었다.
킹사이즈의 침대와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컴퓨터.
언제 이런 것들을 다 채워 놓으셨을까?
이번엔 작은방 문을 열어보았다.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의 드레스 룸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나는 뛰듯이 방을 뛰쳐나와 부엌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엄마를 끌어안자 엄마가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나를 쳐다본다.
“엄마, 사랑해요.”
“얘가 징그럽게 왜 이래?”
“고마워서 그러지…….”
“시키야! 감사한 줄 알았으면 요 앞에 마트에 가서 세제나 사와.”
“예쓰! 맘!”
* * *
“함께하면 즐거운 <해피 투데이>, 코너 속의 작은 코너죠. 자신의 인맥을 돌아 볼 수 있는, 진정한 절친이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는 시간! 어서 와, 친구야!”
청담동의 한 카페.
카페 3층에 전세를 낸 듯 입구부터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제작진들과 연예인들.
관계자들과 카메라 외에 일반 시민들은 한명도 없다.
국민 MC 유재승.
ABS 방송국의 예능프로그램 <해피 투데이>의 진행을 맡아 촬영 중이다.
그의 멘트가 끝나자 출연자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진다.
카메라 정면에 테이블을 길게 연결해놓은 뒤로 몇 명의 연예인들이 앉아있다.
아이돌 보이그룹 ‘히든보이’에서 랩 파트를 맡고 있는 조훈과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영표.
4인조 그룹이지만 이 두 명만 촬영장에 앉아있는 이유는 예전 <슈퍼 K-POP 스타 챌린지> 시즌 4에 출연하여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룹 대표로 나온 이 두 명은 MC 유재승의 왼편에 앉아 있고, 오른편에는 요즘 먹는 방송으로 아주 유명해진 개그맨 고준현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제일 긴장한 표정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국.
벌써부터 본인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걱정이 한 가득이다.
진국은 B&M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기고 나서 얼마 전에 3곡이 담긴 디지털 싱글을 발매했다. 음원 차트 순위 1위를 하고나자 <해피 투데이>의 출연 제안을 받아 출연한 상황이었다.
진국은 다른 가수들에 비해 인물이 뒤지는 것도 아니었고, 노래 실력도 꽤 좋았다.
무엇보다 싱글 음반에 실린 3곡의 발라드가 전부 주시후 작사·작곡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인기 또한 급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진국은 데뷔하고 나서 이것이 첫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다.
다행히 게스트로 출연한 조훈, 영표와는 <슈스챌>을 통해 익히 친한 사이였고, MC 유재승 또한 B&M 엔터테인먼트 송년회 때 인사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에 긴장은 조금 덜었지만 그의 얼굴빛이 파리한 이유는.
친구를 부르는 이 코너는 진국에게 있어서 상당한 부담이었다.
가수로 데뷔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어서 알고 지내는 연예인이 거의 없었다.
‘시후한테 전화해 볼까?’
진국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지금쯤 드라마 촬영으로 바쁠 것이 뻔한데 괜히 전화했다가 그가 못 온다고 하는 것이 방송을 타면, 기대감만 심어 주고 데려오지 못했다고 질책을 받을까 봐 걱정됐다.
진국이 고민하는 사이 조훈과 영표는 벌써 전화를 마쳤다.
래퍼계의 대부 ‘재규’를 불렀나 보다.
<슈스챌>에서 조훈과 미션을 함께 하며 친분이 쌓여 그동안 쭉 연락을 하고 지냈던 모양이다.
방송에 좀처럼 출연하지 않는 재규가 온다는 말에 제작진과 MC 유재승의 표정이 환하다.
옆에 앉은 개그맨 고준현은 동료 개그맨인 박민준과 통화하고 있었다.
장소를 설명해 주는 걸 보아 하니 그 또한 올 것 같았다.
개그맨 후배가 깜작 게스트로 출연해 방송 분량을 뽑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자 유재승의 표정이 표정이 또 한 번 밝아졌다.
“진국 씨는 누구에게 전화할 거예요?”
유재승이 옆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진국에게 묻는다.
“저는 …….”
“사실 진국 씨는 데뷔한지 얼마 안 되서 연예계에 아는 분이 많지 않으실 텐데요. 부담 갖지 마시고 연예인 아닌 친구를 부르셔도 괜찮아요. 여자 친구를 불러 주면 더 좋고요. 하하하!”
유재승은 진국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재치 있게 멘트를 했다.
진국이 이 프로그램의 게스트이기도 했지만 같은 소속사의 아티스트라 더 신경써주고 있는 모양이다.
진국은 결심이 선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스피커모드로 바꾼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왜 안 받지?”
진국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유재승을 쳐다보는데 건너편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형…….”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자다 깬 목소리.
진국은 목소리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
“응. 몸살기가 있어서 약 먹고 자는 중이야. 무슨 일이야, 형?”
“아, 아니야. 아픈데 빨리 자. 나중에 전화할게.”
“응, 알았어. 형.”
통화가 끊겼다는 신호음이 들려오자 유재승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진국을 쳐다본다.
“친구 분이 아프신가 보네요. 그런데 방금 통화하신 분은 누구세요?”
5인조 보이 그룹 어니스트의 리더인 하상훈이다.
작년 초에 정식으로 데뷔해서 현재 2집 앨범을 준비 중이라 스케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진국이 하상훈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아! 어니스트의 하상훈 씨요? 아…… 진짜 아쉽네요. 하상훈 씨를 기다리고 계시는 많은 누나 팬들이 너무 서운하시겠어요.”
유재승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형, 시후는 뭐해? 시후한테 전화해 봐.”
저쪽에 앉은 영표가 진국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시후는 드라마 촬영 중이라 지금 엄청 바쁠 거야.”
진국은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유재승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진국에게 묻는다.
“시후 씨? 주시후 씨요? 와아! 만약에 시후씨가 와 준다면 진짜 역대급 친구인데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도 우리 시후랑 친해요.”
“그런데 아마 안 받을 거예요. 촬영 중일걸요.”
“그럼 메시지라도 보내 놓는 건 어떨까요? 나중에 혹시 메시지 확인하고 전화라도 걸어 준다면 통화라도 한번 해 보게요. 많은 팬 분들이 방송을 보시며 시후 씨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하실 거예요.”
유재승의 말에 진국은 휴대폰으로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후야. 나 지금 청담동에 카페에 와 있는데, 혹시 드라마 촬영 일찍 끝나면 잠깐 와줄 수 있어? 여기가 어디냐면…….
* * *
“아, 그냥 두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
“됐어 인마. 네 섬섬옥수에 물 묻히면 쓰겠냐? 형이 할게.”
싱크대 앞에서 정해수가 팔을 걷어붙인다.
나는 정해수를 옆으로 밀어내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 다 그릇 깨 먹지 말고 저리 비켜. 내가 할래.”
어느 틈에 뒤로 다가온 강화영이 나와 정해수의 옷 뒷덜미를 잡고 자리에서 끄집어 내며 싱크대 앞을 점령했다.
“그래. 여자 둘이 할 테니까 남자들은 상이나 치워 줘요.”
채설아가 빈 그릇을 손에 잔뜩 들고 강화영의 옆에 서며 말했다.
“됐어. 여기도 다 치워가.”
“그럼 둘은 밖에 나가서 쓰레기나 버리고 올래?”
거실에서 상을 닦고 있는 조연석과 문영호의 말이 차례로 들려온다.
“내가 버리고 올 테니까 너는 집 정리 하고 있어. 환기도 좀 시키고. 야! 고기 냄새가 집에 진동한다!”
정해수가 허공에 손을 휘휘 젓더니 쓰레기를 들고 문밖으로 나간다.
조금 전 나의 새 보금자리에서는 여러 명의 지인들과 고기 파티가 한창이었다.
드라마 <왕의 신하>에 출연했던 동료들이 집들이를 온 것이다.
오늘은 드라마 촬영 오전 중에 끝나 오후 시간이 비어있기도 했고, 모인 배우들도 오늘따라 모두 스케줄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띠리리링!
거실 창문을 열어 집 안을 환기하고 있는데 소파 한쪽구석에 처 박혀 있던 휴대폰에서 메신저 톡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10시.
“이 시각에 누구지?”
메신저 톡의 메시지를 읽어보는데.
“이 형 뭐야?”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왜? 누군데요?”
강화영의 설거지 보조를 하고 있던 채설아의 질문이다.
채설아와는 작년 B&M 엔터테인먼트의 송년회 이후로 누나 동생 하며 편하기 지내기로 했는데, 채설아는 아직도 내게 반말과 함께 종종 존댓말을 섞어 말하곤 했다.
“어, 누나도 아는 사람! 진국이 형이에요.”
“진국 씨? 왜에? 뭐라는데 웃은 거야?”
“카페에서 혼자 있대요. 청승 맞게…… 내가 오늘 드라마 촬영 있는 줄 알고, 전화 못 받을까 봐 톡 보냈나 봐요. 드라마 촬영 빨리 끝나게 되면 얼굴 보자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