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97화 (97/170)

# 97

97화 말할 수 없는 (2)

아이돌 그룹 ‘클락시’의 숙소.

거실에는 클락시의 여섯 멤버 전원이 소파에 둘러앉아 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간.

그중 유독 튀는 빨간 머리의 사내가 휴대폰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다.

클락시의 서브 보컬인 고형이다.

고형은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클락시의 래퍼인 장현을 검색하고 있는 중이다.

“아! 여기 있다!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대본 리딩 현장!”

장현이 드라마의 조연을 맡아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기에 혹시나 장현이 거론된 기사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었다.

인터넷에는 주연배우인 주시후와 성유라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이다.

그중 기어코 장현의 기사를 찾아낸 고형은 화면에 뜬 글씨를 그대로 읽었다.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대본 리딩 현장! 주연배우인 주시후와 성유라는 전승원 감독과 박은숙 작가의 지휘 아래, 실제 촬영을 방불케 하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대본 리딩 내내 다정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화제다. …… 김경식 역에는 클락시의 장현이 맡아 드라마에 처음 도전한다.”

“끝이야?”

안 듣고 있는 척하며 TV에 시선을 두고 있던 장현.

아마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형이 읽어준 기사를 들으며 장현의 표정이 일순간에 구겨졌다.

“응. 끝이야.”

“하! 어이없네. 달랑 한 줄?”

짜증을 표출하는 장현에게 고형이 괜히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한다.

“미안. 내가 괜히 기사 찾아본다고 성질 돋웠네. 현이 너는 드라마 처음 하는 거고, 연기도 첫 도전이니까 네가 참아.”

“그럼 안 참으면 내가 어쩔 건데? 기자한테 따지기라도 해? 내 기사는 왜 달랑 한 줄이냐고?”

괜한 화살이 고형에게 날아간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클락시 멤버들은 각자 하던 것을 멈추고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야! 왜 고형이한테 그러냐? 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에이. 장현이도 짜증 나니까 그렇지. 주시후는 가요계에서도 새카만 후배인데 연기 먼저 시작했답시고 주연 맡아서 온갖 포커스는 다 받잖아. 나 같아도 짜증 나겠다. 그 새끼 거들먹거리는 거 볼 생각하면…… 앨범 낸 것만 해도 그래! 왜 우리랑 같은 날 발매하냐고?”

“아! 그거 사실 한 달은 더 있다가 발매할 앨범이었다더라. 그 새끼가 우리한테 엿 먹이려고 무리해서 앞당긴 것 같던데?”

TV 리모컨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멤버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설마?”

“왜? 그 새끼 중국에서도 그렇게 인기 얻은 거 봐봐. 같은 시기에 음반 내면 뻔히 우리가 엿 먹을 거 몰라? 일부러 우리랑 붙은 거야!”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장현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갔다.

이쯤 되면 그 말을 그냥 믿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그때 좀 심하긴 했지?”

또 다른 멤버의 말에 클락시 멤버들은 저마다 기억을 더듬었다.

주시후가 첫 싱글 앨범을 들고 음악 방송 전, 대기실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막 치고 올라오니 후배들 무서워서 은퇴해야겠네.”

“요즘 신인들 무섭네? 우리 때는 선배들 눈도 못 마주쳤는데?”

“아! 짜증 나! 카메라 가리고 지랄이야? 요새 신인들 왜 저래?”

“심하긴 뭐가 심해? 우리가 4년이나 더 빨리 데뷔한 선밴데! 우리 신인 때 선배들이 어땠는지 잊었냐?”

그 말에 고형이 고개를 끄덕거리면 옛 생각에 잠긴다.

“하긴. 우리는 진짜 선배가수들 그림자도 안 밟았지.”

고형이 장현의 얼굴을 보자 뭔가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아, 맞다! 드디어 내일이네? 드라마 첫 촬영 말이야.”

“어.”

“마음 단단히 먹고 가. 그 새끼가 연기 선배랍시고 복수할지도 모르잖아.”

고형의 말에 장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야! 내가 무슨 부모 죽인 원수라도 되냐? 무슨 복수야!”

“아니, 그냥. 조심해서 나쁜 건 없잖아. 감독이랑 작가가 전에 드라마 같이 찍었을 때도 주시후한테 오냐 오냐 한다고 소문이 파다했어. 그 새끼가 이간질할지도 모르잖아.”

장현은 느긋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오늘 본 것 중 가장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괴롭혀도 내가 괴롭혀! 그 새끼는 내일 나한테 졸라 맞을 예정이거든.”

* * *

“컷! NG!”

방금 내 뺨을 때린 놈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놈은 아이돌 보이 그룹 클락시에서 랩을 맡고 있는 장현이다.

극 초반에 나와 대립하는 김경식 역을 맡았는데 드라마 중 후반에는 그 역할이 먼지화되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혹시 또 모르지.

연기를 엄청나게 잘한다면야 박은숙 작가가 대본 수정을 감행해가면서까지 분량을 늘려줄지도.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피아노를 잘 치는 부잣집 도련님 역이라 이미지에도 맞고, 피아노를 꽤 잘 친다는 장현을 캐스팅했다고 했는데.

연기 경력이 없어서인지, 연기에 소질이 없어서인지 발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대사를 잊어버려서……. 시후 씨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선배님.”

엔지(NG)를 낼 수도 있지 뭐.

첫 촬영이라 긴장이 많이 되는 모양이다.

“자, 다시 가요! 레디, 고!”

전승원 PD의 사인에 따라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짝!

“야! 네까짓 게 한숨을 뭔데 내쉬고…… 아니 뭔데 한숨을 내쉬고…… 아, 죄송합니다!”

“컷! NG!”

촬영장 분위기가 갑자기 싸하게 가라앉는다.

두 번 연달아 뺨을 맞은 나도 기분이 썩 좋진 않다.

“레디, 고!”

짝!

“컷! NG!”

세 번째 엔지(NG)에 전승원 PD옆에 앉아있던 박은숙 작가가 급하게 내게 달려와 얼굴을 살피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스태프들에게 소리쳤다.

“시후 씨 메이크업 좀 다시 해줘요!”

그리고 장현에게 물었다.

“장현 씨? 대사 다 못 외웠어요? 이 정도면 짧은 대사 아닌가? 버거우면 대사 다 지워줘요?”

“정말 죄송합니다. 작가님. 너무 긴장했나 봐요.”

박은숙 작가가 뒤돌아서서 자리로 돌아가고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레디, 고!”

짝!

“야! 네까짓 게 뭔데 한숨을 쉬고 지랄이야? 심부름하기 싫다는 거야?!”

“컷! 오케이!”

따귀 네 번을 맞고 나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전승원 PD는 오케이를 외치고 난 후임에도 불구하고 짜증 난다는 표정이다.

그는 이내 장현을 째려보며 말했다.

“장현 씨! 연결 신은 제대로 갑시다. 맞는 사람도 생각해 줘야지, 자꾸 NG를 내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게 따귀 한 대로 끝나는 촬영도 아니고! 제대로 좀 합시다.”

그랬다.

따귀 한 대로 끝나는 촬영이 아니었다.

이 신은 내가 맞는 신이다.

따귀로 시작해 주먹질로 끝난다.

빵 셔틀을 시키자 한숨을 내어 쉰 나는 따귀를 맞게 되고, 째려보았다고 짜증이 난 장현은 주먹을 날릴 예정이다.

그 주먹을 내가 얼떨결에 피해 버리자 화가 난 장현의 주먹이 결국 내 복부를 강타한다.

바닥에 구르던 나는 그동안 참았던 설움을 폭발시키며 벌떡 일어나서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는 장면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현의 주먹이 얼굴로 날아올 때는 피하게끔 미리 합을 맞춰 놓았다.

격분한 장현이 주먹을 내 복부에 꽂아 넣는 장면은 때리는 척만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뺨을 맞는 신이 끝나자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자! 뺨 맞았다! 대사했다! 그리고, 쳐다본다! 여기부터 연결해서 갈게요. 레디, 고!”

전승원 PD의 시작 사인이 떨어지자 나는 매섭게 장현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장현의 주먹이 내 얼굴로 향한다.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다.

사전에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현의 주먹이 날아오는 괘도가 심상치 않다.

피하기로 한 방향으로 날아오는 그의 주먹.

“어?!”

잽싸게 피한다고 피했지만, 장현의 주먹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혹시 일부러 이러나 싶어 짜증이 확 솟구친다.

“컷! NG!”

전승원 PD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 것이 영 못마땅한 얼굴이다.

박은숙 작가의 표정 역시 뭐 씹은 표정이다.

내가 왜 저런 놈을 캐스팅했을까? 이런 표정들이다.

장현은 또다시 NG 소리를 듣자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레디, 고’ 소리만 들으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버리네요. 시후 씨,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다시 가죠.”

나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하며 고개 숙인 장현을 쳐다보았다.

카메라와 전승원 PD, 박은숙 작가를 등지고 있는 장현.

그런데…….

‘웃어?’

장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입꼬리가 실룩 거린다.

저게 돌았나?

그럼 여태 일부러 엔지(NG)를 냈다는 거지?

나랑 무슨 원수를 졌나? 아니면 내가 오늘 뭘 서운하게 했나?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쨌든 계속해서 맞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결심이 서자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던 화가 빠르게 가라앉고 찬바람이 쌩! 하고 도는 것이 느껴진다.

“레디, 고!”

장현의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든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이다!

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이것을 피했다.

어차피 대본에도 ‘얼굴로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라고 쓰여 있었기에 왼쪽? 오른쪽? 피하는 방향은 중요치 않았다.

피하고 나자 장현의 눈이 커진다.

또 피할 줄 몰랐다는 표정이다.

그는 대번에 인상을 구기더니 연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번에는 그의 주먹이 내 복부에 꽂힐 차례다.

전승원 PD가 때리는 시늉만 하라고 주문했지만, 저놈은 분명 있는 힘껏 때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른손에 주먹을 만들어 꽉 쥐고는 팔을 뒤로 크게 뺀다.

허리까지 돌리는 것이 내 몸이 오락실에 있는 펀치 기계인 줄로 착각한 모양이다.

장현의 주먹이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몸을 틀어 그를 흘려보냈다.

“어? 어!”

장현이 몸이 반동은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악!! 이 새끼가!!”

바닥을 구르는 그의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졌다.

대본에는 없는.

나는 땅에 붙어 팔꿈치를 붙잡고 있는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결투를 신청한다!”

“뭐라고? 이 새끼야? 이게…….”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학교를 떠날게. 내가 지면 말이야, 전학 가겠다고. 만일 네가 지게 되면 다시는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그리고 네가 자랑처럼 떠들고 다니는 그 악보! 나한테 넘겨.”

“미친 새끼가 뭐라고 시부리는 거야? 네가 전학을 가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이 새끼야!”

“내가 여태껏 싸움을 못 해서 맞아주고 당해준 줄 알아? 나는 싸움을 아주 싫어해. 한번 하겠다고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거든. 혹시 그거 알아? 내가 왜 전학 왔는지?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왜 쫓겨났는지? 네가 주먹질로 나한테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

장현이 바닥에서 슬슬 눈치를 보며 일어난다.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연기인지 진짜 겁을 먹은 것인지 모를 정도다.

진작 저렇게 연기 할 것이지.

어렵사리 입술을 뗀 장현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내게 묻는다.

“종목은?”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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