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말할 수 없는 (1)
[피아노 작곡가, 피아노 O.S.T의 거장, ‘콜 루크’ 방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피아노 작곡가.
영화 <피아노의 정원> O.S.T로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콜 루크가 한국에 처음으로 방문한다는 소식이 온종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오르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에 비례해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 역시 콜 루크가 O.S.T의 전곡을 작곡했다는 이유로 또 한 번 이슈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드라마의 O.S.T를 작곡하게 된 이유가 주시후 때문이었던 점이 가장 컸다.
이미 그전에 주시후는 싱글앨범에 콜 루크의 피아노곡을 담기도 했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네티즌의 관심은 대단했다.
실제로 콜 루크는 한국에서의 일정동안 공식적으로는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O.S.T를 홍보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주시후를 만날 예정이었다.
인천 국제공항.
수많은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게이트 밖으로 나오는 사내.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올리며 파란 눈으로 좌우를 훑어본다.
“와우! 엄청난 인파군요. 세계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이렇게 취재진이 많이 나온 것은 처음입니다.”
콜 루크가 마중 나온 청룡 스튜디오의 한만기 대표에게 말한다.
꽤 많이 몰려든 방송국 카메라.
리포터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마이크를 손에 들고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멘트를 하고 있다.
사방팔방에서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취재진들이 과열된 양상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2열로 질서정연하게 길게 늘어선 학생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를 함께 본 한만기 대표는 콜 루크에게 설명했다.
그는 콜 루크가 이번에 한국 방문에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전반적인 것들을 맡았다.
내한의 공식적인 이유가 드라마 홍보였고, 비공식적으로도 주시후와의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워 통역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에요. 특히 방송국 카메라는 좀처럼 움직이는 법이 없죠. 오늘은 방송가뿐만 아니라 음악계에서도 집중적으로 관심으로 보이는 콜 루크 씨가 한국에 오셨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처음 오는 데 이렇게 환대해 주실 줄 알았다면 진작 올 걸 그랬네요.”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인파라고 생각하니 콜 루크의 기분이 좋아졌다.
“아! 그리고 오늘은 콜 루크 씨에게 환영 인사를 하고 싶다며 특별한 분이 오셨거든요. 카메라를 몰고 다니는 대단한 분이시죠.”
콜 루크가 설명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방송국 카메라도 움직임이 없고, 리포터들도 아직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는다.
취재진들도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누르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가지런하게 2열로 줄을 서서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도 큰 소리를 낸다거나 크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모두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폭풍 전야의 고요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시선이 일제히 공항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으로 쏠린다.
그리고 자동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꺄아아아아악!!”
기다렸던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마치 그동안 모아두었던 기를 한꺼번에 방출시키고 있는 듯한 엄청난 에너지였다.
콜 루크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함성에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방송국 카메라맨들이 그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리포터들과 취재진들이 방금 공항으로 들어선 무리로 앞다투어 뛰어가고 삽시간에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2열로 서 있던 학생들이 서로 팔짱을 낀 상태로 콜 루크가 서 있는 게이트부터 공항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까지 길을 만든다.
흡사 그것은 바리게이트 같아 보였다.
취재진들은 어쩔 수 없이 방금 들어선 한 무리의 사람들과 콜 루크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리게이트 가운데에 서서 이것을 통솔하고 있는 한 여성.
그녀는 취재진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밀고 나오지 마시고, 질서를 지켜주세요! 외국에서 오신 손님도 계시는데 저희 오빠 체면이 뭐가 돼요? 에이! 기자님! 거기서도 다 찍으실 수 있잖아요. 뒤로 물러나 주세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자 그녀는 서 있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콜 루크는 가운데 서 있던 그녀가 물러나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운데 아무것도 가로막는 것이 없어 곧바로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무리.
그중 가운데에 서 있는 키 큰 사내가 가장 눈에 띈다.
백옥처럼 투명한 피부, 빛나는 눈과 다부진 입술을 가진 사내 하나가 등 뒤로 하얀 아우라를 발산하며 걸어온다.
콜 루크는 그가 자신의 바로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악수를 청하는 것을 보면서도 쉽게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사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지도 평상시에 자주 접했으므로 물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본 사내의 얼굴과 실제로 보는 모습은 달랐다.
매체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절반도 담아내지 못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시후입니다.”
콜 루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콜 루크입니다.”
* * *
B&M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 D룸.
회사에서도 딱 한 대 보유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앞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에 삽입될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매끄럽지 않은 뭔가 불편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콜! 이 부분 말이에요. 조금만 수정하면 안 될까요?”
내 말에 옆에 서있던 콜 루크는 멋쩍은 듯이 웃는다.
“시후! 당신한테는 못 당하겠는데? 나도 사실 그 부분이 조금 어색했던 참이었거든. 마음대로 연주해 봐. 들어 볼게.”
드라마 첫 촬영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콜 루크는 작곡해 온 곡들이 완벽한지 내게 피드백을 청해왔다.
이것이 그가 한국에 방문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일단 작곡을 해 놓으면 음표 하나, 쉼표 하나도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콜 루크로서는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게 피드백을 요청한 이상 나는 완벽한 연주곡을 위해서 의견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그만큼 신뢰하고 내 실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다행히 내 의견에 그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방금 연주한 부분 중 일부분을 내 뜻대로 바꾸어 다시 연주했다.
그것을 들은 콜 루크의 표정이 밝아진다.
“완벽해! 시후!”
덩달아 내 표정도 밝아졌다.
일주일 후.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첫 촬영 날.
서울 평창동에 있는 예술 고등학교, 예술관 2동 주차장에 배우들의 차량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드라마의 배경이 예술 고등학교였으므로 실제 존재하고 있는 학교를 촬영장으로 쓰기로 하였는데 이곳은 여주인공을 맡은 성유라의 모교이기도 했다.
김남규 팀장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주자 나는 차에서 내려 학교 건물을 둘러보았다.
건물이 깨끗하고 교정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첫인상이 좋다.
이런 학교에 다닌다면 진짜 공부할 기분 나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학교는 본관과 예술관 1, 2동으로 나뉘는 데 현재 예술관 2동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해서 오늘 드라마의 첫 촬영은 이곳 강당에서 하게 된다.
드라마의 주 촬영은 앞으로도 예술관 2동에서 진행될 것이었고, 교정을 담는 씬은 주말에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날을 골라, 몰아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방학 기간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학생들의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강당으로 걸어 들어가며 보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성유라와 이 학교의 선생님들로 추정되는 인물들.
‘성유라의 모교라고 했지?’
오랜만에 인사를 하고 있나보다.
나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오빠! 시후 오빠!”
다다다! 다다다!
성유라가 무섭게 뛰어온다.
저 여자는 뛰는 게 취미인가?
첫 만남 때는 하이힐을 신고 뛰어오더니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온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섰다.
뒤를 돌아보자 성유라가 숨을 헐떡거린다.
“헥헥! 오빠! 사람을 보고도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 선배님이 말씀 중이신 것 같아서 인사는 이따가 하려고 했어요.”
“에이…… 그래도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가지……. 어쨌든 선생님들이랑 인사 다 했어요. 여기가 사립 고등학교라서 선생님들이 잘 안 바뀌시거든요. 아! 들어가요, 오빠. 아! 맞다! 그 선배님 소리는 좀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나이도 어린데, 괜히 노땅 된 느낌이란 말이에요.”
혼자 웃었다가 들어가자고 앞장섰다가 투덜거리는 모습까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팔짱을 끼고 섰다.
여동생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 지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선배님을 선배님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내 입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장해제 되었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보다.
성유라는 배시시 웃었다.
“유라야…… 이렇게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조금 거리를 두고 싶으면 성유라! 이렇게 부르셔도 되요. 선배님만 아니면 뭐든 좋을 것 같아요.”
“알겠어요. 유라 씨. 들어가시죠.”
나는 등을 돌려 강당으로 들어섰다.
뒤에서 성유라의 볼멘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아니, 씨가 왜 붙어요? 아…… 싫은데……그냥 유라라고 부르면 안 돼요?”
* * *
전학생 김동주.
이 학교로 전학 온 지 보름이 넘었는데도 아이들은 나를 여전히 ‘전학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싸움을 싫어한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사소한 말다툼까지도 시간 낭비에 감정 낭비라고 생각한다.
으레 학생이 전학을 오면 시비를 거는 학우들이 있다.
그것은 기선 제압일 수도 있고, 텃세를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전학이 잦았던 나는 항상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덤덤히 받아들였다.
내가 반응을 하면 괴롭힘이 더 거세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예술 고등학교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어딜 가나 힘 없는 자를 괴롭히는 놈들은 꼭 있기 마련이다.
이런 녀석들을 피해 나는 점심시간마다 연습실에 간다.
혼자 피아노를 치다 보면 마음도 편안히 가라앉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보통은 연습실까지 따라와서 괴롭히지는 않는데 오늘따라 끈덕지게 괴롭힌다.
“야! 전학생! 여기 있었냐? 내가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매점에 가서 빵 한 개만 사다 줄래? 물론 네 돈으로!”
전학 온 날부터 괴롭히던 패거리 중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김경식’이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은 재벌 2세라는 놈이 툭 하면 금전을 갈취해 간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빵이라도 사다 입에 물려 줘야 오늘의 괴롭힘이 끝이 날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김경식이 내 멱살을 잡고 뺨을 후려친다.
짝!
“야! 네가 응? 응? 네까짓 게…… 한숨을 어?”
“컷! 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