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한 끼만 줍쇼! (3)
“들어오세요. 아빠가 모시고 들어오래요.”
강화동과 문영호는 선뜻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는 한 가정집 안으로 들어섰다.
밥이 차려지는 동안 집 구경을 하던 강화동이 작은방에 들어선다.
벽에 도배되듯 붙어있는 사진.
익숙한 얼굴이다.
“시후 오빠 팬이야?”
문을 열어준 집주인의 딸아이. 고등학교 1학년생이라고 했던가?
소녀에게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저 ‘주슈’ 팬클럽 회원이에요. 팬카페 활동도 하고 있어요.”
“시후가 이집에 왔어야 했네.”
소녀를 보는 문영호의 표정이 괜히 미안해진다.
하지만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문영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영호 오빠랑 시후 오빠랑 친하잖아요. 영호 오빠 식사 챙겨드리면 시후 오빠도 좋아하실 거예요. 참! 이따가 시후 오빠랑 영상통화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시후 팬들은 시후 닮아서 마음씨가 다 착하구나.”
“당연하죠! 인성 더러운 애들은 팬클럽에 못 들어와요. 회장 언니가 시후 오빠 얼굴에 먹칠하는 걸 제일 못 참거든요. 팬 카페 규율도 얼마나 엄격한데요. 다른 배우 헐뜯고 욕 하는 것도 안 돼요. 비방만 해도 쫓겨나는 걸요?”
문영호가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나도 열심히 활동하면 언젠가는 팬클럽이 생기겠지.’
“식사 다 되었어요.”
집주인 부부가 작은 방에 있는 강화동과 문영호를 부른다.
식사 내내 강화동의 입담덕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식사를 마칠 때 쯤 되자 소녀가 안절부절 한다.
문영호를 자꾸 쳐다보는 것이 주시후와의 영상통화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문영호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했다.
식사가 끝나고 과일까지 다 먹은 강화동과 문영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하자 결국 참지 못한 소녀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영상통화…….”
“영상통화? 안 할 건데?”
“네?! 왜요?!”
“할 필요가 없거든.”
“…….”
소녀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만 뻐끔거린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얼굴이다.
“시후가…… 아까부터 여기 와 있거든.”
“네?”
아까부터 제작진들이 집 안팎을 드나드느라 현관문을 열어 두긴 했지만, 기다리던 주시후가 들어오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소녀는 집안 이곳저곳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멈춘 그곳.
제작진들 사이에서 마스크를 쓴 채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사내는 마스크를 벗으며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후 오빠?”
카메라를 내려 놓은 주시후가 양팔을 벌리자 소녀가 뛰어들어 안긴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하는 줄 알겠네.
문영호는 피식 웃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영상통화보다 이게 낫지?”
“네! 영호 오빠 최고예요!”
* * *
드라마 <말할 수 없는 시간>
가수 주시후의 두 번째 드라마, 이번엔 톱스타 성유라와 호흡을 맞춘다!
두 명의 주연배우가 결정되자 남은 배역의 캐스팅은 날개를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톱스타들 중에서는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조연배우들 중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던 이유에서다.
성유라의 말처럼 어려서부터 취미로라도 피아노를 배운, 그만큼 재주가 많은 배우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주조연 배우들의 캐스팅이 끝나자 이번엔 비중이 적은 조연배우의 캐스팅이 진행되었다.
그것은 현재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오디션으로 선발하기로 했는데, 단 5명을 뽑는 오디션에 5000명이 넘는 전공자들이 지원했다.
1차 서류 심사와 2차로 피아노 실기 심사를 거쳐 3차 연기 심사, 4차 면접까지.
거르고 또 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경쟁률이 무려 1000:1이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캐스팅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입소문을 타며 유명세를 떨쳤다.
방송국에서도 이 유명세는 남달랐다.
ABS, SAS, OBC. 방송 3사를 포함한 종편 방송국 JTB, tvM 또한 <말할 수 없는 시간>을 가지고 가려고 소리 없는 전쟁을 펼쳤다.
총 16부작으로 제작 될 이 드라마는 결국 전에 <왕의 신하>를 방영했던 ABS방송국에서 방영하기로 결정되었다.
방송국 자체 제작 드라마가 아닌데도 토, 일 저녁 9시. 황금 시간대를 내어 주며 일찌감치 편성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드라마의 캐스팅과 편성이 끝나자 박은숙 작가는 지금까지 써 놓은 대본 16부를 회사로 보냈다.
집필을 시작한 시간에 비해 상당히 빠른 완성이었다.
박은숙 작가는 피아노 치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별로 쓸 것도 없었다고 했고, 그러므로 제작진이 생각하는 드라마 촬영 기간은 매우 짧았다.
드라마 한 편이 완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5~7개월인데, 이번 드라마의 촬영 예상 기간은 3개월이었다.
16부작이라 짧아서이기도 했지만, 뽑아 놓은 주·조연 배우들이 거의 반 음악가들이라 엔지(NG)만 많이 나지 않는다면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전반적으로 추측했다.
4월 어느 날 나를 태운 차량은 여의도의 한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
ABS방송국에서 드라마 첫 방송으로 잡아준 날짜는 6월 20일.
첫 방송을 두 달 앞에 두고 이제 드라마는 곧 첫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오늘 미팅은 첫 촬영 전에 감독, 작가, 배우들이 서로 얼굴이라도 익히자며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성유라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나는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성유라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연기경력은 10년 정도 되는 것 같고, 톱스타 반열에 오른 것은 약 4년 전.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프로필에도 당당하게 쓰여 있는 그녀의 특기는 피아노 연주.
사진으로만 접한 성유라는 밝고 명랑한 표정을 많이 지었는데, 때때로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지은 사진을 볼 때면 전혀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이렇게 봐서는 어떤 성격을 지닌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기에 나는 김남규 팀장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들은 것이 있나 해서.
“글쎄.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잘 몰라. 예전에 성유라가 음악 프로그램 MC를 잠깐 맡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블랙 타이거의 진우가 같이 MC를 봤거든. 진우 말로는 차분한 성격이고, 예의가 바르다고 했다는데,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그것도 블랙 타이거 매니저 통해서 들은 말이니까. 왜? 걱정돼?”
김남규 팀장이 나보다 더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걱정이라기보다는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그래도 몇 개월 동안 같이 촬영해야 하잖아요.”
“어떤 성격인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너에 대해서 엄청난 관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관심? 호감?
만나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처음에 성유라가 드라마 출연을 고사했었거든. 영화 한 편 들어가려고 했던 모양이야. 천하의 박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까는 여배우가 있다니 다들 대단하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영화 감독이 정찬웅이라서 다들 수긍했었지. 그런데 얼마 전 갑자기 영화를 포기하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다며 박은숙 작가와 전승원 PD를 찾아갔어. 그 이유는 바로 너였지?”
“저 때문에요? 왜요?”
김남규 팀장이 기억을 더듬는다.
“그 언제더라? <베스트 뮤직>에 출연했을 때 있잖아. 너 싱글 앨범에 수록된 피아노곡 연주했던 방송. 그거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네 피아노 연주를 듣고 가슴이 들끓었다나? 어? 다 왔네. 여기서 먼저 내려. 훈이랑 주차해 놓고 들어갈게.”
나는 차에서 내려 식당 입구 쪽으로 향했다.
[우화정]
고기를 파는 곳인가?
큼지막한 간판 밑으로 식당의 입구가 보이고, 삼삼오오 모여서 출입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낯익은 얼굴을 보고 반가움에 쪼르르 달려갔다.
전에 드라마 <왕의 신하> 촬영 당시 촬영B팀을 맡았던 전승원 PD와 그 휘하의 제작진, 스탭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내가 인사를 하며 다가가자 모두 반가운 표정들이다.
“시후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죠?”
“이번에도 같이 촬영하게 됐네요. 잘해 봅시다.”
“네!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자자!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들어가지! 나 지금 엄청 배고프다고!”
“네. 들어가요. 저도 아까부터 배가 고파서요.”
전승원 PD의 주도로 제작진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맨 뒤에 서서 뒤 따랐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탁탁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깐만요! 같이 가요오!”
뒤를 돌아보니 내 쪽으로 한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딱 붙는 스키니 진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봄 분위기가 물씬 나는 핑크계열의 트렌치코트를 걸친 단발머리의 여인.
저 높은 구두를 신고 저렇게 뛸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헥헥! 거리며 내 앞에 서서 환하게 웃는 이 여자. 이번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성유라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뵙겠습니다.”
“우와! 실제로 보니까 진짜! 진짜! 잘생기셨네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성유라 라고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악수하자며 내민 성유라의 손을 맞잡자 그녀의 콧 평수가 넓어진다.
“꺄아아악!! 손 잡았어! 어떡해!”
마치 소녀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났을 때 하는 행동.
‘악수한 이 손! 영원히 안 씻을 거야’ 이런 표정이다.
나는 당황함에 눈만 끔벅거렸다.
“아! 제가 좀 그랬죠? 그런데 진짜 만나고 싶었거든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
누가 들으면 내 팬클럽 회원인 줄 알겠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성유라는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와 조용조용 속삭였다.
“저, 사실은 오빠 팬카페에도 가입했어요.”
“아, 예…….”
누가 그랬지? 성유라가 차분한 성격이라고?
어딜 봐서?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제가 어리잖아요. 헤헤헤.”
“편하실 대로 부르세요.”
“넵! 오빠! 아, 맞다. 제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같이 들어가자고 불러 세운 건데. 깜빡했네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요, 오빠!”
성유라가 앞장서서 따라오라며 과하게 손짓한다.
가만 보면 쟤도 정상은 아닌 듯.
뭐, 까칠하게 굴며 싸가지 없는 것 보다는 저게 낫지……싶다.
초면인데 친근감도 들고, 그러고 보니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기도.
“어, 시후 씨 이리 와서 앉아요.”
박은숙 작가가 나를 보더니 옆으로 부른다.
“작가님, 언제 오셨어요?”
나는 박은숙 작가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에 왔어요. 시후씨는 지금쯤이면 벌써 대본 다 외웠겠네요?”
“네. 이번엔 대사가 많지 않아서 금방 외웠어요.”
박은숙 작가를 보며 대답을 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자꾸 옆이 신경 쓰인다.
“참. 작곡가 콜 루크한테 연락이 왔는데 피아노 연주곡이 다 완성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몇 곡이나 될까요?”
그런데 저 여자는 아무데나 앉지, 왜 저렇게 두리번거려? 신경 쓰이게.
여기에 앉았다가 저기에 앉았다가, 자꾸 자리를 옮기는 성유라.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앞에서 알짱거린다.
“우리 쪽에서 부탁한 건 다섯 곡인데…….”
오른쪽 귀로 박은숙 작가의 말을 듣고 있는데 왼쪽 귀에서 다른 말이 들려온다.
성유라가 내 왼쪽에 앉은 스텝에게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었다.
“저, 죄송한데 제가 여기 좀 끼어 앉아도 될까요? 제가 시후 오빠 팬이라 꼭 여기 앉고 싶어서요.”
“아, 그래요? 드라마 촬영 전에 친해지는 게 좋죠. 그러세요.”
옆으로 선뜻 자리를 내어 주는 스탭의 행동에 성유라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녀는 내 옆에 앉자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꼭 고기를 구워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어디 가서 고기 좀 굽는다는 소리 많이 듣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