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91화 연말에 (4)
“ 인기상입니다. 드라마 <황야의 별>의 심효영 씨! 드라마 <왕의 신하>의 주시후 씨 축하드립니다!”
신인상에 이어 인기상 수상.
처음에 호명되었을 때만큼 얼떨떨하지는 않다.
기대를 안 한다고 말은 했지만, 내심 바라고 있었나 보다.
무대 위에 올라가 트로피를 받자 조연석과 정해수, 문영호와 류담식이 올라와 축하한다며 내 등짝을 후려치고 무대 밑으로 도망간다.
아무래도 넷이 짰나 보다.
이번에도 나의 수상 소감은 짧았다.
처음보다 더.
“많이 좋아해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
무대 밑으로 내려오니 다들 잘했다고 난리다.
수상소감이 길면 듣는데 지루하다며 짧아서 좋다고 칭찬들이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직접 뽑은! 올해 한 해 동안 드라마에서 가장 잘 어울렸던 커플에게 드리는 상입니다. 베스트커플상! 먼저 그 후보부터 만나보시죠.”
이번엔 화면에 베스트커플상 후보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우리 팀 배우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베스트 커플.
상을 받든 못 받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연석과 강화영의 조합이냐? 주시후와 강화영의 조합이냐?
모두들 화면을 바라보며 그것에 초집중하고 있다.
후보 4 <왕의 신하> 드라마의 한 장면이 흘러나온다.
드라마의 제일 마지막 씬. 내가 죽는 장면이었다.
“연석이 형 까였네. 시후랑 둘이 붙었네.”
“쯧쯧. 안 됐네요, 형.”
“시후야! 네가 이겼네. 축하해. 큭큭.”
“아싸! 내가 이겼다!”
“이번 드라마는 틀렸다니까. 영화에서 소원 성취해야지. 뭐.”
나를 포함해서 다들 한마디 하자 조연석은 속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베스트커플상입니다. <왕의 신하>의 주시후 씨, 강화영 씨! 축하드립니다!”
“주시후씨와 강화영씨는 드라마 <왕의 신하>에서 못다 이룬 애절한 사랑을 연기하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안방을 눈물바다로…….”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MC들의 소개말이 흘러나오자 강화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맞잡은 강화영을 에스코트하며 무대 위로 향하자, 이 모습이 카메라에 클로즈업되어 전광판에 커다랗게 잡혔다.
관객석에서 잘 어울린다며 외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은 나와 강화영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베스트커플상을 받고 나자 이번엔 짧은 인터뷰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였다.
“방금 영상에서도 잠깐 나왔던 명장면 말인데요. 제가 듣기로는 두 분의 키스씬이 원래는 인공호흡 신이었다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MC 박현무가 능글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죽어 가고 있었거든요. 그저 화영 씨한테 맡겼고, 리드하는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강화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박현무가 이번에는 강화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떠셨어요?”
나는 강화영의 손에 마이크를 넘겼다.
마이크를 받아들고 쭈뼛대던 그녀의 입술이 작은 소리를 내며 달싹인다.
“좋았습니다.”
공개홀에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강화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시상대 밑으로 내려와서는 두 눈을 쫙! 찢으며 나를 흘겨본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우수상.
“ 우수연기상! 연속극 부문에 드라마 <왕의 신하> 주시후 씨! 그리고 채설아씨! 축하드립니다!”
올해는 상복이 터졌나 보다.
우수상은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터라 이번엔 깜짝 놀랐다.
전광판에 내 어리둥절한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가득 찬 것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채설아가 나를 기다린다.
무대에 같이 오르자고 채근하는 표정이다.
드레스가 길다고 했었던가?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따라 이 손이 여성분들의 에스코트를 하느라 열일 한다.
무대에 오르는 동안 옆 테이블에 앉은 왕의 신하 제작진 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신인상, 인기상, 베스트커플상에 이어 우수상까지.
학창 시절에 받아본 상이라고는 개근상이 전부였는데 상을 4개나 받으니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다.
최우수연기상은 연속극 부문에서 한동하와 강화영이 쓸어 갔고 올해의 드라마상은 단연 시청률이 최고였던 <왕의 신하>가 받았다.
그리고 의 최고상인 대상은 조연석으로 낙점되었다.
* * *
“아우, 진짜 드럽게 춥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머리부터 끝까지 무장한 채 길거리를 터벅터벅 걷다가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우씨!”
골목에 빛이 들지 않아 간밤에 온 눈이 꽁꽁 얼어붙어있다.
B&M 엔터테인먼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천상 엔터테인먼트를 향해 걷고 있는 길.
골목을 가로질러 지름길로 가려다보니 본의 아니게 빙판에서 트위스트를 추는 게 벌써 두 번째이다.
하마터면 뒤통수가 깨질 뻔했네.
이래서 겨울에는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다니지 말라고 어른들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나 보다.
천상 엔터테인먼트 입구에 도착해서 눈만 빼꼼 내어 놓고 얼굴을 칭칭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턱 아래까지 내리자 경비 아저씨가 들어가라며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넨다.
나는 천상 엔터테인먼트의 3층 김건무의 개인작업실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미디장비와 연결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건무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 왔냐? 약속 지켰네?”
“그거야 선배님이 협박하셔서…….”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며칠 전 방송 3사의 가요대축제 때 만난 김건무가 이번에도 시간 내 주지 않으면 앞으로 아는 척도 하지 말라며 협박을 한 결과이다.
“흠흠! 어쨌든 잘 왔어. 내가 내년 봄에는 음반 좀 내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곡이 너무 안 풀려서 말이야.”
“너무 빠듯하네요?”
김건무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가뜩이나 나이도 많은데, 고뇌가 가득한 그 얼굴이 평소보다 5년은 더 늙어 보인다.
“그러니까 너를 불렀지. 이번에 네 음반 수록곡 말이야, 다 네가 작업한 거라면서?”
“아뇨. 전부는 아니고 다섯 곡만요.”
“타이틀곡은? 네가 작곡한 거잖아.”
“그렇죠.”
김건무는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편곡만 잘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작곡까지 잘하네? 역시 대단한 놈! 자, 그러면 어떻게 도와줄 거야?”
“네? 선배님이 말씀해 주셔야죠. 곡 하나를 내놓으라든가. 편곡을 도와달라든가. 피처링을 해 달라든가.”
“말하면 다 해 줄 거야?”
“능력이 되는 한 도와야죠. 뭘 해도 돈이 될 텐데요.”
“그래? 그럼 일단 내가 쓴 곡부터 들어 봐. 쓸 만한지 버려야겠는지…….”
천하의 김건무가 버려야 할 곡을 후배한테 들려줄 리가 없다.
분명 잘 뽑은 곡이겠지.
그저 확신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건무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이내 스피커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위에 덧입힌 스트링 건반의 화음.
“무난하네요. 곡 흐름도 괜찮고요. 스토리가 확실하게 들려와요. 조용히 시작되는 봄의 멜로디. 뜨겁고 격정적인 여름을 지나 선선하게 느긋한 가을이 오고, 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이 지나도 다시 봄이 오면 따뜻해진다. 그런 스토리 아니에요?”
내 말에 김건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응. 사계절을 사랑으로 표현한 거야. 그런데 곡이 좋은 게 아니라 무난하다는 거지?”
“음……피아노랑 스트링 조합은 워낙 많이들 쓰니까요.”
“뭐 좋은 아이디어 없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건 어때요? 도입부에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를 하나 더 넣어서 청량감을 주는 거요. 앨범도 봄 시즌에 내신다면서요. 차분함을 살짝 버리고 아예 상쾌한 느낌으로 가는 거죠. 첫사랑 같은 느낌이요.”
“그러니까, 그 다른 악기가 뭐냐고?”
“그야 저도 모르죠. 리드 악기라…… 플루트 같은 악기가 문득 떠오르긴 했는데…….”
김건무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미디 기계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뭔가에 집중했다.
“자, 다시 들어 봐봐.”
기계의 힘은 위대했다.
순식간에 도입부에 피아노 대신 플루트 소리가 흘러나온다.
피리와 닮은 듯하면서도 더 부드러운 소리.
그러나 기계음에는 한계가 있었다.
뭔가 매끄럽지 않은, 인조적인 느낌이 든다.
“아, 확실히 기계로 찍어 놓으니 듣기 불편한 음들이 있네. 아! 잠깐만 있어 봐.”
김건무가 잠시 사라졌다가 손에 커다란 악기 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설마 플루트예요?”
“응. 예전에 배워보려고 샀는데, 크크크! 한 달 레슨하고 때려치웠어. 이거 대박 비싼 거야!”
김건무는 케이스에서 꺼내든 플루트를 쥐고는 나름 열심히 불어 본다.
“한 달 배우신 거치고는 진짜 별로네요. 큭큭.”
킥킥대는 나를 째려보는 김건무.
나는 플루트는 이리 내라며 손을 뻗었다.
“불어 보게?”
“선배님보다는 잘 할 자신 있어요.”
나는 손에 쥔 플루트를 익숙하게 잡았다.
대금과 연주 자세가 비슷한 듯했으나 조금 다르다.
취구에 입술을 가지고 가서 홀딩하자 김건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오! 양보쉐!”
나는 피식 웃음 터트렸다.
플루트에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 취구에서 잡는 입술 모양을 말하는 것인데, 한 달 배웠다고 아는 척하는 것이 우스웠다.
“양보쉐가 아니라 앙부셰(Embouchuer)거든요?”
“에이씨! 그거나 그거나!”
“선배님 그 음악 다시 틀어 주세요. 도입부에 피아노 소리 빼시고요.”
김건무의 조작으로 음악이 흘러나오자 나는 도입부에 맞춰 플루트 연주를 시작했다.
아주 짧은 연주였지만 좋았나보다.
김건무의 입이 떡하고 벌어진 것이.
“대박! 야야! 이걸로 가자. 시후야, 저기 안에 들어가 봐. 녹음하게.”
아이처럼 좋아하는 김건무를 보자 덩달아 내 기분도 즐거워진다.
나는 군말 없이 녹음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음악 들려주시면 제가 애드리브로 한 번 연주해 볼게요.”
투명한 유리 너머로 김건무의 손가락이 오케이 사인 보낸다.
적당한 신이…….
‘플루트의 개척자 앨버트 쿠퍼(Albert Cooper), 6품 천운자 체르니 그리고 감정을 지배하는 신 에로스 소환.’
“신들이 소환을 허락합니다.”
* * *
올해의 제일 마지막 날.
오랜만에 회사가 시끌벅적하다.
B&M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일찌감치 대낮부터 시작된 송년회 때문에 주차장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오늘까지 3일째.
김건무의 작업실에서 곡 작업을 도운 나는 해방감을 맛보며 저녁나절에 회사 사옥에 당도했다.
올해는 작년에 보지 못했던 신인배우들과 신인 가수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송년회 행사장은 2층 구내식당이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신인 가수들이 단체로 다가와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JPU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5인조 보이 그룹이라는 후배 가수들을 보며 나는 멋쩍게 인사를 했다.
“네, 앞으로 자주 봐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신인 가수 혜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열심히 하세요.”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던 김남규 팀장이 내게 다가오더니 킥킥대며 말했다.
“이제 막내 생활도 끝났네?”
“그러게요. 만날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만 숙이다가 먼저 인사받으니 어색하네요.”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선배님! 안녕하세요!”
우렁찬 사내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온다.
또 어떤 신인 가수가 인사를 하러왔나 보다.
“네, 안녕하…….”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가 내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혀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