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연말에 (3)
방송 3사의 가수들의 축제.
가요대전, 가요대제전, 가요대축제. 이름은 다 달랐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며 가수들이 제일 기다렸던 무대인 것은 확실했다.
작년에는 어쩔 수 없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올해는 나도 이 음악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비록 예전처럼 10대가수상이나 음반상, 신인가수상과 같은 시상식이 없어져 아쉽긴 했지만, 유지되고 있었다고 해도 내가 받을 수 있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신인가수상 정도는 노려볼 만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무대를 활보하며 연이어 3일 동안 축제를 누볐던 나는 며칠간의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드라마가 끝난 후로 너무 나를 몰아세우며 달려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근래에 들어 가족들과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물론 문화 생활도 즐겼다.
누나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심야 영화 한 편을 보러 갔다가 팬들에 둘러싸여 잠시 헤어졌던 곤혹스런 일도 있었지만, 모녀는 그래도 내 인기를 실감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달콤한 휴식도 잠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ABS방송국에서 개최하는 연말 시상식이 다가왔다.
ABS 연기대상 당일.
특별히 B&M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결해 준 샵에서 스타일링을 마치고 난 후 스타일리스트 김혜경이 챙겨준 검정 색상의 슈트를 입었다.
그리고 김남규 팀장이 옆에서 나를 어르고 달래는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팀장님. 그만하세요.”
“아니, 네가 채설아를 워낙 싫어해서 그러지.”
“저 이제 채설아 선배 안 싫어해요. 드라마 찍으면서 꽤 친해졌어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레드 카펫에서 에스코트해 주는 건데 뭐가 어렵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소속사 선배인데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한 차를 타고 같이 가라고 하면 불편하겠지만 그것도 아닌데 뭐.
나는 샵에서 스타일링 마무리를 하고 있는 채설아의 룸에 노크했다.
“네. 어? 시후씨?”
채설아가 차마 머리를 움직이지는 못하고 거울로 비치는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다.
“안녕하세요? 오늘 예쁘신데요?”
“원래 예뻤어요.”
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난감해 하는 표정이 여실히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채설아는 호호호 웃으며 거울을 통해 위아래로 나를 훑어본다.
“시후 씨도 멋있네요. 나란히 레드 카펫을 걸어도 창피하지는 않겠네요.”
“아, 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자신을 추켜세우는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성격에 조금 익숙해지는 나는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나를 칭찬해 주는 말이다.
채설아는 이런 화법을 자주 사용했다.
친근함의 표시라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럼 준비하고 나오세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같이 가는 건가요?”
“다른 차를 타고 가겠지만 속도가 비슷해야 한다고 해서 같이 출발하려고요. 제 차가 먼저 들어가고 선배님 차가 뒤 따를 거예요.”
“알겠어요, 그럼 에스코트 잘 부탁할게요. 오늘…… 치마가 좀 길어서요.”
밖으로 나와 차에서 조금 기다리니 채설아가 옆 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인다.
로드 김훈도 채설아를 본 것인지 차에 시동을 걸었다.
ABS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 보조석에 앉은 김남규 팀장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시후야, 오늘 상을 못 받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절대 서운해 하면 안 된다. 알지?”
“그럼요. 저는 이제 드라마 한 편밖에 안 찍은 완전 초짜 신인인걸요. 기대도 안 하고 있어요.”
김남규 팀장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다시 묻는다.
“정말 기대 안 하고 있다고?”
“음…… 그 뭐냐. 신인상? 뭐 그 정도요?”
“그래. 그래. 신인상은 평생에 딱 한 번밖에 못 받는 상이라던데. 그거 한번 노려 보자. 그나저나 네가 회사에 오디션 보러왔던 게 엊그저께 같은데 드라마도 찍고 시상식에도 가고. 대단하다 진짜.”
흐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김남규 팀장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잠시 후.
ABS 공개홀 앞에 도착하자 수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을 것이기에 나는 머리를 다시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이윽고 채설아의 차량이 내 뒤에 정차하자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주시후 씨! 여기 좀 봐 주세요!”
“이쪽 좀 봐 주세요.”
취재진 쪽으로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손을 한 번 흔들고는 내 차 뒤에 붙은 검은 차량으로 다가갔다.
차문을 열자 채설아가 차 밖으로 발을 내딛는다.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위로 그녀의 손이 포개졌다.
나란히 레드 카펫을 걸으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 채설아는 오늘따라 유독 반짝여 보였다.
레드 카펫에서 빛나면 천상 배우라던데…….
남들 눈에도 내가 빛나 보일까?
* * *
“안녕하십니까? ABS 연기대상 1, 2부의 진행을 맡은 MC 박현무입니다.”
“배우 하지온입니다.”
불꽃 폭죽이 터지며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무대 위에 수를 놓고, 스피커에서는 경쾌한 리듬이 흘러나오며 고막을 때린다.
<연기대상> 1부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초청 가수 박지영.
드라마 O.S.T의 여왕이라 일컫는 그녀의 노래가 그 서막을 올리며 ABS 공개홀에 울려 퍼진다.
무대 아래에는 배우들, 제작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둥근 테이블과 의자가 가득하다.
내가 앉은 테이블. 무대에서 제일 가까운 앞자리이다.
열 명은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테이블 가운데에는 하얀 피켓에 ‘왕의 신하’라고 적혀 있다.
드라마 <왕의 신하>의 배우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이다.
바로 옆 테이블에는 감독님들과 박은숙 작가, 음향, 카메라, 무술 감독 등이 앉아있다.
젊은 배우들끼리 한 앵글에 잡혀야 예쁘게 나온다며 제작진과 원로 배우들이 배려해 준 덕분이었다.
얌전히 앉아있는 다른 테이블과 달리 우리 테이블에서는 카메라를 피해 서로 속닥거리느라 바쁘다.
그만큼 서로 할 말도 많고, 친하다는 증거이다.
톡! 톡!
나는 아까부터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신경이 쓰여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에 앉은 강화영이 애꿎은 테이블을 손톱으로 톡톡 치고 있다.
대상 후보자에 올랐다고 하더니, 긴장이 많이 되나 보다.
나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강화영의 손을 덮었다.
손에 힘을 주고 지그시 누르자 그녀가 나를 빤히 본다.
“응? 어. 난 괜찮아. 하나도 긴장 안 돼.”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 행동으로 오해를 받았나 싶어서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시끄러워서 그래.”
“아, 그랬어? 미안, 미안.”
“긴장돼서 그래?”
“응. 조금…… 너는 긴장 안 돼?”
“나는 상 받을 거라고 기대를 전혀 안 해서 괜찮아. 그런데 인기상은 좀 받고 싶네?”
“혹시 모르니까 수상 소감 준비해 놔. 사전 온라인 투표로 뽑는 거라 네가 받을 수도 있잖아. 넌 인기 많으니까.”
수상 소감?
혹시나 신인상이라도 받게 되면 수상 소감을 말해야 한다며 김남규 팀장이 준비해 놓으라고 귀띔해 주기는 했다.
글쎄…….
감사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름을 줄줄이 말하다 보면 5분도 넘게 걸릴 것 같은데.
혹시라도 수상하게 된다면.
그래, 짧게 한마디로 가자.
상을 받을지 못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 헛물을 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유비무환이랬으니까.
“올해 드라마는 특히나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와서 어느 배우가 어느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네요. 제 마음 같아서는 골고루 하나씩 드리고 싶습니다만, 하지온 씨는 어떠세요? 특별히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배우가 있으신가요?”
MC를 맡은 박현무가 묻자 하지온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시후 씨,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응원합니다!”
하지온의 말에 곳곳의 카메라가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전광판에 내 얼굴이 뜨자 나는 손을 흔들었다.
공개홀에는 관객석에는 일반 관객들로 꽉꽉 차 있었는데, 이때 객석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묘한 광경이다.
연말에 가족들과 TV 앞에 앉아서 누가 상을 타겠니? 못 타겠니? 언쟁을 벌였던 내가 시상식 자리에 앉아서 카메라에 손을 흔들고 있으니 말이다.
“…… 해서 올해에는 시청률이 높은 작품들이 드라마 시장에 많이 쏟아졌는데요. 점점 수준이 높아지는 작품들 중에 한 작품만 선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합니다. 자 그럼 올해의 작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올해의 작가상!”
MC 하지온의 말이 끝나자 두구두구! 하며 긴장감을 조성시키는 비트 소리가 한참 공개홀 안에 울려 퍼진다.
“드라마 <왕의 신하>의 박은숙 작가님! 축하드립니다!”
“시청률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신 박은숙 작가님은 <너 때문이야!>와 <달의 후예>에 이어 세 번째 ABS방송국에서 작가상을…….”
축포가 터지며 박은숙 작가의 이력이 소개되었다.
나를 비롯한 왕의 신하 감독들과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 꽃다발과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은숙 작가는 짧은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이번에 함께 작품하면서 고생했던 배우 스탭들 모두 고생하셨어요.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아! 한마디만 더 할게요.”
박은숙 작가가 내가 앉은 테이블 쪽을 바라본다.
“차기작도 같이해야죠? 지금 2부까지 썼어요.”
모르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박은숙 작가의 차기작.
저건 내게 하는 말이다.
나는 그저 웃었다.
다음으로 아역상 시상이 있었는데, 우리 드라마의 후속작인 <수색>에서 배우 강현준의 딸로 출연했던 배우와 왕의 신하의 어린 허인 맡았던 김윤성이 수상했다.
“시후 형! 제가 더 크기 전에 작품 하나 빨리 찍으세요. 그래야 제가 아역 한 번 더 하죠.”
김윤성이 수상소감 마지막 덧붙인 말이었다.
“신인상 남자배우 부문 수상이 있겠습니다. 후보자들 화면으로 만나 보시죠.”
남자 배우 후보는 8명.
배우들이 출연했던 작품 중에서 하이라이트만 뽑아 놓은 짧은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야, 너 올라갔네. 이러다가 상 받는 거 아냐?”
그 짧은 시간동안 정해수가 장난을 걸어왔다.
내 옆구리를 푹푹 찌르는.
“아, 형. 왜 그래! 하지마!”
“주배우! 지금 예민해졌네? 야야! 앵글 체인지 됐어. 인상 쓰지 마. 이거 생방이다!”
전국에 생방으로 나가고 있는데 화낼 수는 없었다.
나는 팔을 뻗어 정해수의 볼을 인정사정없이 꼬집었다.
“신인상 남자부문!”
빨간 봉투에서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꺼내 본 MC 박현무가 하지온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온 씨의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신인상. 주시후 씨! 축하드립니다!”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대는 했지만.
정말 받은 줄은 몰랐기 때문에 기분이 얼떨떨했다.
음악 방송에서 1위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뭐해! 빨리 나가!”
옆에서 배우들이 등을 떠민다.
무대로 올라 트로피를 건네받으며 수많은 동료들의 축하를 동시에 받으니 한번 올라간 입꼬리가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이크 앞에 서서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
“드라마를 찍으면서 같이 고생한 동료 배우들과, 제작진, 스탭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희 가족들과 저의 팬클럽 주슈 여러분! 항상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신 그분들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