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89화 (89/170)

# 89

89화 연말에 (2)

“그래서 제 타이틀곡이 정해졌다고요? 가이드라인 잡아 놓은 게 다인데 그거만 듣고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지난 3개월 동안 작곡해 놓은 다섯 곡 중에서 어느 것이 좋고 나쁜지 우열을 가리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전부 내가 만든 자식들 같은 곡들이니까.

나는 김남규 팀장에게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었다.

나도 우열을 못 가린 곡들인데, 완벽하게 완성도 되지 않은 곡을 듣고 타이틀곡을 정할 수 있다니…….

따지듯 물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김남규 팀장은 괜히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듯 말이 빨라진다.

“물론 다 좋지.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음원을 출시했을 때 사회적 분위기와 그 계절에 어울리느냐 안 어울리느냐 혹은 요즘 트렌드인지 아닌지 고려해서 타이틀곡을 정한 거야. 그쪽으로 분석력 하나는 끝내주는 베테랑들이니 그냥 믿어 봐. 어차피 타이틀곡을 어느 곡으로 할지 너도 못 정했었잖아.”

“그랬죠. 그러고 보니 「눈의 노래」가 딱 어울리기는 하네요. 분위기로 보나 제목으로 보나. 그런데 이거 겨울 지나가면 인기가 훅훅!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에이. 그래서 메인 타이틀곡 홍보 끝나고 나면 서브 타이틀곡 가지고 활동하잖아.”

“서브 타이틀곡은 어떤 곡이에요?”

“아직 안 정했어. 일단 「눈의 노래」로 활동하면서 지켜보려고. 타이틀곡이 인기 있으면 앨범의 다른 수록곡도 다 인기를 끄는 법이거든. 그중에서 가장 순위 높은 노래로 밀어야겠지?”

쉽구나.

김남규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녹음은 언제부터 할 수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녹음에 들어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프로듀싱팀과 아까 조율했는데 마스터 디렉터가 미국에 가 있어서 4일후에나 들어온대. 늦어도 5일이 지나야 가능할 거야.”

“그럼 프로듀싱 룸에 레코딩 엔지니어 분은 계시는 거죠?”

“그렇지……?”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간다.

4일 안에 다 할 수 있을까?

잠시 시간계산을 하던 나는 김남규 팀장에게 부탁을 청했다.

“팀장님. 그럼 내일부터 엔지니어 분이랑 작업 좀 하고 싶어요.”

내가 만들어 놓고 적당히 미디 악기로 찍어 놓은 것들 중 실제로 구할 수 있는 악기는 직접 연주해서 삽입하고 싶었다.

기계음과 에로스의 기운을 불어넣어 직접 연주하는 것은 들을 때 아주 많은 차이를 낼 테니까 말이다.

내 계획을 들은 김남규 팀장은 다섯 곡이나 되는데, 4일 동안 가능하겠냐고 묻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임준석 실장님한테 그렇게 보고하고, 레코딩 엔지니어에게 말해 둘게. 내일부터 당장 작업 시작한다고.”

“녹음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요. 윗분들과 얘기하셔서 음반 출시일도 빨리 잡아 주세요. 제가 최대한 맞출게요.”

내일부터 녹음에 들어가면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겠구나 싶어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내 목표는 빨리 녹음을 끝내고 연말 가수들의 축제에 참석하는 것이다.

작년엔 타이틀곡 「I want you」의 음원 차트 1위 시기가 가요 축제와 맞지 않아서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김남규 팀장은 당장 다음날부터 녹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나는 본격적으로 악기 녹음에 들어갔다.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할 수 있는 악기는 어느 것이든 직접 녹음했다.

4일 동안 엔지니어는 힘들 법했는데도 괜찮다며 오히려 많은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진기한 광경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했다.

빠르게 세션 녹음을 끝내 놓고 나니 이번엔 노래를 녹음해야 하는 차례가 왔다.

마침 마스터 디렉터가 미국에서 타이밍 좋게 돌아오기도 했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에로스를 비롯한 신들을 총동원한 녹음이었다.

이후 J.R 스튜디오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유쾌한 류준과 재킷 촬영도 단숨에 마쳤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자 앨범 출시일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12월의 첫 번째 날.

드디어 주시후의 이름으로 앨범이 발매되었다.

싱글 음반을 제외하고 정식으로 발매된 첫 번째 앨범이었다.

타이틀곡 「눈의 노래」가 음원 시장에 풀린 날.

그야말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단숨에 음원 차트 3위에 들어갔다.

음반 발매는 팬 카페를 비롯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 드라마 히트에 연이은, 가수 주시후의 성공적인 앨범발매.

- 주시후의 신곡 ‘눈의 노래’ 음원차트 1위에 랭크.

- 주시후의 새 앨범 전곡이 음원차트 100위에 입성!

[12월 1일 가수 주시후의 정식 앨범이 발매 되었다. 음원 발매 이틀 만에 타이틀곡 「눈의 노래」는 음원 차트 1위에 올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B&M 엔터테인먼트의 홍보자료에 따르면 오는 12월 5일 교훈문고에서 주시후의 앨범 사인회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B&M 엔터테인먼트 음반사업본부 직원들은 입이 귀에 걸렸고, 홍보마케팅본부 직원들은 때맞춰 B&M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홍보해야 했으니, 매일 야근해야 할 정도로 업무에 시달렸다.

그렇게 앨범을 발매하고 나서 5일째가 되던 날.

“팀장님, 거의 다 왔어요. 앞 사거리만 지나면 바로예요.”

로드 김훈의 말에 김남규 팀장이 휴대폰을 꺼내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렇게 하죠. 네.”

김남규 팀장이 전화를 끊은 타이밍에 우리가 차고 있던 차는 어느새 교훈문고 건물에 도달했다.

“시후야, 아직 내리지 말아 봐. 지하 주차장에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겠다고 했거든.”

서울 종로에 위치한 교훈문고 1층.

“흐아!”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커튼을 젖혀 밖을 살짝 살펴본 내 입에서 괴기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 오픈 시간이 9시 30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9시도 안 됐는데 무슨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아직 영업시간이 되지 않아 건물이 출입문이 닫혀있는 상태.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이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여긴 네 사인회가 아니더라도 원래 사람이 많은 곳이야.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이잖아. 그리고 오늘 네 사인회는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아침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사인을 못 받을 수도 있거든. 사인하고 사진 찍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사인회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그래서 보통 선착순으로 받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마쳤다.

지하주차장에 차량이 들어서자 경비를 맡은 업체와 행사장 측 직원들이 차를 둘러싼다.

“주시후다!”

“꺄아! 어떡해? 실물은 처음 봐!”

“오빠! 여기 좀 봐 주세요!”

차 문이 열리고 내가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주차장 있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근접 경호를 받으며 손을 흔들었다.

“톱스타 된 기분인데요?”

김남규 팀장에게 말하자 그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너만 모르고 있었나본데, 너는 이미 톱스타야.”

쉴 새 없이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음반 코너 앞에 세팅된 행사 장소로 다가갔다.

[주시후 초청 앨범 사인회]

커다란 현수막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법 편해 보이는 의자와 길이 2미터가 넘어 보이는 테이블도.

“저기 앉아서 종일 사인하려면 좀 힘들겠는데요?”

“그러게 왜 이 아침부터 시작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원래 오후 2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데.”

“팬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왜 뭐라고 그래요! 그리고 앨범 구매한 사람들한테만 사인 해 주는 거라면서요? 많이 팔면 좋은 거 아니에요?”

“요즘엔 다 인터넷으로 구매하거든? 에휴……그래. 팬 서비스 차원에서 일 좀 하겠다는데. 이미 온 걸 어쩌겠냐? 나도 오늘 하루 고생 좀 하지 뭐.”

교훈문고의 오픈 시간이 되자 음반 코너로 사람들이 줄지어 밀려들어 온다.

토요일이라 아침부터 몰려드는 인파가 어마어마하다.

다행히 서점 측에서는 아예 계산하는 카운터 앞에 내 앨범을 쌓아 놓고 판매 시작을 했기 때문에 구매자는 많았지만 모두 질서 정연했다.

그리고 잠시 후 김남규 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오늘 하루 고생 좀 하지 뭐.”

고생을 왜 자기가 해?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사인을 해주고 나면 팬들은 어김없이 김남규 팀장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이거 누르시면 돼요.”

“이거 누르시면 찍혀요.”

“죄송한데, 사진 한방만…….”

“매니저님! 사진 좀!”

오히려 나보다 더 바빠 보였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저 팀장님 알아요! 팬 카페에 올라온 사진 많이 봤어요!”

“우리 시후 오빠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 좀 드세요.”

“매니저님 저랑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김남규 팀장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사인회는 오후 늦도록 계속되었다.

점심도 거르고 화장실을 가야할 때에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외의 시간은 앨범에 사인하고 악수하고 사진을 찍는 데 활용했다.

주최 측에서는 점심을 먹고 오라고 했었지만 길게 늘어진 줄이 끝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팬들을 세워 놓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온단 말인가?

그리고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오빠! 이거 제가 아침에 만들어 온 유부초밥이에요. 나중에 꼭 드셔주세요!”

“우와! 맛있겠는데? 나중에 말고 지금 먹어 보면 안 될까?”

“헉! 정말요?”

이런 상황이 종종 연출된다.

나를 배부르게 만드는 상황.

어떻게든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 싶어 간식을 하나씩 입에 넣으니 배가 꺼질 틈이 없다.

팬들이 가지고 온 빵과 쿠키, 간식들과 커피를 포함한 온갖 마실 것들이 테이블 위에 그 이상 놓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또한 김남규 팀장이 한쪽 구석에 받은 선물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는데 마치 그 공간이 선물 가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러 온 팬 서비스 자리가 아니라, 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주최 측과 약속했던 오후 5시쯤이 되자 갑자기 길게 늘어선 줄의 뒤쪽에서 웅성웅성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에요?”

방금 또 한명의 소녀에게 사인을 끝내놓고 김남규 팀장에게 묻자 그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원래 사인회는 6시까지 하기로 되어 있잖아. 끝낼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까 주최 측에서 이 이상 줄을 세울 수가 없지. 그래서 지금 줄 서 있는 사람들까지만 사인받을 수 있다고 공지한 거야. 그랬더니 팬들이 사정얘기 하는 거지. 6시가 돼서 사인을 못 받게 되더라도 일단 줄은 서 겠다고.”

김남규 팀장의 말을 듣고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물었다.

“팀장님, 저 이 뒤로 스케줄 없잖아요?”

“어? 응.”

김남규 팀장은 내 의중을 파악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 시간만 더 연장한다고 말해 놓을게.”

“고마워요. 팀장님.”

오후 6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던 사인회는 오후 7시까지 한 시간 더 연장되었다.

주최 측에서도 시간을 정정해서 발표하자 맨 뒷줄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조금 시간이 늘어났다고 해서 모두에게 사인을 다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선을 다해 줄 수 있는 만큼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고 싶다.

줄을 서 있으면서도, 한참을 기다리면서도 행복해 하는 팬들.

좋아하는 가수에게 사인 한 장 받고 사진 한 장 찍으려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그들을 보며 내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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