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연말에 (1)
드라마 <왕의 신하> 종방연.
매회 자체 시청률을 갱신하면서 최종 시청률 57%라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록을 남기고 드라마는 막을 내렸다.
술잔을 기울이는 모두들 그 시청률 이야기를 하느라 여기저기 침이 튄다.
대체적으로 종방연은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방영되기 전에 치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의 스케줄을 고려하다 보니 <왕의 신하> 마지막 회가 끝나고 모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배우들과 제작진들은 함께 촬영했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고 한다.
그들의 현재 화두는 마지막 회에 등장한 나와 강화영의 키스씬이었다.
“그 신이 원래 키스 신이 아니지 않아? 인공호흡 같은 거 아니었어?”
ABS방송국의 김기만 PD가 박은숙 작가에게 물었다.
“가볍게 입술만 맞댈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키스 신으로 이어지니까 분위기상 컷!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게 더 마음 끓고, 애절한 게 너무 좋던데요?”
내 마지막 촬영을 책임졌던 전승원 PD가 대답했다.
“저도 연출이 잘 돼서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심지어는 작업실에서 그 장면 보면서 울었다니까요. 우리 작가 애들이랑 부둥켜 안고요. 아, 또 생각하니까 감정이입 되네요.”
박은숙 작가가 눈물이 나려고 한다며 얼굴에 손부채질 한다.
강화영은 키스 신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빨개졌고,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놀리든가 말든가 시청률만 잘 나왔으면 됐지 뭐.
“이제 다들 뭐해? 드라마도 끝났는데?”
무술 감독 정두훈이 나와 강화영을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피식 웃더니 모두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키스 신 얘기에 조용히 입을 닫은 사람이 두 명이나 되니, 분위기를 바꿔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저는 영화 하나 하려고요.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을 하나 받았거든요. 남자 주인공의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인데, 결국 해피 엔딩이에요. 그게 마음에 들어서요. 이번 드라마에서 못 이룬 사랑을 한번 이뤄 봐야겠어요.”
조연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드라마의 결말을 두고 우리끼리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박은숙 작가가 처음 생각했던 결말은 강화영이 조연석의 마음을 받아 주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었다고.
그런데 드라마에서 내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대본이 수정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조연석은 아쉽게도 강화영과의 러브 라인이 무산되고 말았다며 연말 시상식 때 베스트커플상은 물 건너갔다고 하소연했던 적도 있다.
“저는 이번에 드라마 찍으며 많은 걸 배웠어요. 어렸을 때 하이틴 드라마를 찍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어려서 분위기? 이런 거 잘 몰랐거든요.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고 그랬죠. 제대로 촬영장 분위기를 느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촬영장에 매일 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서로 챙겨주는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요. 그 기분은 빨리 또 느껴보고 싶어서요. 저는 드라마 오디션 보러 다닐 거예요.”
문영호의 말이었다.
항상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는데, 이 말을 할 때의 문영호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영호 너는 이번에 얼굴이 확실히 알려져서 오디션이 아니더라도 배역이 좀 들어올 거 같은데?”
조연석의 말에 문영호가 방긋 웃는다.
그러더니 수줍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저 이번에 드라마 찍고 팬들이 엄청 생겼어요. SNS에도 응원 글이 얼마나 많이 올라오는데요. 아마 다음 드라마에서 잘만 하면 팬들이 훨씬 많이 늘어나겠죠?”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문영호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 자신감이면 앞으로 뭘 해도 하겠다 싶었다.
다른 조연배우들도 대부분 오디션을 보거나 극단에서 연극을 준비할 거라고 한다.
강화영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중국에 가봤냐고 물으며 휴대폰에 저장되어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베이징에서 출국해야 했던 마지막 날 기어이 만리장성에 가서 관광하러 가서 찍은 사진들.
“어머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나는 10년 전에 갔다 왔거든. 만리장성에…….”
그녀의 말에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저는 이제 앨범 준비해야죠.”
내 한마디에 모두들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지. 너는 가수였지.’ 이런 표정들이다.
“다들 바쁘게 일하다가 보면 서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오늘 헤어지면 또 언제 다시 뭉쳐 보나?”
정해수가 사뭇 아쉬운 표정이다.
처음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건네는 사이가 되어 헤어지는 것이 무척 서운한가보다.
“아무 때나 연락해서 만나면 되지. 편하게 밥 먹고 차 마시고…… 형은 스케줄 바빠지면 연락 안 할 건가 봐?”
“아니! 한가한 건 나 혼자뿐이고 다들 바쁠까 봐 그렇지. 너, 진짜 내가 막 전화하고 그런다?”
내 말에 정해수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나는 밝아진 표정의 정해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연말 시상식 있잖아. 그때 또 단체로 만나서 송년회 하면 되지.”
내 입에서 시상식 얘기가 나오자 모두들 얼굴표정이 진지해진다.
“시상식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연기대상을 누가 받을까요?”
“에이, 그건 아직 모르지. 우리 드라마 하기 전에 방영했었던 <앞집 남자의 고양이> 있잖아. 거기서 최정수 선배님이 연기 잘했다고 소문났더라.”
“월화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와도 경쟁해야 하잖아요.”
“아! 맞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우리 후속작으로 방영되는 <수색> 있잖아.”
“그거 재미있겠던데요? 강현준 선배님이 또 경찰 연기 잘하기로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아휴. 경쟁작이 엄청 많네?”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한동하가 아까부터 자꾸 내게 눈치를 준다.
뭘 어쩌라고?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킨다.
아……!
“동하 형이랑 연석이 형도 연기대상 후보에 오르겠죠?”
나는 한동하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모두에게 물었다.
“당연히 오르겠지. 시청률이 57%의 주역들인데.”
“둘이 붙으면 과연 누가 상을 받으려나?”
“왜 둘이라고 해요? 강화영이랑 채설아도 있는데?”
“에이. 그래도 한동하랑 조연석 연기가 빛났잖아.”
한동하는 자신의 이름이 마구 거론되자 신이 나는지 그의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그러면서도 짐짓 아닌 척하며 겸손을 떨었다.
“우리 드라마에서 대상을 뽑는다면, 연석이 형이 받아야지. 나이로 보나 연기 경력으로 보나 그렇잖아.”
한동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금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한동하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겸손을 떨고 격식을 차리고 겸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항상 추켜세우며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모두들 깔깔대는 틈바구니에서 강화영이 한마디 꺼냈다.
“지금까지는 올해 최고 인기작이니까 우리 팀에서 상도 많이 가져가겠죠? 대상 말고도 최우수상도 있고 인기상도 있고. 아! 올해 신인연기자상은 누가 탈까요? 우리 팀에도 받을 사람이 너무 많은데요?”
그 말에 채설아가 조용히 웃다가 힐끗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후 씨 있잖아.”
그녀의 말에 나는 일순간 표정이 굳는 것을 느꼈다.
왜 나를 걸고 넘어지지? 비꼬는 건가?
종종 연기에 비해 인기로 상을 가져가는 배우들을 꼬집는 말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곧 채설아의 말이 이어졌다.
“연기 엄청 잘했잖아. 시후 씨가 받는 게 맞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채설아가 내 연기를 인정하고 나를 칭찬해?
언제는 개나 소나 연기하는 거 짜증 난다며 가수 활동이나 열심히 하라더니.
어쨌든 받은 칭찬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사실이잖아요.”
* * *
유난히도 더웠던 날씨가 한풀 꺾이며 선선한 바람이 볼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단풍이 채 지기도 전에 어느새 찬바람이 품을 파고든다.
드라마가 끝나고 3개 월 후.
“그 녀석이 혼자 작업한 거 맞아? 누가 도와준 거 아니지? 진작 알아봤지만 보고 또 봐도 대단한 녀석! 역시 대단한 놈이야! 하하하!”
B&M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
가수 매니지먼트 총괄 실장 임준석의 호탕한 웃음이 회의실 안에 울려 퍼진다.
웃고 있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아트디렉터팀의 최현미 실장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돈다.
“3개월 만에 다섯 곡을 만들었다고 해서 개판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한 곡 한 곡 다 너무 좋은데요?”
B&M 엔터테인먼트 대표 프로듀서인 김도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작곡 수준은 뭐, 이미 제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네요. 유행을 타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면서도 세련됐네요. 시후 씨가 편곡에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작곡은 편곡이랑 다르잖아요. 제가 기대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곡들이라 더 할 말이 없네요. 다섯 곡 모두 다 오케이예요.”
간판 작곡가가 이렇게 말하니 잠자코 듣고 있던 김남규 팀장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되었다.
“다행이네요. 사실 시후가 밤잠도 안 자고 매달려서 심혈을 기울인 곡들이라 까일까 봐 걱정했어요.”
“김 팀장도 원.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했구만. 시후가 언제 실망 시킨 적이 있었나?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믿었어야지.”
임준석 실장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표정이다.
최현미 실장은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더니 회의실에 모여 있는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 아트개발실에서 앨범 구성 잡고 콘셉트를 짜야 하니까 최종적으로 결정해 볼까요? 방금 들은 다섯 곡! 시후 씨가 작곡한 곡은 다 넣는 거로 할게요. 모두 동의하셨으니까요. 그리고 김도완 작곡가님 곡으로 한 곡, MK 씨가 만든 곡으로 한곡! 총 일곱 곡 할까요?”
잠자코 있었던 작곡가 MK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제 곡 말이에요. 두 곡 넣어주시면 안 될까요?”
“에이. MK 씨는 시후 첫 음반 낼 때 「I want you」 써 줘서 이름 좀 팔았잖아.”
“형님! 그 타이틀곡이요. 제가 썼긴 했죠. 그런데 시후 씨가 싹 다 편곡해서 어쿠스틱으로 바꿨잖아요. 물론 편곡한 것이 더 좋아서 수락했지만. 이번엔 저도 좀 잘되 보고 싶어요.”
MK의 말에 김도완이 반박하며 나섰다.
“나야말로 명색이 B&M 엔터 간판 프로듀서인데 김도완 이름으로 곡이 하나밖에 안 들어간다면 내가 좀 서운하지?”
“저는요. 시후 씨 주려고 곡을 두 개나 써 놨어요. 그런데 시후 씨한테 못 주면요, 곡 버려야 돼요. 음역대가 너무 높아서 다른 가수는 부르지도 못해요.”
“나도 댄스곡 두 개 만들어 놓은 거 시후 씨한테 주려고 이미 안무 팀에 안무도 짜 놓으라고 곡 보냈거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점점 커지자 최현미 실장이 회의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자자! 알겠습니다. 그럼 두 작곡가님의 곡은 총 두곡씩 넣도록 하죠. 대신에 시후씨에게 들려주고 나서 확답 드릴게요. 만일 시후 씨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노래 불러야 하는 가수 당사자가 싫다는데 억지로 부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두 명의 작곡가가 수긍하자 최현미 실장은 흡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타이틀곡은 시후 씨가 작곡한 곡 중에서 고를 거예요. 이점에 대해 이의 없으시죠?”
흔쾌한 대답과 암묵적 동의까지 모두 얻어낸 최현미 실장은 타이틀곡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밝혔다.
“저는 마지막 곡이 참 좋던데. 들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더라고요. 겨울에 딱 어울릴 만한 악기 구성도 그렇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겨울엔 역시 감성 발라드지.”
“세 번째 곡도 좋아요. 들을수록 흥이 나는 게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도 나고요.”
“저는 첫 번째 곡인 록발라드가 좋은데요. 저기에 시후 씨 목소리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봐요. 고음이 쫙! 폭발하면 들을 때 얼마나 시원시원하겠어요.”
“이 사람아! 추워죽겠는데 시원은 무슨! 얼어 죽을! 따뜻하게 마음을 녹이는 발라드가 최고지.”
임준석 실장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흔들며 회쳤다.
“그만!! 정신없어! 그냥 투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