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드넓은 곳에서 꿈꾸다 (2)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들어선 의문의 남자.
누구지? 모르는 사람인데?
“오! 주시후 씨!”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사내는 내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분명 아는 사이는 아닌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큰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예리하게 빛나는 것이 매섭게 보이지만 눈썹이 아래로 축 쳐져있어 나쁜 인상은 아니다.
거기에다가 입가에 주름이 가득하다.
평소에 잘 웃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나저나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눈알을 굴리자 머리도 홱홱 돌아간다.
기억저편에 있는 단서의 실마리를 끄집어내려고 하자 불현 듯 한 얼굴이 떠오른다.
어? 어어? 설마?
“혹시, 동극 감독님이신가요?”
“맞아요. 날 아네요?”
나는 반가움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렸을 때부터 감독님 영화보고 컸어요. 진짜 너무너무 팬입니다! 너무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한껏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중국 영화계의 거장 동극.
사실 출생지는 베트남이었지만, 현재 중국에서 그의 이름 두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천년유혼」과 「동방부패」 그리고 「소우강호」.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중국 무협의 거장. 스크린의 붉은 예술가.
어떤 수식어를 붙여 놓아도 모자란 그의 업적들.
그는 누가 봐도 최고의 연출가였다.
신나서 인사를 건네다 보니 ‘그런데 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무슨 볼일이라도?”
“아! 사실 오늘 방송국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들렀다가 주시후씨가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꼭 만나보고 싶어서 그냥 와봤어요.”
나를 보러 왔다는 이야기에 내 가슴이 또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저를…… 아세요?”
“그럼요! 지금보다도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콜 루크와 막역한 사이거든요.”
세계적인 피아노 작곡가 콜 루크.
내 싱글 앨범의 수록곡인 「Song of God : 신의 노래」의 작곡가이기도 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그 친구가 엄청 칭찬했어요. 곡 하나를 줬는데 아예 다른 곡으로 만들어 놨다고 했죠. 그래서 그 친구한테 물었어요. 네 자존심에 그걸 허락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들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들어보셨어요?”
“당연하죠. 쉼표 하나 맘대로 바꾸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 친구 성격에 그런 말이라니. 바로 들어 봤죠. 역시나…… 싶더라고요. 그 피아노곡은 정말로 대단했어요! 엄청난 생명 에너지가 느껴지는 곡이었거든요!”
“그렇게 좋게 들어주셨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후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동극 감독이 자꾸 말을 꺼내려다 말고 주춤거리는 것이다.
분명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듯 보였다.
“감독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하셔도 돼요. 어떤 말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내 말에 동극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은 곧 미소로 이어졌다.
“그럼 편하게 얘기해 볼게요. 시후씨는 이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는다죠?”
“아! 그것에 대해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가수이기 때문에 먼저 음반을 발매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요. 연기도 확실히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할리우드는 이르다고 생각해요.”
“음. 그럼 음반 녹음을 끝내고 나서 스케줄이 괜찮다면, 나랑 영화 하나 할까요?”
“네?”
* * *
“보통 일이 아닌데? 동극 감독이라니! 대체 뭘 보고? 너를?”
동극 감독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둘이 나눴던 얘기를 김남규 팀장에게 전했다.
그런데 반응이 영……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다.
“팀장님. 대체 누구 매니저예요?! 나를 은근히 멕이시네?”
“아니, 그게 아니라 동극 감독이 너를 어떻게 알고 영화를 찍자고 그래? 신기해서 그러지.”
나는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작곡가 콜 루크와 절친한 사이이고, 내 피아노 연주곡을 듣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드라마를 찍었다는 소식에 급히 드라마 몇 회를 손에 넣어 볼 수 있었다’고.
동극 감독은 무협 영화 한 편을 찍으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내 검술을 보고 너무 탐이 났다고 한다.
중국에서 인지도도 높아졌고, 연기도 뛰어난데다가 인물까지 훤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내가 하겠다고만 하면 자세한 것은 B&M 엔터테인먼트와 조율하겠다며 개인 연락처까지 주고 갔다.
김남규 팀장은 얘기를 전해 듣더니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뒷통수를 긁적인다.
“감독도 좋고 중국에서 영화를 찍는 것도 다 좋은데……스케줄이 되려나 모르겠다.”
“왜요? 저 음반 녹음 하고 나서 또 뭐해요?”
대답에 뜸을 들이는 것이 나도 모르게 스케줄을 잡아놓은 것이 분명하다.
“구두 계약이긴 하지만 드라마 찍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대본을 누가 쓰느냐에 따라 계약 성사 여부가 달라지겠지만, 아마 박은숙 작가가 쓰겠다고 하면…….”
“드라마를 또 찍어야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는 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어요. 전승원 감독님이 직접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음악 소재의 드라마라고 했던가? 그냥 하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요.”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극 감독과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려서 그의 영화를 보며 커 온 터라 더 없을 영광이긴 했지만, 내 본업은 가수.
만일 또 연기를 한다면 기왕이면 음악 소재의 드라마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악기라도, 어떤 노래라도 내가 극중에 직접 부른다면 보고 듣는 이들의 감동이 더 할 것 같단 생각도 들었고.
“음반 녹음하고 나서 드라마 찍고 나서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너무 제 욕심이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동극 감독이 얼마나 기다려주겠니? 그쪽도 스케줄이라는 게, 사정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기는 하지만 몸이 한 개뿐인데 어쩌랴?
내일쯤 동극 감독에게 연락해 줘야겠네.
쓴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대기실로 한 명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녹화에 들어가자고 알리는 프로그램의 스태프이었다.
<쾌락난영>
중국 동양 위성 방송에서 20년이 넘도록 인기를 끌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웬만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꼭 한 번씩 거쳐 간다는 이 예능프로그램 스튜디오에 오늘은 내가 올라섰다.
4명의 MC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오프닝 멘트를 하고 나자 제일 먼저 중국 팬들과의 소통 시간이 주어졌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이 번쩍! 하고 빛을 내며 영상이 흘러나온다.
팬들이 직접 찍어서 보낸 영상들.
응원의 메시지도 있고 질문들도 있으며 요청도 있다.
가령 ‘피아노 연주하는 영상을 본적이 있어요. <쾌락난영>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세요.’하는 요청.
영상이 끝나기가 무섭게 4명의 MC들이 피아노 연주를 해 달라며 물고 늘어졌다.
내가 흔쾌히 웃으며 승낙을 하자마자 스태프들이 피아노 한 대를 밀며 스튜디오로 들어온다.
피아노앞에 앉아서 건반 덮개를 열고 가볍게 손을 풀며 목도 풀었다.
어차피 노래도 시킬 것 같은데 이참에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까지 하는 것이 좋을듯했다.
“자 준비 되셨으면 들어 볼까요?”
“그럼 제 노래 「I want you」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원래 기타 치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피아노로도 괜찮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평가는 시청자분들께 맡기겠습니다.”
원래 밝고 경쾌한 리듬과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중독성 있는 노래였는데, 내가 이것을 감미롭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바꿔 연주해서 지금의 어쿠스틱 「I want you」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번엔 피아노 버전으로 바꿔야 하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신계에 있는 천상경으로 의지를 전달했다.
‘품계 6품의 헤바 빌츠, 체르니 그리고 감정을 지배하는 신 에로스 소환.’
“모든 신이 소환을 허락합니다.”
천상경 사자의 말이 공명되어 들려온다.
여러 피아노의 신들이 있지만 영국 출신의 헤바 빌츠는 생전에도 화려하고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의 대가였다.
아마 체르니와 합작하여 내가 원하는 따뜻한 연주를 무리 없이 해낼 것이다.
오랜만에 음악의 신들을 소환하고 나니 이들이 신이 났는지, 빨리 연주를 시작하자며 내 손가락에 가벼운 자극을 준다.
나는 에로스를 통해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게 덮씌웠다.
이것은 내 손가락과 목소리를 통해 듣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질 것이었다.
나는 두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얹었다.
이내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며 건반을 두드린다.
손끝에서 옅은 노란색 안개가 피어나더니 사방으로 퍼지며 흩어졌다.
그러더니 연주를 듣는 방청객들의 표정이 편안해지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는 것이 보인다.
뒤 돌아보면 손에 잡힐 듯 항상 곁에 있는 너.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너의 존재는 항상 힘이 돼.
감미로운 목소리가 장내를 장악하자 여기저기서 오! 하는 감탄성이 흘러나온다.
청중들은 내가 한국어로 노래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사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을 테지만, 아마 마음에 와 닿는 언어는 같을 것이다.
노래로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것.
당신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Baby, I want you. 너의 미소. Baby, I want you. 너의 사랑.
Want you. Want you. 원해. 너의 모든 것. 나만 바라봐 줄래.
이제는 내가 널 응원할게. 내게 기회를 줘.
항상 너와 함께할 거야. 찬란한 우리의 청춘.
노래가 끝나고 피아노를 치던 손가락이 멈출 때 쯤 방청객에서 눈물을 훔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감동시켜야 할 때는 음악만큼 반응이 빠른 것이 없다.
가수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드는 순간이었다.
* * *
베이징 공인 체육 경기장.
블랙 타이거의 베이징 콘서트가 열리는 곳이다.
무대 위에서 블랙 타이거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나는 한쪽에 서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언젠가는 나도 콘서트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려면 빨리 새 앨범을 내서 곡 수부터 늘려야겠지만.
최종 리허설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오던 블랙 타이거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공연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건지 도통 말이 끝이질 않는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대기실로 향하는 복도.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를 느낀 건지 갑자기 막내 진우가 뒤를 돌아본다.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앞을 보고 걷다가 옆에 있던 리더 동혁에게 말을 건넨다.
“뭐지? 내가 헛것을 봤나?”
다시 뒤를 돌아보는 진우는 이번엔 나를 꼼꼼하게 뜯어본다.
그러더니 눈을 마구 비비고 동혁에게 다시 묻는다.
“형! 내가 잘못 본 거야? 쟤 시후 아니지?”
일제히 뒤를 돌아보는 블랙타이거 멤버들.
나는 방긋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나, 맞거든!!”
순식간에 내게 뛰어와 나를 둘러싼 멤버들.
하나같이 놀랐는지 토끼 눈을 하고 있다.
“어떻게 왔어? 네가 중국엔 무슨 일이야?”
“설마, 게스트야?”
“게스트 중에 한 명이 스케줄 때문에 미확정이라고 하던데, 그게 너였구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