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드넓은 곳에서 꿈꾸다 (1)
중국 문화여유부 부장 공치오쭝이 준비한 저녁 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연회라고 읽고 미팅이라고 써도 될 정도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눴다.
‘공치오쭝’과 같은 몇 명의 정치가와 문화 예술 관련 종사자들.
중국 메스컴의 유명 기자들과 중국 매니지먼트회사의 대표들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저녁식사는 끝이 났는데 배는 엄청나게 고팠다.
제일 지루한 시간은 공치오쭝의 낭독문을 들어야 하는 때였다.
중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한국의 인재로 치켜세워 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때는 거의 졸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오, 배고파. 팀장님 뭐 먹으러 밖에 나갔다가 오면 안 돼요?”
스위트룸 소파에 널브러진 나는 김남규 팀장을 졸랐다.
그는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당연히 안 된다고 한다.
최재우 이사도 잠시 자리를 비운데다 매스컴에서 떠드는 바람에 내가 중국에 온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밖에 함부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시후야, 배 고프면 룸서비스 시켜. 밖에 돌아다니더라도 낮에 나가야지. 밤엔 위험해.”
김남규 팀장의 설득에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이징에서의 첫날밤을 이렇게 보낼 순 없다.
밖에 나가서 간식이라도 사먹으며 길거리라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김남규 팀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의 눈싸움.
못 이기겠다는 것을 알았는지 김남규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쉰다.
“알았어. 잠시만 나갔다가 오는 거다! 대신에 모자랑 마스크는 꼭 착용해야 해!”
“넵!”
밖으로 나온 김남규 팀장과 나는 둘이 길거리를 헤치며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걱정스런 마음에 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나오자고 제안했던 김남규 팀장도 둘이서 걷다보니 기동력 있는 것이 훨씬 편했는지 군말 없이 내 옆에 찰싹 붙어서 걸었다.
작은 골목을 지나다니며 애초에 먹고 싶었던 왕만두를 사먹기도 했고, 노점에서 공예품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렇게 발길이 닿는 곳으로 무작정 걷다보니 공원한쪽에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팀장님, 우리도 저쪽으로 가 봐요.”
“안 돼.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해.”
“에이. 인적 드문 곳이 더 위험하죠. 괜찮아요. 변장해서 아무도 못 알아보잖아요.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본데 궁금해서 그래요.”
나는 김남규 팀장의 팔을 억지로 끌고 사람들 속을 헤집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쿵쾅 거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춤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빙 둘러선 곳.
그 가운데서는 춤꾼들의 대결이 한창 중이었다.
“댄서들인가 봐요. 재미있겠네.”
내가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서자 김남규 팀장이 내 뒤에 딱 붙어 선다.
혹시나 있을 위험에 대비하려는 것인지 두리번거리는 것이 좀 과하다.
“팀장님, 괜찮다니까요. 다 구경꾼들인데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하세요?”
“아니, 혹시라도 너 알아보고 몰려들까 봐…….”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는 김남규 팀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자, 그냥.
김남규 팀장은 걱정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춤으로 드러나는 자유로움과 젊음을 그냥 너무 좋았다.
나도 모르게 들썩거리는 고개는 위아래로 끄덕거려졌고 손은 자연스럽게 비트를 탔다.
음악이 끝날 때 쯤, 방금 한 놈을 밀어냈는지 과도한 제스처를 취하며 스웨그를 뽐내고 있는 눈앞의 춤꾼은 맨 앞줄에 있는 사람들을 도발한다.
아마 맨 앞줄에 서있는, 옷차림이 남다른 몇 명은 이 구역에서 알아주는 댄서들인가 보다.
요즘 스트릿댄스 배틀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아마 그런 것을 하는 모양이다.
중앙에 선 춤꾼에게 도발을 당하자 한 여자아이가 출격했다.
열일곱 살쯤 되었을까?
여자아이가 가운데 나와 버티고 서자 음악이 싹! 바뀌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스태프가 경쾌하고 몸놀림이 가볍다.
능청맞은 표정을 지으며 위아래로 감아 흔드는 팔이 빠르다.
어려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떨지도 않고 락킹을 꽤나 잘 소화하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나는 내심 놀랐다.
수준이 꽤 높네?
락킹이 끝날 때 쯤 이번엔 인상이 조금 세게 생긴 남자아이가 출격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릴라처럼 가슴을 치거나 포효하는 것이 느릿느릿 온몸에 힘이 가득 들어간 모습이다.
그러다가도 음악이 빨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동작이 빨라진다.
무엇보다도 표정이 압권이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난건지, 시종일관 콧김을 내뿜는 모양새다.
“저게 뭐야? 뭔지 몰라도 디게 멋있네?”
김남규 팀장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묻는다.
“크럼프요.”
크럼프를 선보이던 댄서가 앞서 춤을 추던 댄서들을 다 보내버리자 이번엔 딱 보기에도 팝핀을 추게 생긴 것 같은 남자 댄서가 나선다.
팔과 다리가 엄청 길었는데 절도 있게 관절을 꺾자 관중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온다.
“나 저거 알아. 각기 춤이지?”
“팝핀이요.”
“그거나, 그거나…….”
“아, 네.”
가운데를 비우고 동그랗게 원형으로 서있는 구경꾼들.
팝핀을 추던 남자 댄서는 관중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바퀴 돌았다.
그러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내게 나오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가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맨 앞줄에 서 있다 보니 댄서인 줄 알았나 보다.
뭐라고 하면서 거절해야 하지?
고민이 깊어지기도 전에 김남규 팀장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No! No! We are Korean. No battle! ok? I see dance. only see. ok? ok?"
김남규 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창피하다.
말은 김남규 팀장이 했는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뭐라는 거야?”
댄서의 중국어가 들려온다.
김남규 팀장의 말을 못 알아들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엔 내가 제대로 의사를 전달했다.
“우리는 댄서가 아니고 그저 구경 중이었어.”
“응. 알았으니까 너 나와. 한국인이라며? 세계 댄스 경연 대회에서도 한국인들이 항상 우승하잖아. 그 잘난 한국 춤 좀 보자. 뭐, 자신 없으면 그냥 찌그러져 있던가.”
TV에서 종종 본적이 있다.
댄서들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깔며 야유를 보낸다거나 욕을 한다거나 혹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뭉개가면서 도발하는 장면을.
아무리 댄스 배틀을 하는 자리이고 나를 도발하려는 말이었지만, 찌그러져 있으라니.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 세우고 국위 선양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나는 김남규 팀장의 만류에 그의 손을 살짝 밀쳐내고 중앙으로 나갔다.
“어떤 춤을 보여줄 건가? 한국 전통 춤도 괜찮아. 부채가 필요하면 말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한쪽으로 물어서는 저 팝핀 댄서 놈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면 어떤 춤이 좋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곧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점점 몰리는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는 순식간에 바닥에 등을 대고 굴렸다.
물구나무를 서서 일어나면서부터 나의 비보잉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가벼운 백핸드 텀블링이었다.
뒤로 유연하게 몸을 넘기며 한손으로 바닥을 짚고 땅에 발이 닿자, 토마스로 연결되었다.
나는 그것을 바로 윈드밀로 연결시켰고 그것은 헤일로우로 이어졌다.
관중석에서 우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이쯤이면 되었겠지?
손바닥을 털면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관중들이 휘파람을 불어대고 더 하라고 부추긴다.
댄서들도 꽤 놀란 눈치였는데, 아까 나를 도발하던 팝핀 댄서놈이 이번엔 정중하게 두 손으로 나를 모신다.
아씨. 아스팔트 바닥이라 손바닥이 너무 아픈데?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가운데로 나갔다.
곧이어 어깨로 바닥을 치며 숄더스핀을 시작했다.
‘괜히 흰 티셔츠를 입고 나왔나? 옷 더러워지겠네.’
이런 생각을 하며 에어트랙으로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이상 바닥에 굴렀다가는 옷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므로.
두 발이 공중에서 풍차처럼 돈다.
두 팔로 체중을 지탱해야 했으므로 예전의 내 근력으로는 절대 안 되는 기술이었다.
지금은 다르지만.
에어트랙 한국 최고 기록이 52회? 54회?
또, 세계 최고 기록이 72회였던가? 73회였던가?
얼마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지금의 나라면 100회는 충분히 넘기고 남을 것이지만 관중들이 휴대폰 동영상을 찍으며 생생한 현상을 분명 남길 것이므로 적당히 하기로 했다.
50바퀴만 돌자!
사실 에어트랙 스무 바퀴만 돌아도 비보잉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명색이 주시후인데, 50바퀴는 돌아야지?
아주 빠른 속도로 10바퀴, 20바퀴를 돌자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40바퀴를 넘을 때 쯤에는 통일성 없던 함성이 한목소리가 되어 공원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다.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50바퀴의 풍차를 돌리고 난 나는 두 발을 땅에 대고 자리에 섰다.
하늘이 조금 핑! 도는 것이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도 모두의 입에서 ‘코리아’가 외쳐지고 있었으므로.
중심을 잡고 버티고 서 있는데 스트릿댄스 배틀에 참가한 많은 댄서들이 내게 가까이 다가온다.
그들은 차례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이 파이브!
모두와 손길을 나누고 나자 뭔지 모를 뭉클함이 가슴 한쪽에 피어올랐다.
“너 이름이 뭐야? 한국에서 유명한 댄서인가?”
“나중에 우리가 유명해져서 한국에 가게 되면 다시 붙어 보자.”
“우리 사진 한 장 찍자! 얼굴 좀 보여줘.”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마스크를 벗었다.
“내 이름은 주시후야.”
* * *
“아이고. 언제 나가서 사고 쳤대?”
최재우 이사의 말이다.
오늘 아침부터 중국 웨이브에 사이트에 내 비보잉 동영상과 기사가 쫙 깔렸다며 최재우 이사가 혀를 찼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좋아 보였다.
“사고를 쳐도 이렇게만 치면 내가 아주 좋아서 죽지!”
흡족하게 웃음을 흘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이 한국에 보고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재킷을 집어 들었다.
“준비 다 됐어요, 팀장님. 혜경 누나! 가요!”
오늘 이른 새벽에 도착했다는 내 스타일리스트 김혜경.
소품 가방을 야무지게 챙겨들고 내 뒤를 따라 나선다.
오랜만에 다시 뭉쳐서 일하게 된 것이라 그녀의 표정은 조금 비장해 보였다.
오늘은 중국 동양 위성 방송에 예능 촬영이 있는 날.
준비된 차량을 타고 방송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곧바로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시후야, 오늘 네 의상이 블랙이거든? 그러니까 메이크업은 약간 시크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때?”
김혜경이 화장대 앞에 나를 앉혀놓고 묻는다.
“누나가 알아서 해주세요. 다 좋아요, 저는.”
“그래. 알겠어. 내가 오랜만에 솜씨를 좀…….”
신이 난 표정으로 가방을 쫙! 펼친 그녀는 이내 내 얼굴에 뭔가를 찍어 바르기 시작한다.
한참 걸릴 텐데…….
메이크업 시작부터 지루해진 나는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그때였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