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81화 초대 (1)
“쳇! 이게 뭐야. 드라마 첫 방 하는 날 촬영이라니. 회사에서도 다들 모여서 방송 본다고 신났다던데 우리만 이게 뭐냐고?”
김남규 팀장은 분장실에서 분장 중이던 내 뒤에서 서서 한참을 투덜거렸고.
“에이! 안 보면 어때요? 촬영장에서 그렇게 봐 놓고 뭘 또 봐요?”
나는 다독였다.
오늘은 드라마 <왕의 신하>가 첫 방송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래서 김남규 팀장의 입이 닷발 나왔다.
박은숙 작가는 워낙 대본을 빨리 쓰는 작가라 쪽대본이 거의 없다.
또한, 내가 엔지(NG)를 거의 내지 않고 촬영해 온 터라 드라마 촬영 일정에서 밀린 촬영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첫 방송이 전파를 탄다고 퇴근을 일찍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분량을 다 촬영해 놓았기 때문에 김남규 팀장과 나는 당연히 오늘 오전 촬영을 끝으로 퇴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저녁에 첫 방송을 자축하며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기로 약속했는데, 갑자기 촬영 스케줄이 잡혀 버린 것이다.
“생으로 찍는 거 보는 거랑 편집해 놓은 거랑 같냐? O.S.T만 깔려도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팀장님은 저 촬영하는 동안 휴대폰으로 보세요. 그리고 어차피 1, 2회에 저 안 나와요. 아! 2회 끝부분에 나오는구나. 아역이랑 바뀌는 장면! 내일 보시면 되겠네요.”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말자.”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김남규 팀장을 거울로 쳐다보는데 대뜸 분장실의 문이 열린다.
“형, 와 계셨네요? 오랜만.”
“어! 윤성이 왔구나!”
허인의 아역을 맡은 김윤성이다.
김윤성은 오늘도 거만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려 대강 인사하며 분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보다 연기 선배라 이거다!
“형, 몸은 괜찮고요?”
김윤성이 내 옆 의자에 털썩 앉더니 나를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다.
“갑자기 내 몸은 왜 챙겨?”
“기사 봤어요. 중국에서…… 아,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기억하기도 싫을 텐데.”
“오…… 철들었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고?”
나는 김윤성을 바라보았다.
남 배려할 줄도 알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번 만남만 같았어도 ‘만지지 말라’며 내 손을 치웠을 녀석이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었는데도 내 손길을 쳐내지 않는다.
조금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김윤성이 입을 열었다.
“형도 이제 좀 떴으니까 봐줄게요.”
“뭐?”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은 그때 김윤성이 말했다.
“형 덕분에 오늘 연장 촬영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오늘 첫 방 나가고 나면 주시후 아역 맡은 배우가 누구냐며 다들 검색하기에 바쁠걸요? 이게 다 형 인기 덕분이죠.”
그랬다.
박은숙 작가가 날 좋게 봐준 덕분인지 드라마 후반에 내 비중이 많이 늘어난 것 같긴 했다.
그 때문에 오늘도 갑작스레 추가 촬영분이 생겨난 것이었고.
배우가 된 이상 분량이 늘어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왜 하필 박은숙 작가는…….
‘채설아랑 한 신에 넣어 주냐?’
김윤성은 내 덕분에 한 번 더 TV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고 고마워했지만, 나는 오늘 촬영이 탐탁지 않다.
오늘의 촬영 내용은 나와 채설아가 궁궐 정원에서 마주치는 신이다.
박은숙 작가가 쪽대본 집필을 불사하면서까지 늘려 준 내 분량은 궁에서 둘이 만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이것으로 극의 흐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중전이랑 왕의 호위 무사랑 둘이 만날 일이 뭐가 있겠어?
아역들까지 동원된 것 보니 어렸을 적 인연. 뭐 그런 것 아니겠어?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자. 이미 나온 대본이 그런 걸 어쩌겠어?
자세한 설명은 촬영 전에 감독님이 해 주시겠지.
나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또 한 번 분장실의 문이 열렸다.
채설아와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 여자아이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내 인사에 채설아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분장사를 보고 물었다.
“기다려야 하나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을 본 분장사는 머뭇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뭔지 모르게 도와달라는 표정이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게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분장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촬영 준비를 마친 세트장.
카메라 앞에 서 있는 ABS 방송국의 김기만 PD는 팔짱을 끼고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는지 이리 오라며 손짓한다.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말하고 있던 김기만 PD 휘하의 조연출이 나를 힐끗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13% 정도만 나와 줘도 좋을 텐데요. 저번 분기에 OBC 방송국에서 했던 대하 사극 <바람이 부는 언덕>도 첫방 시청률이 13%였잖아요.”
“그게 26%로 끝났지, 아마?”
“그거야 중간에 남주였던 박훈이 스캔들 터져서 그랬죠.”
“시후 씨는 몇 % 예상해?”
김기만 PD가 내게 묻는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11% 정도요?”
“에이. 저번 주에 우리 배우들 나온 <달리는 사람들> 시청률이 12.3%였는데, 무슨 소리야?”
“아, 그랬나요? 그럼 20%로 바꾸겠습니다.”
“그건 또 너무 크게 잡은 것 같은데? 그래도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
김기만 PD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지 표정이 환해진다.
“그렇게 될 수도 있죠. 시후 씨 인기가 끝내주거든요. 감독님은 <달리는 사람들>에서 시후 씨가 하드캐리 하는 거 못 보셨나 보네요?”
“그래? 내가 예능 프로그램 볼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달리는 사람들>을 봤다는 스태프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내 무용담에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참지 못하고 살짝 뒷걸음질 쳐서는 그 무리에서 이탈하였다.
얼마 후 분장을 마친 채설아와 아역 배우들이 세트장으로 들어와 촬영을 시작했고 나는 분장을 마무리하러 분장실로 향했다.
* * *
허인의 집 뒷마당.
어린 허인이 달을 보며 마당을 거닐고 있다.
그때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 여자아이가 허인 앞에 나타났다.
“누군데 이곳에 함부로 드나드는 것이지? 여긴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허인의 물음에 여자아이가 답한다.
“나는 아무나가 아니라 김희서야. 내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한철 대감이시고. 어른들 얘기에 무료해서 집 구경을 하던 차에 이곳에 오게 된 거야.”
“오늘 집 안이 손님을 맞이할 거라며 분주하더니 대제학 대감께서 병판대감을 만나셨구나.”
“대제학 대감님의 집 가장 안쪽에 작은 아들이 기거하고 있다고 해서 구경 왔는데, 네가 이 집의 작은 아들이라면 어째서 아버지께 대감이라 부르는 거야?”
허인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그러더니 여자아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곳에서 나가라. 여긴 대제학 대감도 함부로 들어오시지 않는 곳이니.”
“거참! 자기 처소라고 되게 생색내네! 가면 될 것 아니야!”
여자아이가 홱 돌아섰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부르는 소리에 여자아이가 다시 뒤를 돌아본다.
허인이 땅에서 손수건을 집어 들어서 흙을 탁탁 털고 있다.
“이거……”
허인이 여자아이에게 건넨다.
“떨어뜨렸구나.”
손수건을 건네받던 여자아이는 허인과 손끝이 맞닿자 배시시 웃는다.
“오케이! 컷!”
김기만 PD의 ‘컷’ 소리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모니터 하던 김기만 PD는 필름을 다시 돌려서 촬영분을 확인하며 나와 채설아에게 말했다.
“갑자기 생겨난 이 장면 말야. 대강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방금 애들이 찍은 장면은 회상 씬 아닌가요? 저 장면 보니 대충 어떤 내용으로 흘러가는지 알겠네요.”
채설아의 말에 김기만 PD가 고개를 끄덕인다.
쪽대본이란 없었던 박은숙 작가가 이번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쪽대본과 함께 추가 촬영을 요구했다.
그런데 하필 또 감정 연기를 해야 하는 신이었다.
앞뒤 상황도 모르고 어떻게 감정을 잡아?
그 때문에 김기만 PD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어린 시절 저렇게 만난 두 아이들은 장차 자라서 중전이 되고 왕의 호위 무사가 된다.
어려서부터 김희서는 허인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병조판서인 아비가 서인에게 딸을 줄 리가 없었다.
중전이 되어서도 여전히 허인을 연모하는 김희서.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은 허인.
“김희서는 아직도 허인을 사모하는 거야.”
김기만 PD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역들로 회상 씬까지 찍으며 없던 장면을 만들었을 때는 어렸을 적부터 만났던 인연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쪽대본에는 중전이 떨어뜨린 손수건을 주워 준다는 지문과 대사 몇 마디가 다였기 때문에 드라마의 전개가 이리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왕의 여자가 호위무사를 사모한다니…….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숨과 함께 상념도 날려버렸다.
작가가 다 생각이 있겠지.
김기만 PD의 인도에 따라 나와 채설아도 궁궐 후원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성인 연기자들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나는 궁중 후원을 거닐고 있다.
방금 왕에게 밀명을 받고 조심스레 대전을 빠져나온 후였다.
궐을 빠져나가기 위해 후원을 가로질러가는데 후원 한쪽에 예쁘게 핀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녀석도…… 꽃을 좋아하려나?”
꽃에 가까이 다가선 그때 내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중전의 목소리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마마. 그리 부르시면 아니 되십니다.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중전은 상궁 나인을 멀리 물리고 나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이제 되었지? 꽃을 보고 있었던 거야? 참 예쁜 꽃이지? 너도 그것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다른 꽃은 몰라도 그 꽃은 우리가…….”
나는 말없이 뒤로 돌아 중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발걸음을 옮겼다.
“차갑구나. 너의 등에서…… 너의 눈빛에서 원망이 느껴지는구나. 내가 갈 테니 너는 애써 이 자리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내게서 돌아선 중전이 긴 옷자락을 끌며 걸음을 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이 툭 떨어졌다.
나는 땅에 떨어진 손수건을 주어 흙을 털고 나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마마.”
“응?”
홱 돌아보는 중전의 표정이 밝다.
그녀의 눈빛은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긴 눈썹 끝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 을…….”
손수건을 건네는 내 손과 건네받은 중전의 손끝이 살짝 맞닿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오케이! 컷!”
김기만 PD가 오케이를 외치자 나는 채설아와 맞닿은 손을 빠르게 회수했다.
그리고 감정을 지배하는 신 ‘에로스’의 능력을 거둬들였다.
나는 드라마 촬영할 때는 대부분 에로스의 능력을 발동했다.
극중 ‘허인’이라는 인물이 워낙 대사로 감정 표현하는 것에 인색한 터라 박은숙 작가가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려면 눈빛이나 얼굴근육으로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 사랑을 해 봤고, 내가 언제 사람을 죽여 봤겠는가?
내가 완벽한 허인이 되려면 에로스의 능력에 영향을 받아, 허인 캐릭터에 동화되어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반지의 능력을 거둬들인 나는 채설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감정이 아직 정리가 안 되는지 눈물을 몇 방울 뚝뚝 떨어뜨리며 나를 쳐다본다.
왠지 그 모습이 애잔해 보인다.
배우들은 감정 노동자라더니 채설아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새삼 이해가 된다.
나는 그녀와 촬영 도중 아주 냉정하고 차가운 기운을 쏘아 보냈다.
아마 그녀는 평생을 사랑한 정인에게 버림을 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가뜩이나 감정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채설아에게 에로스의 기운까지 흘려보냈으니, 지금쯤 저 여자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하겠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괜히 미안해진 나는 손에 든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손수건을 받아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이, 매정한 나쁜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