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반역의 수괴를 찾아라 (1)
“흐압!”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번쩍 떴다.
내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초점 없이 좌우를 살핀다.
한참을 그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사람 여러 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 시후야! 시후야!”
“깼어요. 시후가 눈 떴어요!”
“김 팀장. 의사 불러 와, 빨리!”
다급한 목소리들. 분주해 보이는 상황에 나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냐. 아냐! 누워! 그냥 누워 있어.”
엄마가 일어나는 내 몸을 눌렀다.
“엄마?”
나는 눈앞의 사람들을 보며 의아함을 품었다.
분명 중국이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기에 엄마가 여기 서 있단 말인가?
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엄마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엄마야.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조금 더 쉬어.”
뭔지 모를 편안함과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르륵 눈을 감은 나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에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샤오비는? 샤오비는 어떻게 됐어요? 여긴 중국이에요? 다른 사람들은요?”
“그 아이는 멀쩡해. 발과 손목에 깁스를 한 정도야. 여긴…… 한국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돌아왔어.”
침대 옆에 서 있던 임준석 실장이 대신 대답한다.
“다행이네요.”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크게 다친 곳이 있는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살펴보았지만, 딱히 불편한 곳은 느껴지지 않는다.
“환자 분. 깨어나셨네요. 제가 좀 보겠습니다.”
김남규 팀장이 데리고 온 건지 의사 뒤로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그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그저 입을 앙다물고 활짝 웃어주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으니 앞으로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겠지만 절대적인 안정은 필요합니다.”
중국 인촨에서 폭탄 테러가 있던 날로부터 나는 5일 만에 깨어났다.
내가 구한 소녀는 내가 끌어안고 있었는데도 팔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은 것에 반해 나는 찰과상과 경미한 타박상만 입었다.
그런데도 깨어나질 않아 온갖 검사를 다 해 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에오스를 만난 것이 꿈속이었는지 지하 세계로 통하는 입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새벽의 여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간만큼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겠지.
짧다고 느꼈던 그 시간이 현실에서는 꽤 길었던 모양이다.
폭탄 테러범은 곧 잡혔다고 한다.
중국 인촨 지역은 ‘닝샤후이족 자치구’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는 지원은 하지만 정치적 개입은 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중국 정부에서는 인촨의 세계 문화 교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간섭받기를 원하지 않는 세력이 본보기로 문화여유부 부장에게 해코지를 결심하였으나 결국 폭탄 테러를 당한 것은 나와 그의 딸이었다.
아직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팽배한 곳이라는 설명에 금세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내 옆을 지켰던 사람들은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김남규 팀장만 남기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안정이 필요하다며 의사가 돌려보낸 까닭에서였다.
“병실이 아주 좋네요. 내 방보다 좋아 보여요. 그래도 집에 가고 싶은데…….”
“의사가 아직 안 된다잖아. 이 참에 푹 쉰다고 생각해. 대표님이 병실에 특별히 신경도 써 주셨으니. 그거 알아? 너 데리러 중국에 대표님까지 함께 갔었는데.”
“그래요?”
“청룡 스튜디오 대표님도 함께 오셨고, 임 실장님도 같이 오셨지. 어찌나 눈물이 많으시던지, 누가 보면 친아들인 줄 알았을 거야.”
김남규 팀장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서 그간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알려주었다.
병실은 VIP 룸으로 보였는데 깨어나고 나서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다.
의사가 안정을 요구하기도 했고, 밖엔 기자들이 쫙 깔려있다며 김남규 팀장이 막았기 때문이다.
“팀장님. 둘이 있는데 뭐 그렇게 조용히 말해요? 안 어울리게?”
“아! 그랬나? 네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조용히 말하게 되네?”
“안정은 무슨…… 이제 다 나았다니까요. 저 때문에 드라마 촬영에 지장 있는 거 아니에요?”
“야! 너는 지금 이 상황에 촬영하고 싶은 생각이 드니? 드라마고 뭐고 간에 빨리 낫기나 해.”
“아, 글쎄 다 나았다니까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못 박는 김남규 팀장 때문에 나는 정신이 들고 나서도 4일이나 병원에 누워 있고 나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 * *
약 열흘 간 병원에 누워 있던 터라 퇴원하고 나서 할 일이 산더미였다.
모든 사람이 무리하지 말라며 말렸지만 나는 기어코 밀린 촬영 스케줄을 소화해 냈다.
그리고 한 달 후.
“예능이요? 갑자기요?”
드라마 첫 방송을 며칠 앞두고 김남규 팀장의 갑작스런 스케줄 발표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드라마 첫 방이나 영화 개봉 전에 배우들이 홍보 차원에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건 흔한 일이야.”
“아…….”
드라마나 교양 프로에서도 흔히 보기 힘든 배우들이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봐 온터라 금세 이해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내가 스케줄에 관심을 보이자 김남규 팀장이 신난 목소리로 대답한다.
“<달리는 사람들>!”
이라면…… 국민MC 유재승이 언제 시간되면 한번 나오라고 했던 프로그램이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주겠다고 했었던가?
그래. 털거면 털어 봐라.
나는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김남규 팀장에게 물었다.
“누구 누구 나가요? 주연들도 다 나가는 거예요?”
“남자 배우는 조연석이랑 한동하 그리고 정해수.”
“여자는요?”
“당연히 강화영이 나가지.”
“아…….”
문영호가 리스트에서 빠졌지만 그를 제외하더라도 모두 중국에 해외 로케 갔었던 멤버들이다.
그나저나 문영호가 알면 서운하겠는데?
“그리고, 채설아도.”
“네?”
“채설아도 출연한다고. <달리는 사람들>에.”
“왜요?”
“왜라니? 주연배우잖아. 사실은 나도 채설아가 예능 프로에 나가는 걸 그렇게 싫어한다고 하길래 안 나간다고 버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단번에 오케이를 했대. 나간다고.”
김남규 팀장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냥 나오지 말지. 안 나간다고 버틸 것이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능에 출연한다고.
“촬영이 언제라고요?”
“내일.”
“참내. 내일 촬영인데 왜 오늘 얘기해 주시는 거예요?”
나는 김남규 팀장을 째려보았다.
그는 그저 웃었다.
* * *
양평에 있는 <왕의 신하> 드라마 촬영장.
오늘만큼은 예능 프로그램 <달리는 사람들>의 녹화 장소였다.
육십여 명의 제작진, 스태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촬영이 시작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베테랑인 고정 출연자들이 <왕의 신하> 배우들이 편안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도록 긴장을 풀어주어 오프닝 촬영이 순조롭게 끝났다.
“그럼 우리는 이제부터 뭘 해야 되는 거야?”
PD의 설명을 못 들은 건지 이해를 못 한 건지 강화영이 백치미를 뿜어내며 내게 묻는다.
“하아…… 설명 안 들었냐?”
“들었지! 저쪽 팀이랑 우리 팀이랑 레이스 한다며?”
“그래. 제대로 들었네. 이제 레이스 하면 되는 거야.”
내 말에 강화영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이에 채설아가 환하게 웃으며 자세한 설명에 들어갔다.
“우리 배우들은 한 팀이고. 저쪽 고정출연자 팀이 모반을 꾀한 거야. 우리는 저쪽 팀원 중 반역의 우두머리를 찾아야 하고. 그리고 대전에 도착해서 우두머리의 이름을 적은 후에 옥새를 찍어야 해.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거야. 우두머리에 대한 단서는 레이스를 하면서 이길 때마다 획득할 수 있는 거고.”
“아…… 알겠어요, 언니. 그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져요?”
강화영은 분명 PD가 설명할 때 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학창 시절 반에서 늘 1등을 했던 게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면 게임 머리가 없는 건가?
답답한 내가 한숨을 내쉬는 것과는 다르게 채설아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저쪽 팀이 레이스에서 이기면 옥새가 있는 장소를 알게 돼. 만일 옥새를 뺏겨서 저쪽 팀이 양위교지에 인장을 찍고 공표하게 되면 우리가 지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레이스에서 이기는 거요!”
강화영과 채설아가 마주보고 웃는다.
마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둘이 부쩍 친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채설아가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카메라가 있어서 그런가?
“그럼 가시죠. 우리가 먼저 단서 획득해 야죠.”
걸음을 재촉해서 도착한 첫 번째 장소.
낯익은 익위사의 연무장이다.
수많은 카메라가 세팅된 이곳에 도착하자 고정 출연자들은 이미 도착해서 미션을 수행 중이다.
“첫 번째 단서는 활쏘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저 앞 과녁 중앙에 빨간 점이 찍혀 있는 것이 보이시죠? 한 팀에 두 발의 화살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중앙을 맞히지 못할 경우엔 전원이 5분 동안 옥사에 갇히게 됩니다.”
PD의 설명이 끝나고 조연석의 손에 두 발의 화살이 들렸다.
그는 손에 든 화살을 내려다보고 물었다.
“우리 중에 혹시 활 쏴 본 사람 있어?”
“저는 다트는 잘하는데 활은 안 쏴 봤어요.”
정해수가 고개를 가로젓자 조연석의 시선이 한동하에게 향한다.
“내가 활 쏠 일이 뭐 있다고. 나도 안 해 봤어요.”
“그럼 시후는?”
“저는…….”
조연석의 물음에 나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쏜다면야, 잘 쏘겠지.
아마 두 발 모두 정 중앙에 꽂힐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녹화 중인 것은 예능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나 체육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말이다.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시켜 분량을 뽑고 뽑아도 모자란 판국에 한 방에 미션을 해결해 버린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예능에 출연하면서 배운 예능 정신에 반하는 것이었다.
“저는 제일 나중에 해 볼게요. 레이디 퍼스트니까 여배우들이 먼저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여자라고 활 못 쏘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러네. 내가 쓸데없는데서 남녀 차별했네. 그럼 설아랑 화영이랑 한 번씩 쏴 봐.”
내가 말을 돌리자 조연석이 활과 화살을 채설아에게 내민다.
그녀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쏘는지도 몰라요.”
채설아의 말마따나 그녀는 활시위도 제대로 당기지 못했다.
화살 한 발을 그렇게 땅에 내다버리고.
강화영은 그동안 액션 스쿨에서 운동한 덕분인지 활시위는 쉽게 당길 수 있었지만 손을 놓자 화살이 바로 앞에 톡 떨어졌다.
그렇게 또 한 발의 화살을 땅에 버렸다.
“저쪽 팀은 곧 성공할 것 같은데?”
간이로 설치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상대 팀을 지켜보며 정해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상대편 과녁으로 쏠렸다.
확실히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 그런지 김국종의 활쏘기는 달랐다.
이번엔 아쉽게 과녁 중앙을 맞히지 못해서 옥사에 5분 동안 갇히겠지만, 상대 팀의 성공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촬영 분량이고 나발이고 승리욕이 발동한 나는.
“제가 한번 쏴 볼게요.” 하고, 옥에서 풀려난 뒤 바로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역시 활쏘기는…….
나는 5품 신장인 동명성왕의 능력을 발동했다.
소환까지는 할 필요도 없었다. 가까운 거리였으니.
나는 오른손으로 활시위를 강하게 뒤로 당기고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멈추었던 손을 그대로 놓자 화살이 날아간다.
“명중이요!”
과녁 중앙에 꽂힌 화살을 보고 제작진이 깃발을 흔든다.
“오예!”
“됐다. 됐어.”
“역시!”
이게 뭐라고 배우들은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시후 너는 못하는 게 대체 뭐야?”
조연석이 입을 귓가에 걸고서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마구 흔들며 물었다.
아, 어지러워.
“형, 단서 받아야죠.”
내 말에 우르르 제작진에게 몰려가는 배우들 틈으로 정해수가 한마디 툭 던졌다.
“너는…… 이제는 뭐 놀랍지도 않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