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또 한 번의 위험 (2)
[CNS뉴스 ; 중국 인촨시 S호텔 테러 사건, 사상자는 없다.]
[투데이 차이나 ; 인촨시 호텔 테러 사건 용의자 긴급체포.]
[월드통신 ; 인촨 폭탄 테러 사건 현장에 한국 드라마 촬영 팀이 있었다!]
[국민의일보 ; 중국 인촨지역으로 해외 로케 떠난 <왕의 신하> 촬영 팀! 중국에 발이 묶였다.]
중국에서 테러가 있었던 다음 날.
아침부터 인터넷이 중국 인촨시 진펑구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 뉴스로 시끌벅적하다.
IS 무장 단체가 테러를 일으켜서 사상자가 수북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관심은 아닐진대,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현장에 있었던 한국 촬영 팀 때문이었다.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중국 언론 때문에 ‘과연 다친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다쳤을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지대했다.
당연히 TV 뉴스도 이 사건을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이곳은 중국 인촨시 진펑구 소재의 한 호텔입니다. 폭탄이 터졌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벽이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호텔 뒤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 위로 보이는 저곳에서 참혹한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폭탄 테러가 있었던 호텔 2층 여자 화장실인데요. 호텔 관계자는 현재 객실 전체를 리뉴얼 중이라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다고 했지만 부상자를 발견함에 따라…….”
인천 공항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는 전화가 들어오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그래. 지금 탑승 게이트 앞이야. 시후 씨는 어때? 아직도? 하아……. 알았어. 도착해서 연락하도록 하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은 청룡 스튜디오의 한만기 대표는 의자에 앉아 있는 B&M 엔터테인먼트의 김경민 대표에게 다가갔다.
“지금 탑승하셔야 합니다.”
“시후는요?”
김경민 대표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아직 혼수상태라고 합니다. 문여부 부장 딸은 팔과 다리가 부러졌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고 깨어났다고 하고요.”
초조해 땀이 나는지 손바닥을 연신 바지에 닦아 내고 있던 김경민 대표는 한만기 대표의 말을 듣고는 옆에 주저앉아 있는 임준석 실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임 실장. 늦기 전에 가자고.”
임준석 실장은 마음이 답답한지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치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대표님.”
* * *
B&M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방 안은 한 여성이 흐느끼는 소리와 TV에서 보도하는 뉴스 소리로 가득하다.
“검은 옷에 복면을 쓴 괴한들이 어디선가 한 소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납니다. 바로 중국 문화여유부 부장의 딸인데요. 괴한들은 2층에 있는 이곳 여자 화장실에 소녀를 들쳐 메고 들어간 후, 4분 만에 다시 밖으로 나옵니다. 괴한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한 남성이 이곳 화장실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약 1분 후 굉음과 함께 화장실 벽이 붕괴되고 문짝이 날아갑니다. 이것은 이틀 전 이곳에서 있었던 폭발 현장 주변의 CCTV 영상입니다. 화질이 좋지 않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만 관계자에 따르면 이곳에 들어간 남성은…….”
“흑흑…… 여보, 우리 시후…… 어떡해요? 사건 현장 보니까 너무 무서워…… 흑흑.”
“후우. 별일 없을 거야. 아직 살아 있다잖아! 당신도 울지만 말고 마음 바짝 먹어. 시후는 아직입니까?”
아내를 품에 안은 사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앞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사내에게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B&M 엔터테인먼트의 최재우 이사.
그는 휴대폰을 손에 붙들고 주시후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후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범인들은 잡은 상태고요. 현장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것을 검거했는데 폭탄을 설치했다고 자백을 받아낸 모양입니다.”
“벌써 3일째인데…… 대체! 시후는 거길 왜 들어갔답니까? 그냥 1층에 있을 것이지! 왜 굳이 저곳에 제 발로 들어갔답니까?!”
소리치는 주시후의 아버지.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옆에 있던 통역사의 말에 의하면 중국 문여부 부장의 딸이 화장실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갔답니다. 저런 일이 생길 줄 어찌 알고 갔겠습니까? 시후도 모르고 간 것이죠.”
“내가 따라갔었어야 했는데, 내가 갔어야 했는데…….”
최재우 이사도 덩달아 마음이 저려 왔다.
자신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저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가슴에 전해져 왔다.
그의 한숨은 끊이질 않았다.
아들이 얼마만큼 다쳤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부모가 병원에 가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주시후의 부모는 비자 문제도 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한국에 남겨두는 것이 낫겠다는 모두의 판단이었다.
어떻게든 무리해서라도 보냈어야 했었나?
주시후는 아직 혼수상태.
얼마나 옆에 있어 주고 싶을까?
의사의 말로는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던데, 깨어나질 않는 걸까?
조금 전 김남규 팀장과의 통화에 따르면 주시후는 지금 중국의 한 대형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최재우 이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부부를 쳐다보다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살아 돌아오기만 하라고.
중국에서 테러가 발생한 지, 4일째 되는 날.
인터넷 신문사 몇 곳에서는 벌써부터 주시후를 테러 사건의 희생자, 사망자로 운운하며 전 국민들에게 지탄을 받았으나 주시후의 팬 카페에는 누군가 지펴 놓은 희망의 불씨가 순식간에 퍼지며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고 응원하는 게시글로 가득 찼다.
B&M 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는 수많은 팬클럽 회원들이 매일 진을 치고 있었고, 주시후의 가족들은 매 순간을 눈물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던 중 B&M 엔터테인먼트 최재우 이사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그래? 알겠어. 준비해 놓지.”
“중국에서 온 전화예요?
최재우 이사가 통화를 끊자마자 연기자 매니지먼트 총괄실장인 배우성이 다급하게 묻는다.
최재우 이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선발대 몇 명과 시후만 전용기로 지금 출발할 거라고 하네.”
“전용기요? 중국에서 허락했답니까?”
“아, 허락했으니까 타고 온다고 했겠지! 우리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시후가 도착하면 바로 병원으로 이송 할 수 있게 바로 준비해 두지. 구급차와 의료진을 준비해야 할거야. 아직 혼수상태니까 말이야.”
* * *
나는 조카들과 함께 방송국 주차장 앞에 서 있다.
저 꼬맹이들은 집에 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짜증이 솟구친 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니 눈이 마주친 조카들이 터벅터벅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런데.
조카들이 내게 걸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어떻게 된 거야?
내 눈이 점점 커지며 입이 딱 벌어진다.
그때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반짝 빛나는 사물이 포착되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데자뷰인가? 어째 이런 상황이 낯설지가 않네.
나는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져 있는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뭐지? 지진이라도 난거야?
놀란 내가 숨을 헉 들이쉬자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춘다.
도로에 쌩쌩 달리던 차들도. 거리에 지나다니던 행인들도. 내게 걸어오던 조카들까지.
모든 게 멈추었다.
뭐, 뭐야? 꿈인가? 꿈꾸고 있는 거야? 나 지금?
괴상한 상황이지만 꿈이라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밀려온다.
들이쉰 숨을 내쉬자 멈춰선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흡사 거울이 깨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어! 어? 으악!!
날카롭게 깨진 조각들이 삽시간에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금세 떠오른 기억들.
깨진 조각들은 반지를 줍고 나서 내가 겪었던 9개월 간의 행보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연회장에서 폭탄이 터졌었지.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날아오는 조각에 놀라 두 눈을 꼭 감은 채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몸에 아무런 통증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조심스레 한쪽 눈을 떴다.
세상은 온통 고요했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 누구세요?”
눈앞에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에 어울릴 만한 검정색 옷을 입은 소년.
옷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이다.
소년은 오른손에 든 검정색의 부채를 왼 손바닥에 탁탁 내려치며 내게 터벅터벅 걸어왔다.
소년은 내 앞에 멈춰 서서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지하 세계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 ‘하데스(Hades)’ 님의 전언을 가지고 온 사자입니다.”
“죽음이요? 그럼 저는 지금 죽은 것입니까?”
“아직은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만, 선인의 대답에 따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있겠지요.”
전신이 새까만 소년은 말을 마치고 나서 오른손의 부채를 쫙 펴서는 허공에 휘둘렀다.
회색 구체가 어둠 속에서 두둥실 떠오른다.
뭉글뭉글한 회색 구름을 쳐다보다 내 몸이 빨려들어 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이내 눈앞에 펼쳐지는 내 모습들.
나는 땅에 엎드려 있기도 했고, 땅을 구르기도 했으며 어떤 모습은 참혹하게 피투성이였다.
“이게, 이게 뭐예요?”
내 질문에 소년은 싱긋 웃으며 대답하였다.
“선인의 미래입니다. 자꾸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시면 저렇게 되실 겁니다. 하데스 님께서 분명 저리 만드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고 죽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나는 발끈해 소년을 쳐다보며 외쳤다.
그러자 소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작은 악마 같아서 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신은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끼어들면 귀찮아지거든요. 자! 선인께서는 이제 선택하시면 됩니다. 계속 인간계에 남아 몸이 찢겨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감당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같이 하데스 님께 가 안식에 드시겠습니까?”
“하데스 님은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분 아니에요? 저는 죽으면 신계로 간다고 하던데요?”
“선인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셨으니 하데스 님의 곁에서 수십 년을 머무르다가 때가 되면 신계로 올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선인이니까 당연히 인간계에서…….
“제 눈을 한번 쳐다보시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나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 까만 눈동자 안에서 내 미래가 시작되었다.
하데스가 관장하는 지하 세계는 생각했던 것처럼 어두컴컴하거나 음침하지 않다.
평온하고 풍요롭고 웃음이 가득한 곳.
“인간은 짧은 생을 사는데 비해 고통과 괴로움을 너무 많이 감당해야 하지요. 이제 그만두고 저와 함께 지하 세계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는.”
“하데스 님은 선인께서 인간 생사에 관여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다치는 육신. 그것을 가지고 싶으신 건 아니겠지요?”
소년의 눈동자가 나를 홀린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내 마음먹은 것이 저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까?
이 순간 떠오르는 선인의 덕목들.
모든 것들이 다 귀찮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교만함을 누르는 겸손.
단죄보다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잘 알고 있구나. 선인이여! 더 읊어 보아라!”
갑자기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소년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인간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 해 보거라.”
“인간들과 소통하고…… 포용해야 하며 어여삐…… 여겨야 한다!”
말을 끝낸 나는 소년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흑안을 깰 수가……”
소년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나는 소년의 뒤에 선 눈부시게 빛나는 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리여리한 긴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신.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추켜올리고 거만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놈이 한낱 인간인줄 아느냐? 저래 보여도 신계에서 정한 선인이다!”
가시 돋친 듯한 여인의 목소리.
“에오스 님!”
내 부름에 에오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 님을 뵙습니다.”
검은 소년이 에오스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하자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매서운 눈으로 소년을 쏘아보았다.
“그래. 다 봤으면 꺼져라! 하데스의 사자!”
“네? 저는 하데스님의 전갈을 가지고…….”
“감히 사자 따위가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네놈이 흑안으로 선인의 마음을 조종하려 한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선인에게 농간을 부리려 했으니 네놈이 한 짓을 아폴론에게 알릴 것이다. 당장 꺼지라고 했다!”
에오스가 소년을 향해 팔을 휘젓자 소년은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온통 칠흑이었던 세상이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
에오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내 앞에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입꼬리가 알 듯 모를 듯 조금 올라갔다.
“선인! 그래도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었나 보구나.”
“네?”
“흑안에 당해 지하 세계로 끌려갈 줄 알고 온 것인데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았느냐?”
“그거야 에오스 님께서 옆에서 도와주신 덕분이고. 고되다는 생각이 들어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사실인 걸요.”
“그래도 네놈이 선인의 덕목을 잊지는 않고 있었잖느냐. 그거면 되었다. 아직 새파란 놈이니 선인의 마음은 차근차근 가져도 된다.”
그리고 새벽의 여신은 나를 바라보며 한쪽 손을 공중으로 휘저었다.
나는 눈앞이 희미해지며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 본 에오스는 활짝 웃고 있었고, 그 여신은 짤막하게 말했다.
“가거라. 있던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