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화 대륙으로 해외 출장 (6)
문화여유부 부장의 뒤를 따르는 여자아이가 꽤나 인상적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중학생. 열다섯 살쯤 되었을까?
단발머리의 소녀는 연회장에 들어서더니 아버지의 뒤에 바짝 붙어 옷깃을 붙잡는다.
거기에 수줍은 미소까지.
K팝에 홀딱 빠진 가수 지망생이라고 했던가?
노래 실력은 모르겠지만 일단 외모만 놓고 봤을 때는 영 연예인에 적합하지 않다.
까만 얼굴에 깨알처럼 박힌 주근깨와 씨름 선수가 연상되는 비대한 체구.
가수 트레이닝보다는 피부 관리와 다이어트가 더 시급해 보인다.
덩치가 큰 이 소녀는 문화여유부 부장 ‘공치오쭝’과 함께 내가 앉은 테이블에 착석하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헤벌쭉해져서는 몸을 비비 꼬는 모습이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던가?
한국이나 중국이나 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소녀들의 행동은 국적 불문 똑같구나.
소녀를 바라보다가 ‘PS China’의 장샤오위가 한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결국 저 소녀에게 잘 보여야 이 자리가 무사히 끝날 것이며 앞으로의 드라마 촬영에 ‘PS China’의 투자금을 받는데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소녀를 보고 환하게 한 번 웃어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부끄러운 듯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헤헤 웃는다.
아니! 얼굴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애초에 저 큰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가리기에는 모자람이 있어 보였다.
인촨 시장 ‘여비웅’까지 의자에 앉자 통역사가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한다.
“이쪽은 한국에서 온 배우들입니다. 이쪽은 중국 인촨을 관광지로 한국에 홍보할 수 있도록 초청에 응해주신 한국 청룡 스튜디오의 전승원 감독님이시고.”
“이쪽은 중국 문화여유부의 ‘공치오쭝’ 부장님이십니다. 이쪽은 ‘여비웅’ 인촨 시장님이십니다.”
통역사의 말이 끝나자 공치오쭝 부장이 전승원 PD에게 악수를 건넨다.
그리고 그다음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연회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시후 씨와 꼭 악수를 나누고 싶군요. 이쪽은 저의 딸 ‘샤오비’인데 이 녀석이 너무 좋아하는 터라 명성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샤오비? 만나서 반가워.”
공치오쭝의 손을 놓은 나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배시시 웃으며 내 손을 맞잡은 소녀는 금세 손을 놓더니 또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인사가 끝난 다음 의식은 식사였다.
‘PS China’에서 준비한 석찬을 마치 자신이 준비한 것처럼, 공치오쭝 부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권한다.
“많이 드십시오. 차린 것은 변변찮으나 이렇게 모인 자리가 의미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차린 것이 변변찮다는 공치우쭝의 겸손과는 다르게 테이블에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다행인 것은 중국 향신료로 범벅이 된 요리가 아닌 한식 위주의 요리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중국 음식이나 이탈리안 푸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갈비찜이나 잡채와 같은 음식만으로도 향수를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타지에서 오랜만에 만난 한식은 그야말로 고향의 맛이었다.
물론 인촨 쪽에서는 나름 귀빈을 모시는 자리라 한식 또한 최고의 요리사가 준비한 것이겠지만.
테이블을 꽉 채운 음식에 모두들 들떠있을 때 나는 내 앞에 놓인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분 중에는 중국 향신료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동안 음식 때문에 힘드셨을 것 같아 한국식으로 준비했습니다. 어떠십니까?”
모두 “하오츠!”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보였다.
* * *
이어지는 석찬 중에 문여부 부장 ‘공치오쭝’은 딸을 살뜰히 보살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했던가?
‘샤오비’라는 소녀도 공치오쭝에게 그저 예쁘기만 한 딸인가 보다.
하긴 그러니 굳이 안 와도 되는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닌가?
나는 샤오비를 보던 시선을 문여부 부장에게 돌렸다.
그러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제 딸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샤오비가 참, 예쁘게 생겼네요. 건강미도 넘치고요.”
“사실 걱정이기는 합니다. 제 딸이 숫기가 없어서 남 앞에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인데, 자꾸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제 눈에야 둘도 없이 예쁜 딸이지만 어디 남들 눈에도 그렇겠습니까?”
다행히 문여부 장관은 딸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 외모까지도.
“샤오비! 네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분이 옆에 앉아 있는데 왜 입을 그렇게 딱 붙이고 있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렴.”
“저는…….”
문여부 부장 옆에 앉아 식사 중이던 샤오비는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자 다시 수줍은 표정으로 젓가락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한국 TV 프로그램을 좋아해요. 중국에서도 <슈퍼 K-POP 스타 챌린지>가 워낙 인기라 빼놓지 않고 다 봤는데 거기서 오빠가 노래하는 걸 듣게 되었어요. 학교 친구들도 오빠를 좋아하는 애들이 많아서 어쩌다가 한 번씩 아이들과 오빠 얘기를 한 적도 있었고요.”
“그랬구나. 다행이네.”
“그리고 오빠가 「I want you」 음반 발매 하셨을 때 저도 팬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친구들이 더 많이 생겼어요. 이제는 매일 오빠 얘기를 하며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요. 오빠 노래를 들으면 왠지 자심감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들어서 저도 가수가 하고 싶어요. 듣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오빠 덕분에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고 꼭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인기를 끌고 싶어서 가수가 되려는 지망생들이 태반인데, 꿈이 대견하다 싶었다.
“이 자리에서 노래를 청하면 실례가 되겠지요?”
문여부 부장이 딸이 좋아하는 것을 보더니 내게 묻는다.
“제가 돋보여야 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조금 곤란할 것 같아요. 혹시 나중에 콘서트라도 하게 되면 꼭 샤오비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으로 하죠. 내가 초대하면 올 거지, 샤오비?”
소녀는 힘이 바짝 들어가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콘서트를 하게 될지 안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노래는 면하게 된 것 같다.
분위기는 촬영 종방연 같았지만, 아무래도 인촨시의 홍보를 위해 모인 자리이다 보니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공치오쭝의 고개도 함께 끄덕여졌다.
딸 샤오비가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우자 문여부 부장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놓았다.
“제 딸에게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가수가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시후 씨 노래를 듣고 희망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사실 샤오비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더라고요. 누굴 닮은 성격인지 원…… 그래도 시후 씨의 노래를 듣고 나서 학교에서 친구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가수가 하고 싶다고 저를 볶아 대니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한국 가수들은 모두 예쁘고 잘생겼던데 샤오비가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문여부 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실이 그랬다.
한국에서 가수가 되기는 정말 어려웠다.
그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공치오쭝에게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괜히 어려서부터 헛물 마시다가 재능도 없는 아이의 청춘을 낭비하게 될까 봐 그랬다.
그런데 가수가 되기를 원하는 딸.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의 아버지.
‘이 부녀의 희망을 굳이 내가 꺾어버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아버지라는 사람은 딸에 관해 잘하는 것 같으니 잘 만류하겠지.
“노래는 잘하는 편인가요?”
노래라도 잘하면 외모야, 뭐. 아버지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내게 가수의 길을 터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조언이나 조금 해 주면 도움이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내가 물었다.
“노래는 꽤 잘합니다. 그런데 노래만 잘한다고 가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샤오비가 그래도 얼굴은 예쁜 편에 속하니, 다이어트를 조금 시키시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요.”
다이어트라는 말에 문여부 부장의 얼굴이 환해진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소녀의 경우엔 마음을 아주 크게 먹어야겠지만.
“정말입니까? 가수인 시후 씨가 그렇게 말해 준다면 샤오비가 다이어트를 할지도 모르겠군요.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운동은 안하는지라…… 그런데 얘가 왜 이렇게 안 오지?”
“화장실에 간다고 했으니 금방 오겠죠.”
“네. 알고 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오질 않으니.”
“딸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제가 데려오도록 할게요.”
나는 문여부 부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는 대체 어딜 갔기에 여태 안 오는 거지?
7품 신수 카이엘의 능력을 발동한 나는 청력을 돋웠다.
사발팔방에서 온갖 잡소리가 들려온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 그릇 닦는 소리, 요리사들의 칼질 소리와 웍질 하는 소리까지.
여긴 주방인가 보구나.
“끙.”
어디서 앓는 소리도 들려온다.
호텔은 전 객실이 리뉴얼 중이라 손님을 받고 있지 않다고 했다.
뭐지? 누가 아픈가?
“음음. 읍웁으!”
응?
여자 목소리?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청력을 집중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앓는 소리가 아니라 입이 틀어 막힌 상태에서 내는 비명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사내들의 대화.
중국어였다.
“이 애가 공치오쭝의 딸인 건 틀림없겠지?”
“확실해. 같이 들어오는 걸 확인했어.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딸도 아닌데 자리에 합석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
“공치오쭝은 조심성이 많은 자라 분명 화장실에 오더라도 혼자오지는 않을 거야. 틀린 것 같으니 딸이라도 처리하지.”
“죽여야 하는 거야?”
‘뭐? 죽여? 문여부 부장 딸을? 왜?’
심박수가 빨라지며 동시에 발걸음도 빨라졌다.
“아니! 우리는 경고만 하면 돼. 몇 번이나 경고를 해도 들어 쳐 먹지를 않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줘야지.”
“그럼 ‘여비웅’을 처리하는 건 어때? 얘는 너무 애잖아. 찝찝하다고.”
“공치오쭝이 옆에 앉아 있는데 그 시장 놈이 곁을 떠날 것 같아? 자본주의에 찌든 새끼들! 호텔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지만, 그럼 우리 쪽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이곳만 날아가겠지. 터지면…… 죽지는 않을 거야. 대신 어디 하나 병신은 될 거야.”
“준비 끝났어. 나가자. 1분 남았어.”
‘1분? 터져? 이곳에 무슨 폭탄이라도 심어 놨다는 말인가?’
나는 발걸음을 뒤로 돌려 문여부 부장과 인촨 시장 아니 그 누구에게라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호텔에 객은 없다. 직원들은 모두 연회장으로 몰려갔겠지.
그들이 있는 연회장은 1층.
지금 내가 있는 곳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달려가서 알리자니 조금 전 사내들이 말한 그 1분이 귓가에 맴돈다.
‘내가 구한다.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라도.’
2층 여자 화장실 쪽에 도착하자 반대쪽 복도 끝으로 사내 두 명이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지금은 저들을 따라가 잡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정말 폭탄이라도 설치되어 있다면 소녀를 구하는 것이 더 시급한 상황이다.
“샤오비!”
나는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5성급 호텔 화장실이라 그런지 칸막이가 많아도 너무 많다.
“샤오비! 있으면 대답해 봐!”
그때 화장실 안 제일 끝 쪽에서 ‘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발로, 여의치 않으면 머리를 벽에 박아서라도 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던지 애절한 쿵쿵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소리가 들리는 칸 앞에서 발로 문을 차자 문짝이 떨어져나가며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손과 발은 뒤로 결박되어 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다.
그리고 몸은 테이프에 칭칭 감겨있었는데, 조잡하게 결합된 시한폭탄으로 보였다.
6.
5.
4.
4초 남은 건가? 정말 폭탄이란 말이야?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소녀의 웃옷을 찢어서 화장실 앞 칸으로 던져버렸다.
2.
1.
그리고 소녀를 품에 안고 뛰듯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