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화 대륙으로 해외 출장 (1)
드라마 첫 대본 리딩 이후, 인터넷에는 수많은 드라마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신문화뉴스 ; 시청률 제조기 박은숙 작가. 이번엔 사극이다.]
[국민의일보 ; 박은숙의 첫 사극 <왕의 신하> 어떤 작품?]
[셀럽뉴스 ; <왕의 신하> 제작진. 대본 리딩 분위기 좋아…….]
[스포츠데일리 ; 조연석X채설아X한동하X강화영 <왕의 신하> 첫 대본 리딩.]
[<왕의 신하> 제작진 측은 스타작가 박은숙의 드라마 <왕의 신하>의 첫 대본 리딩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전했다.
총 20부작으로 방영될 <왕의 신하>는 한동하, 채설아의 궁중 암투와 조연석, 강화영이 한성부 사건을 해결해 나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조선 시대 무협 로맨스 사극이다.
또한 조연석, 한동하와 함께 로맨스 삼파전을 보여줄 것으로 알려진 주시후는 「I want you」로 음원 차트를 쓸었던 가수이며 드라마에 첫 도전하는 만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외에도 개그맨 출신의 류담식과 최준혁이 각각…….]
그 밑에 달린 댓글들.
힘내라. 잘해라.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지켜보겠다.
가수들은 좀 노래만 하면 안 되나?
이런 우려와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드디어 첫 드라마 촬영 날이 다가왔다.
* * *
“그럼 혜경 누나는 당분간 쉬는 거예요?”
“회사 소속이다 보니 네가 일이 없을 때는 다른 연예인 케어해야지.”
“그럼 저는요?”
“사극은 특히 분장사가 따로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
내가 머리를 쓸어 넘기자 김남규 팀장이 내가 앉은 쪽을 돌아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검은 머리도 잘 어울리네.”
“그래요? 팀장님 처음 만났을 때도 자연 모발이었는걸요.”
“아, 그랬나?”
양평에 설치된 드라마 촬영장으로 가는 길.
나는 차창에 반사되어 비치는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밝은색의 염색을 자주했기에 검은색 머리카락이 상당히 어색해 보인다.
일반인 같은 느낌의 머리색이랄까? 안 어울린다.
나는 머리카락을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다가 마구 흐트러트리며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연예인이었다고…….
“자! 다 왔다. 오늘도 일찍 도착했네.”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서 촬영해요?”
도착했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산 중턱이다.
산이라고 하기엔 조금 낮은 언덕 정도?
순간 나는 ‘아!’ 하고 대본에 있던 지문을 떠올렸다.
오늘 첫 신은 ‘아역 허인’에서 ‘성인 허인’으로 넘어가는 장면인데, 지문에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홀로 칼을 휘두르는’이라고 쓰여 있었던 게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이런 허허벌판에서 촬영을 할지는 몰랐는데…….
두툼한 점퍼을 입은 김남규 팀장은 차 보조석의 문을 내리며 말했다.
“추우니까 잠깐 차에 있어. 몇 시쯤 촬영 들어가는지 알아보고 올게.”
“아뇨! 저도 같이 내릴래요. 인사 먼저 드리고 올게요.”
“캬아. 신인 배우 자세 봐라. 아주 좋아!”
김남규 팀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을 보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카메라가 세팅된 곳으로 다가가니 먼저 와 있는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가운데에 전승원 PD가 조연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안녕하세요.”
내가 슬그머니 다가가자 전승원 PD가 손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깜짝 놀란다.
“시후 씨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두 시간이나 일찍 왔네요?”
“신인의 자세라고나 할까요? 감독님은 더 빨리 오셨잖아요.”
“하하! 그런가? 어쨌든 추우니까 이리 와요.”
쌓여 있던 눈이 녹고 3월의 중반으로 접어들었는데도 허허벌판에 서 있으니 봄바람이 꽤 매섭다.
카메라와 각종 장비가 놓인 테이블 옆으로 커다란 드럼통에 장작이 타고 있었는데, 전승원 PD가 나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내 로드 매니저인 김훈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란 보온 박스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스태프들에게 돌렸다.
내 손에 커피잔이 쥐여 쥐자 할 일을 마친 로드 김훈이 곧바로 내 앞에 의자를 하나 펴 주었다.
“시후야. 커피 들고 여기 앉아 봐. 사진 한 장 찍게.”
“사진은 왜요?”
“커피랑 의자랑 모두 ‘주슈’에서 팬 애들이 보내준 거야. 고마운데 인증샷 하나 정도는 찍어서 올려 줘야지.”
“아…….”
전승원 PD까지 서 있는데 나 혼자 의자에 앉는 것이 불편했지만, 사진 한 장만 찍고 일어설 것이라 김훈이 이끄는 대로 흔쾌히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아하하하! 주 배우?”
“네?”
“의자 등받이에 쓰여 있네요. 주 배우라고.”
놀라 일어나 살펴보자 녹색 의자 등받이에 하얗고 커다란 글씨로 ‘주 배우’라고 쓰여 있다.
“아! 이게 뭐예요? 형? 창피하게.”
“응. 그냥 앉아. 팬클럽 얘들의 마음을 걷어찰 건 아니잖아?”
“끙…….”
“그래. 주 배우, 사진 한 장 찍고 분장 좀 하고 와요.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시작될 것 같은데.”
“주배우…… 크흠…… 훈이 형! 이거 의자 좀 치워주세요. 창피해서 진짜…….”
김훈은 끝내 사진을 찍고 나서야 의자를 접었고 전승원 PD가 한곳을 응시하며 말하자 내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갔다.
그리고 촬영이 일찍 시작될 것 같다던 전승원 PD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찍을 신은 하나.
필요한 배우는 두 명이었는데, 둘 다 집합 시각보다 일찍 모였기 때문이다.
승용차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아역 배우.
어린 시절 허인 역을 맡은 김윤성이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형, 안녕하세요.”
전승원 PD와 내게 인사를 건네는 아역 배우는 나이가 열 한, 두 살이나 되었을까?
대본 리딩 때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안녕? 윤성이라고 했지?”
반가운 마음에 내가 보온 박스에서 따뜻한 유자차를 한 병 꺼내 내밀자 김윤성이 고개를 젓는다.
“저는 커피 마실게요. 혹시 아메리카노도 있나요?”
아쭈! 이 녀석 봐라? 초등학생이 아메리카노?
나는 황당함에 김윤성의 손에 유자차를 건네주었다.
“애들이 커피 마시면 키 안 커. 그냥 이거 마셔.”
“형. 그건 속설이에요. 커피를 마시면 키가 안 큰다거나 살이 빠진다거나, 머리가 나빠진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죠. 요즘에는 커피를 마시면 심장병이나 당뇨 예방이 된다고 해서 하루 한 잔 정도는 마시는 것이 좋다고요. 그리고 전 그렇게 애도 아니고요. 고1이거든요.”
“뭐? 고1?”
“하하하. 아역이라니까 어리게 봤구만. 윤성이가 또래보다 어리게 보이긴 하죠.”
그리고 전승원 PD의 입에서 나온 슬픈 현실.
한국에서는 하이틴 드라마의 시청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실제 15세부터 20세 가량의 청소년 배우들이 설 자리가 별로 없다고 했다.
연기를 잘해도 그런 어중간한 나이의 배우들은 폭풍 성장해 버리면 써 주는 곳이 없다는 것.
김윤성처럼 많이 어려보이는 친구들이나 아역 배우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쪽도 참…… 치열하네.
그런 김윤성을 대견하게 생각하며 나는 녀석과 나란히 분장차로 향했다.
“형. 노래는 할 만해요?”
“질문의 요점이 뭘까?”
“아니, 그냥. 가수는 어떤가 해서요. 어떻게 해야 가수가 될 수 있을까요?”
분장 차에 앉아 나란히 분장을 받으며 김윤성의 질문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글쎄다.
나도 그렇게 가수가 되고 싶었을 때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포기했고, 포기하고 나자 가수가 될 기회를 얻었지.
너도 가수가 되고 싶다면 오늘부터라도 길바닥을 잘 보며 걸어보는 건 어떠니?
혹시 너도 운 좋으면 엑스트라 링 하나 줍게 될지 또 아니?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왜?”였다.
“저 올해 열일곱 살이잖아요. 드라마나 영화 아역 하기에도 이제 나이가 너무 많고, 제 또래에 연기하는 경쟁자 애들도 너무 많고요. 이쯤이면 사실 아이돌 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들어서요.”
“가수도 힘들어. 형도 너만한 나이에 가수의 꿈을 꿨었는데, 군대 다녀와서 데뷔했거든. 연기하면서 그동안 쌓아 놓은 커리어가 아깝지 않아? 가수 쪽으로 전향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바로 데뷔한다는 보장도 없고, 이쪽도 힘들긴 마찬가지거든. 음반 출시하는 가수보다 등록하는 연습생이 더 많은 실정이라.”
“힘든 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네요. 흠…… 그럼 답은 하나네! 형이 이번에 연기를 쩔게 해주시면 되겠네요. 형이 주연배우들 다 씹어 먹고 확! 떠야, 저도 뜨죠.”
“야! 내가 좀비냐? 사람을 씹어 먹게?”
“잘하시라고요. 그래야 제가 어디 가서 주시후 아역 했었다고 명함이라도 내밀죠. 그게 정말 도움이 되거든요.”
“끙…… 그래 알았어. 잘해 볼게.”
요즘 고등학생들은 다 저런가?
아니면 저놈만 저런가?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해서인지 말끝마다 선배 포스다.
선배는 맞지. 6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다고 하니.
“분장 끝났습니다.”
분장사의 말에 거울을 보니 내 모습에서 제법 조선 시대 무사의 느낌이 흐른다.
그걸 본 옆의 꼬맹이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형, 좀 생겼네요?”
아우! 저 선배 꼬맹이 놈을 그냥.
* * *
황량한 언덕.
사방에서 흙갈색의 물결이 인다.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작은 사내아이.
양손으로 검을 꽉 거머쥔 채 부동자세이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사내아이의 머리카락을 휘저을 뿐.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눈을 감고 있던 사내아이는 눈을 ‘번쩍!’ 하고 뜨며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컷! 윤성아, 이리 와 봐!”
앵글을 들여다보던 전승원 PD가 급하게 김윤성을 부른다.
헐레벌떡 달려오는 김윤성이 눈을 끔벅거렸고.
‘뭘 잘못했나?’ 하는 표정이다.
이내 달려온 김윤성을 보고 전승원 PD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무슨 문제가 있나?
궁금증에 나도 전승원 PD의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들었다.
“너 액션 스쿨 안 나갔어?”
“아……. 저는 따로 가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레슨 안 받았어요. 김기만 감독님께서도 어린 허인은 무술이 어설퍼도 괜찮다고…….”
“그렇긴 하지. 어머니의 죽음에 이제 막 검을 들은 아역이니까. 그런데 그림이 너무 안 살아. 아! 시후 씨는 느낌 어땠어요? 무술 잘하잖아요.”
전승원 PD의 질문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전승원 PD의 특기이자 장점은 채광과 구도를 살린 장면 연출이었고, 이번 신은 외로움과 비장함을 담은 무거운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데.
김윤성의 마구잡이 칼춤은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다.
기 죽은 김윤성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나는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네가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고, 칼이 너를 휘두르는 느낌이야. 질질 끌려 다니는 것 같아 보여. 그러다 보니 검술을 펼치는 게 아니라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아 보여.”
“역시 그렇죠? 아무래도 액션 연기 하나 짜서 찍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어쩐다! 우리가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촬영을 시작하는 바람에 정두훈 감독 오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하는데.”
말을 하던 전승원 PD가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아마 정두훈 무술 감독이겠지.
“지금 어디예요? 얼마나 걸리시는데요? 한 시간이요? 딴 게 아니라…….”
그럼 오실 때까지 대기해야 하나?
제법 바람이 매서운데 차에 가서 기다릴까?
나는 그 순간 전승원 PD가 전화 통화에 열을 올리는 동안 촬영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전승원 PD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찍을 씬은 단 하나.
‘어린 허인’이 ‘성인 허인’으로 바뀌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스태프들은 스무 명 남짓이다.
“시후 씨가 왜요? 아, 그래요?”
이 많은 사람이 고작 두 명의 배우를 찍기 위해 새벽부터 모여 있다.
다른 촬영장에서는 A팀이 촬영 중이라고 하던데, 그곳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을까?
“알겠어요. 그럼 천천히 오세요.”
모두의 노고와 고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전승원 PD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후 씨. 지금 빨리 액션 연기 하나 짜 줘요.”
“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하였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승원 PD를 바라보았다.
“네?”
“정두훈 감독이 그러네요. 시후 씨가 그 정도 실력은 되고도 남는다고. 윤성이 좀 빨리 봐줘요. 10분 줄게요.”
“아…… 네.”
김윤성은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녀석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빼앗듯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신계 품계 5품, 검법의 신 ‘금소추’의 능력을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