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68화 (68/170)

# 68

68화 배우로 1막 1장 (2)

대본 리딩 장소로 지정된 미디어 센터 4층.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생소하다.

기다란 하얀 테이블과 50여 명의 배우가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각 배우들이 앉을 자리가 지정되어 종이에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옆에 가지런히 빨간 펜과 중간 중간 마실 물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양쪽 벽 앞에 50여 개의 의자가 더 세팅되어 있다.

이것은 제작진이나 관계자들, 그리고 매니저들이 앉을 자리였다.

1시간 전에 도착하여 내가 제일 먼저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자리에 앉아 소곤거리는 조연배우들 몇 명이 보인다.

눈을 마주친 내가 깍듯이 인사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기들끼리 다시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조연 배우들의 말소리만 도란도란 들려왔는데, 가끔씩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지 목소리가 작아지기도 했다.

나는 민망함에 괜히 대본을 만지작거렸다.

내 뒤에 김남규 팀장이 앉아 있기는 했지만, 일하러 왔는데 그 옆에 붙어 수다를 떨 처지는 아니었다.

힐끗 보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꽤나 바빠 보이기도 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일찍 왔나?

진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리딩장 입구의 문이 열리며 TV에서만 보던 중견 조연 배우들이 순차적으로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아!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개그맨 겸 배우 류담식.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쌓게 된 인맥인지 이미 와서 앉아 있는 조연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인사한다.

“어? 시후야. 일찍 왔네? 언제 왔어?”

“형. 오셨어요? 저도 조금 전에 왔어요.”

류담식과는 액션 스쿨에서 꽤나 긴 시간 훈련을 함께하며 돈독해졌다.

편하게 호형호제하는 사이.

둘 다 익위사의 무사로 세자를 호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나와 붙어 촬영하는 장면이 꽤 많을 것이라 개인 연습 시간에 액션을 조금 봐주며 내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었다.

그 뒤로 문영호가 들어서길래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손을 들어 인사하려다가 황급하게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뒤따라 들어오는 중견 배우는 내관 역을 맡은 최준혁이었다. TV로 볼 때와 상당히 다른 무게감을 잡으며 입장하였다.

워낙 재미있게 능청 떠는 연기를 잘하기에 실제 성격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상 배우였던 모양이다.

그 뒤로 줄줄이 비중 있는 배우들, 중견 배우들이 들어설 때 마다 모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다 보니 그냥 서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왕이 거주하는 궁궐의 상궁 나인, 내관 배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의 젊은 조연들.

서울 경찰청과 비슷한 기능의 한성부 팀.

고관대작이나 조정 대신 역할을 맡은 중견 배우들.

그리고 아역들까지.

약 50여 명의 배우들이 쉴 새 없이 리딩실 안으로 들어와 본인의 이름의 적힌 자리에 앉았다.

원로, 중견 배우들은 경력이 오래된 만큼 서로들 잘 아는 눈치였고 활발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반면 신인 배우들은 다들 눈동자만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해보였다.

곧이어 주연배우들의 입장도 시작되었다.

폴라 T와 슬랙스, 슬립온에 재킷까지 전부 블랙 컬러로 맞추어 입고 리딩실 안으로 들어서는 조연석.

바로 뒤에 따라 들어온 강화영.

두 사람이 인사하며 리딩실 안으로 들어서자, 배우들이 “와!” 하는 탄성을 내뿜는다.

“둘이 참 잘 어울리네.”

“너희 둘이 해피엔딩인가?”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연말에 ‘베스트 커플 상’ 받겠어.”

조연석은 선배들의 짓궂은 발언에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고 자리로 가서 착석했고, 강화영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든다.

‘시후야. 오늘 잘해.’

입 모양이 딱 그랬다.

강화영이 다모 역을 맡아서 그동안 액션 스쿨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어째 볼 때마다 더 예뻐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하얀 니트 상의에 청바지를 입고 털 부츠를 신었는데 머리 위에 쓰고 있는 빨간 털모자가 흡사 인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예쁜 동창을 둔 것이 마음이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거리고 강화영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번엔 한동하가 리딩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이번에 세자부터 왕까지의 역을 맡은 한동하는 실제로 처음 보았는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키가 몹시 컸고 깡마른 체격이었다.

‘비율이 엄청 좋네.’

평상시에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안하무인인 성격에 비해 연기는 볼품없다던 소문이었는데 확실히 외모는 주연배우감이다.

“안녕하세요.”

중저음의 목소리로 인사하고 나서 자리에 앉은 한동하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찾는 듯싶더니 이내 시선을 한곳에 멈췄다.

테이블 위에 ‘주시후’라고 적힌 하얀 종이.

그리고 그는 시선을 옮겨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쳐다봐?’

아까 내가 인사한 걸 못 봤나?

혹시라도 안 좋게 보일까 싶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마주친 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촬영하는 동안 한동하랑 내내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래선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주시후 씨.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죠?”

한동하의 가시 돋친 말에 나는 황당하고 억울했다.

지가 먼저 쳐다봐 놓고 나한테 왜 저래?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뭐라고 대답하지?

그쪽에서 먼저 쳐다봤잖아요.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때.

“동하 씨, 시후가 그렇게 쳐다보는 건 잘생겼다는 증거예요. 처음에 나 보고도 그랬거든요.”

다행히 대답을 고르기도 전에 한동하의 옆에 앉은 조연석이 대신 답해 주었다.

“맞지, 시후야?”

“네, 형.”

액션 스쿨에서 함께 운동하며 사이가 아주 가까워진 조연석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한동하의 표정도 점점 환해지며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아, 그래요? 그런 거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눈을 못 떼게 잘생겼던가요?”

“그럼요. 실제로 처음 뵙는데 잘생긴 외모는 물론이고 스타일도 너무 좋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키가 크셔서 그런지 모델 같습니다.”

“하하하! 시후 씨 사람 잘 본다는 얘기 많이 듣죠? 우리 둘이서 같이 붙는 씬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시후 씨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나랑 참 잘 맞겠네요. 앞으로 잘해 봐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껏 너그러워진 표정의 한동하가 손사래를 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이. 우리 호칭도 차차 바꿔 가자고요.”

역시 한동하는 들리는 소문과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최고여야 하고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목 끄는 것을 좋아하고 집중 받는 것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관심종자’.

잘생겼다고 띄워 준 말에 저렇게 사람이 바뀔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었다.

한동하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빈 옆자리를 힐끗 쳐다본다.

“선배님들 모시고 대본 리딩 하는 자리에 아직도 안 온 사람이 있네요? 개념이 없는 건가?”

내가 볼 땐 혀를 끌끌 차는 한동하도 그리 개념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빨리 왔다고.

어쨌든 한동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빈자리로 쏠렸다.

테이블 위에 적혀있는 이름은…….

그때 문이 열리며 마지막 배우가 들어섰다.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채설아였다.

“설아 오늘, 예쁘게 입고 왔네? 신경 쓰느라 지각한 거야? 선배님들 다 와서 계시는데 좀 일찍 오지 그랬어?”

한동하가 채설아를 보고 말을 건넨다.

채설아는 그의 질책에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엄밀히 따지면 지각은 아니지. 딱 정시에 맞춰서 왔거든. 그러는 오빠는 일찍 왔나 봐? 잘했네. 대본 리딩 전에 연습 좀 많이 해 놔야 그 발연기가 들통이 안 나지. 선배님들 후배님들이 이렇게 많은 자리에서 개망신 당하면 큰일이잖아?”

채설아의 독설에 한동하는 코 평수를 넓히며 한숨을 푹 쉬고는 소리라도 지를 요량으로 입을 벌렸다.

그때.

리딩실의 문이 열리며 박은숙 작가, ABS 방송국의 김기만 PD, 청룡 스튜디오의 전승원 PD가 들어섰다.

“다들 모이셨네요. 반갑습니다.”

대본 리딩의 끝판왕 격인 세 사람이 등장하자 리딩실 안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우들이 들어섰을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시험장에 감독관이 들어온 것 같달까?

배우들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긴장이 서렸다.

나 또한 침을 꿀꺽 삼켰고.

작가, 감독이 자리에 앉자 배우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고 한 명씩 소개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아까 전 조연 배우들끼리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 리딩은 진짜 목숨 걸고 해야 해. 지금도 별로 없는 분량이 반의 반으로 토막 날 수도 있어.”

“반의 반 토막이 뭐예요. 아예 빠지는 수가 있지. 예전에 제가 박은숙 작가님이랑 드라마 해 본 적이 있는데 특히 대사 씹는 거 싫어해요. 마음대로 대사 바꾸는 거 말이에요.”

“그래? 나는 전에 김기만 PD님이랑 드라마 했었는데, 감독님은 분위기 띄워주고 애드리브 치는 거 엄청 좋아하시는데.”

“아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해요?”

글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김기만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허인 역을 맡은 가수 겸 배우 주시후 씨.”

내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모두의 박수를 들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묘한 쾌감을 느꼈다.

배우 주시후라…….

뭔가 한자리를 차지한 느낌을 들었지만 동시에 배우라는 타이틀이 살짝 어깨를 짓누르고 책임감도 가지게 만들었다.

이 드라마의 성패에 나도 지분을 가지게 된 것이니까.

이윽고 배우들이 정식으로 인사를 마치자 김기만 PD가 대본 리딩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왔다.

“자, 그럼 이제 1화부터 시작해볼까요? 우리 아역들 준비 잘해 왔지?”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이 시작되자 배우들의 목소리와 대본을 넘기는 소리 말고, 다른 것은 들리지 않는다.

2화 후반까지는 아역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뤄 평균 연령 12세의 아이들이 대본을 읽어나갔는데 뒤에 앉아서 응원하는 부모들의 표정이 꽤 볼 만했다.

내 아들이 대사 하나를 끝내면 주먹을 쥐고 잘했다고 응원하기도 하고, 내 딸이 대사 하나 칠 차례가 돌아오면 끝나는 내내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도 했다.

아역을 필요로 하는 드라마는 적은데 연기하고 싶어 하는 아역들은 많고.

여기서 실수라도 하면 끝장이라는 표정들이다.

반면에 아역 배우들은 부모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리딩을 이어나갔는데 모두들 표정이 살아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심 감탄하였다.

아역이라지만 그래도 역시 배우들이었다.

* * *

대본이 3화에 들어서자 이번엔 주·조연 배우들 눈빛이 반짝거리며 빛을 낸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원로 배우들 또한 허리를 곧게 펴고 대본이 놓인 테이블에 딱 붙을 지경이었으니, 나 같은 신인 배우는 대본을 뚫어지라고 쳐다보며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의 흐름에 집중하고 배우들과 호흡을 함께 한다.

이것이 대본 리딩의 가장 큰 이유였다.

액션 장면에도 합이 있고 서로 맞출 시간이 필요하다면,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감정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사의 속도를 알아가는 시간.

지금 원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부분을 보며, 빠르게 말하면 빠르게 받아치고 느리게 말하면 느리게 받아쳐 주는 합을 미리 맞춰보는 것이 엄청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 6.

동궁전, 세자가 잠행을 나가려 환복 중이다.]

배우들의 리딩이 3화의 여섯 번째 신에 다다르자 나는 목을 축이려 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옆에서는 동궁전의 내관 역을 맡은 최준혁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우! 저하! 아니 되신다니까요.”

한동하가 그 말에 짜증 섞인 표정으로 팔을 허공에 뿌리치며 대꾸했다.

“아, 쫌! 놔 보라니까아? 허인이 데리고 나갔다 오면 안전해. 안 걸릴 자신도 있어.”

“에휴. 그렇게 말씀하시고 매번 들통 나시지 않습니까? 저번에 저하 덕분에 터진 볼기짝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맞으면 저 죽습니다.”

“아! 왜 이렇게 질척댈까? 정 그러면 너도 함께 나가자꾸나. 어차피 내가 걸리면 네가 맞아 죽을 텐데. 바깥구경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나서 죽게 되면 덜 억울할 것 아니냐?”

“아이고! 아이고! 그냥 소인을 이 자리에서 죽여 주십시오.”

“아! 놓으라니까. 내가 조심히 다녀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거라. 명이다.”

(세자 이수가 사라진 동궁전, 방에 혼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며….)

“저 이씨! 이번에도 걸리면 너 죽고 나 죽는겨! 저런 #$%&@$%^@”

내관역을 맡은 최준혁이 갑자기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를 치며 욕을 해 댄다.

그 바람에 한껏 경직되어 있던 리딩실 안에 웃음꽃이 피며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 계속되는 비방용 대사들.

배우들의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김기만 PD는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고, 박은숙 작가도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도는 것이 싫지 않은 눈치이다.

대사 토씨하나 틀리는 것도 싫어한다던데 다 맞는 말은 아닌가 보다.

최준혁 덕분에 긴장감을 해소한 나는 드디어 내 차례의 대사를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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