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길 가다 주운 SSS급 반지-67화 (67/170)

# 67

67화 배우로 1막 1장 (1)

다음 코너인 ‘나를 이겨 봐.’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면 고정 출연자들이 한 명씩 도전하여 이기는 간단한 룰.

이번 게스트들은 나나 ‘어니스트’나 모두 가수였기에, 만일 게스트들이 고정 출연자들을 이기게 되면 프로그램 엔딩에 뮤직비디오를 내보내 준다고 했다.

덕분에 어니스트 멤버들 모두 의지가 불타올랐다.

나야 소속사인 B&M 엔터테인먼트에서 일을 잘해주는 덕분에 뮤직비디오는 이쪽저쪽 프로그램에서 잘 팔리는 실정이었고, 음원 차트 1위를 한 이후로 노래도 많이 알려진 터였다.

그리고 오늘 방송 출연은 순전히 하상훈과의 의리로 출연한 것이라 어차피 엔딩 뮤직비디오를 내보내 준다고 해도 어니스트의 것으로 합의 보려 마음먹고 있었지만.

하상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나를 응원하자 내 의지도 함께 불타올랐다.

더욱이 만일 지게 되면 고정 출연자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는데, 이번엔 하얀 쫄쫄이 의상을 입고 번화가에서 ‘아는 형님들’의 프로그램을 홍보해야만 했다.

쫄쫄이는 피해야겠지.

굳게 마음먹은 나는 하상훈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고정 출연자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는 뭐든 다 자신이 있어. 너희들이 원하는 종목으로 덤벼도 좋아.”

“오!! 오!!”

내 도발에 고정 출연자들이 모두 일어서서 환호한다.

아닌가? 야유인가?

어쨌든 내가 한 말에 앞에 앉은 제작진의 표정이 환해진 건 사실이다.

다양한 그림을 뽑을 수 있으니.

물론 녹화 시간은 조금 길어지겠지만, 고정 출연자들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모두들 방송 베테랑이었고, 방송만 잘 뽑힌다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먼저 나선 사람은 김철영.

웃기는 것 빼고는 모든 다 잘한다는 스마트한 이미지답게 그가 고른 종목은 ‘수도 이름’ 말하기였다.

나와 김철영은 나란히 섰고 PD가 문제 출제를 시작하였다.

처음엔 누구나 쉽게 답할 수 있는 가벼운 문제들.

영국은 런던, 프랑스는 파리 같은 쉬운 문제 몇 개로 서로의 탐색전이 있었다.

김철영은 수많은 내공을 쌓아온 예능인답게 그 대답이 무지 빨랐고, 나는 그런 김철영을 구경하느라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

때문에 고정 출연자들의 어깨는 뽕을 넣은 것처럼 한껏 부풀었고, 반면에 ‘어니스트’의 표정은 죽상이 되어갔다.

그 다음엔 중급 난이도의 문제들이 출제될 거라 했다.

“총 열 문제를 먼저 맞히는 쪽이 이기는 거랬지? 그럼 철영아. 이만 끝낼게. 뒤에 다른 애들이 도전을 기다리잖니.”

내 말에 김철용이 새치름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할 수 있으면 해 봐.” 하고 말한다.

응. 할 수 있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PD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문제 이어서 나갑니다. 스웨덴의 수도는?”

“스톡홀름.”

실로폰의 ‘딩동댕!’ 소리가 영롱하게 세트장 안에 울려 퍼지며 정답을 알린다.

“다음 문제, 칠레의 수도는?”

“산티아고!”

딩동댕!

“다음 문제입니다. 우르과……”

“몬테비데오!”

딩동댕!

“그럼 레바논의……”

“베이루트.”

“룩셈부르크의…….”

“룩셈부르크!”

눈 깜짝할 사이에 문제 출제와 정답 제시가 이루어졌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내 빠른 대답에 입을 떡 벌리고 놀라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제 수도 이름을 봐 두길 잘한 듯싶다.

그 기세를 몰아 나는 계속해서 정답을 맞히고 맞혔다.

단숨에 승리에 가까워져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정답을 말할 경우 나의 승리였다.

“자, 다음 문제 나갑니다. 타지…….”

“정답! 타지마할”

“정답. 타란? 타란툴라? 타지마!”

“정답. 슬럼파키타? 이히브랑크? 에이씨! 모르겠다.”

PD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김철영이 아무 말이나 쏟아냈다.

어떻게든 제지해야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안 되겠는지 이내 포기한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웃음을 삼키며 손을 들었다.

“정답! 두샨베.”

딩동댕!

“타임! 타임! 야 너 문제는 알고 대답하는 거야?”

“당연하지. 타지키스탄이잖아. 중앙아시아에 있는 공화국이지.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철영이 너 좀 부끄럽다?”

“쩝.”

김철영이 쓴 입맛을 다셨고, 다음 주자로 민정훈이 나섰다.

“나는 태권도에 자신이 있지! 송판 격파 대결을 요청한다!”

평소 태권도 좀 배웠다던 그는 내가 양손에 쥐고 있던 송판을 발차기로 하나씩 깼다.

그리고 제법 높이 든 송판 격파에도 성공하였고.

이를 본 나는 민정훈, 이성민 그리고 서장운의 양손에 송판을 쥐여주었다.

총 6개의 송판의 위치는 민정훈의 가슴. 이성민은 눈 앞, 그리고 키가 2미터가 넘는 서장운의 머리 위였다.

나는 가볍게 민정훈과 이성민의 송판을 깨고 도움닫기를 하였다.

금세 가속이 붙자 땅에 손바닥을 대고 텀블링을 한 후 제자리에서 공중 돌기 한 바퀴를 더 하여 서장운이 잡고 있는 송판을 격파하고 땅에 착지했다.

입을 떡 벌리는 민정훈의 앞에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으로 마무리 하자 이번엔 이성민이 축구공을 들고 나섰다.

종목은 볼 리프팅.

보통 사람들은 100개 하기도 힘든데, 이성민은 자신의 최고 기록이 217개였다고 허세를 떨며 시작했지만 말과 다르게 축구공 무릎 리프팅의 개수는 46개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47개를 해내고 승리했다.

강화동이 핀잔을 주며 옆에서 리프팅을 해 보았는데 50개를 넘겨버려 이성민은 고정 출연자들의 눈총을 받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농구 선수 출신 서장운이 가지고 나온 카드는 농구 슛 쏘기였는데 꽤 먼 거리에서 세 번 중 두 번의 슛을 성공한 서장운을 제치고 나는 세 번의 슛을 모두 성공했다.

그것도 한 손으로.

고정 출연자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반면에 그룹 ‘어니스트’는 환호성을 지르느라 바빴다.

마지막은 강화동과 이숭근, 김휘철이 한꺼번에 출전하였는데 종목은 평소 이들이 강세를 보였던 ‘음악 듣고 제목 맞히기’였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서는 이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종목 선택 잘했네. 내가 제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대결이거든.

분명 누구 하나는 이 종목을 들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해서 내가 어제 하루 동안 들었던 노래의 수는 셀 수도 없다.

그것도 현명하게 딱 앞부분 5초만 듣고 꺼버렸다.

70년대부터 현재까지 유명하다 했던 곡들을 모두 다.

출전한 세 명의 고정 출연자와 함께 선 내 입가에 ‘씩!’ 하고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 * *

60평 남짓한 아파트.

한강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거실에 한 사내가 소파에 등을 파묻고 앉아 있다.

테이블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가끔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손에 대본을 든 사내.

천장에는 화려한 조명등 몇 개가 거실을 반짝이고 있고, 벽면에 늘어서 있는 장식장에 진열된 여러 개의 트로피와 상장패들이 조명을 받아 더없이 반짝이고 있다.

장식장에서 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번 건 뭔가 감정이 안 실렸다고 해야 하나? 조금 더 격정적으로 다시 해 볼래?”

“아, 또?”

“이 옆에 올해 연기 대상 트로피 하나 더 놔야지, 안 그래?”

“흠……. 알겠어.”

소파에 앉은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심기일전하여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놔라! 놓거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바마마를 뵈어야겠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단 말이다!”

드라마 <왕의 신하>의 임금, 이수 역을 맡은 한동하.

“됐어? 이번엔 괜찮았어?”

서 있던 매니저에게 묻는다.

“조금 전보다는 나은 것 같아. 그런데 대사의 톤이 조금 가벼운 느낌이야.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했는데 너무 점잖다고 해야 할까?”

“놔라! 놔라! 놔라! 이렇게?”

한동하는 점점 격앙된 목소리로 대사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그렇지. 놔아라! 놓아라아! 이렇게 대사의 끝에 감정을 실으면 어떨까? 신하들이 붙잡고 있는 팔을 뿌리치며 소리 지르는 거잖아.”

“아……. 배우는 형이 해야 되는데, 쩝. 어쩌다가 매니저로 빠졌어? 형, 진짜 연기해 볼 생각 없어?”

“나는 이게 안 되잖아.”

매니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음. 형이 그게 딸리긴 하지. 자고로 배우는 나처럼 깨끗하고 엣지 있는 마스크여야 하지. 나는 아직도 거울을 볼 때 깜짝깜짝 놀라거든. 아……. 이런 천의 얼굴이 있나…… 하고.”

한동하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자신의 턱에 가져다 댔다.

그걸 본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고.

도대체 저놈은 겸손이라는 것이 없다.

인기를 얻어서가 아니라 원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나마 매니저가 한동하의 옆에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은 한동하가 겸손함이 없지,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쩔 때 보면 가끔 귀여울 때도 있었고.

‘저런 자신감이 이 바닥에서 한동하를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힘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기죽어서 다니는 것 보다는 낫지 뭐.

잠시 상념에 들었던 매니저는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동하의 부름에 정신이 돌아왔다.

“형.”

“왜?”

“여기 내 호위 무사 있잖아. ‘허인’ 역. 그게 누구라고?”

질문을 받은 매니저는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 한동하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매우 보기 힘든 일이었다.

“주시후라고, 요즘 잘나가는 가수야. 왜?”

“솔로?”

“응.”

“흐음……. 배우도 아니고 가수가 박은숙 작가님 눈에 들었다는 거지?”

한동하는 손바닥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턱을 괴고 물었다.

매니저는 한동하가 왜 저렇게 주시후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했다.

“그렇지. 정식으로 오디션 봐서 뽑힌 거야. 무술을 상당히 잘한다고 하더라고.”

“그래?”

“왜? 동하야, 뭐가 신경 쓰여?”

한동하는 대본을 다시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4화까지 대본 보고 내 따까리 역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5, 6화 대본 나온 거 보니까 비중이 확 늘었네? 대사도 많아지고, 액션 씬에 원 컷도 많고……. 이러다가 주·조연이 아니라, 주연되겠는데?”

한동하의 말에 매니저는 등에 진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더라니.

어디서나 돋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한동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대본 작가는 박은숙.

저놈이 수틀리면 박은숙이 아니라 박은숙의 할머니가 온다고 해도 대본을 수정해 달라고 떼를 쓸 것이 뻔한데 그랬다가는 박은숙 작가의 성격상 한동하가 7화 또는 8화 정도에 사망하는 것으로 대본을 수정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매니저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한동하의 의견에 반박하였다.

“아니야. 무술은 꽤 하는 모양인데, 연기는 완전 생 초짜라 별 볼일 없을 거야. 너 같은 톱배우랑 비교나 되겠어? 신경 쓰지 마.”

“그렇지? 내일 대본 리딩 할 때 보면 알게 되겠지, 뭐.”

한동하는 잠시 소파에 내려놓았던 대본을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대본 리딩 하는 거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작가님한테 말해도 늦지 않잖아. 걔 분량 빼서 나 달라고…….”

한동하의 말에 매니저는 이마에 한 줄기의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 * *

드라마 <왕의 신하> 대본 리딩 당일.

나는 드라마의 투자사인 ‘PS 미디어 플랫폼’에서 제공한 미디어 센터로 향하는 차에 올라타 있다.

창밖으로 지나쳐 가는 풍경들과 함께 지난 40일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동안 매일매일 액션 스쿨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김남규 팀장이 드라마에 매진하라며 간단한 촬영이나 방송 스케줄을 아예 커트해 버리는 바람에 마땅히 할 것도 없었다.

그 덕분에 시간이 남아돌아 단순히 무술을 배우고 합을 맞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시선 처리하는 법이나 와이어를 사용하는 고난도 액션도 배웠다.

내 습득력에 흡족한 정두훈 무술 감독이 자꾸 고난도의 무술 씬으로 동작을 바꿔 버리는 바람에 합을 맞춰야 하는 상대 배우들만 죽어났지만, 고퀄리티의 액션으로 자신들의 액션까지 ‘확!’ 살아나니 배우들 또한 입을 꾹 닫고 열심히 따라왔다.

나는 틈만 나면 문영호를 비롯한 조연 배우들의 개인 연습을 도왔고, 그 덕분에 처음엔 고까운 눈빛으로 일관하던 조연 배우들과 사이가 제법 돈독해 졌으니 앞으로 드라마 촬영하는데 서로 서먹해서 분위기를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문영호를 깔아뭉개던 정해수는 빼고.

내게 사과한 이후로 딱히 괴롭힘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섞지도 않았다.

어차피 서로 붙는 씬도 한 장면밖에 없었고.

“다 왔다. 시후야.”

김남규 팀장의 말이 상념을 흐트러트리고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 빨리 왔네요.”

“응. 차가 안 막혀서. 대본은 내가 챙길 테니까 그냥 내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갈래?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

김남규 팀장이 시계를 들여다보자 나 또한 시선이 시계로 갔다.

“그냥 올라갈래요. 9시 집합이라면서요. 이런 날일수록 신인 배우가 일찍 가서 대기해야죠.”

내 말에 김남규 팀장이 기특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자세 좋네! 그럼 올라가자.”

차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대로변 높이 우뚝 솟은 미디어 센터 입구에 서서 크게 심호흡하였다.

드라마의 주연, 조연 배우들. 그리고 아역 배우들까지 모두 모이는 자리.

앞으로 벌어질 내 인생 2막에 대한 설렘과 조금의 긴장감으로 심장이 두근거린다.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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